유희충동2_ 그림책 [Rosie's Walk]_ Pat Hutchins
늘보,
엄마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
은근히 빠르고 정확해,
직장 동료는 나를 이렇게 말했다.
성격은 급하고 행동은 느려요,
나는 나를 이렇게 생각한다.
재작년 겨울,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겼다. 성인의 정상 맥박은 분당 60~80회라는데 내 심장은 100회를 넘나들며 뛰었고, 가끔은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120회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대학병원 심장내과에 가서 며칠에 걸쳐 검사를 하고 받은 (잠정적) 진단명은 ‘가면성 고혈압(병원에서 잴 때에는 정상 혈압으로 나오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고혈압)’이었다. 간헐적으로 혈압이 높게 나오는 증상이 부정맥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으므로 혈압약을 먹어보자는 의사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다니던 의원의 내과의와 한의사는 혈압약을 복용하게 되었다는 내 말에 말을 아꼈다.
혈압약을 먹으니 혈압은 내려갔지만 심장 박동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정신의학과에서는 현재로서는 특별한 진단명이 나오지 않으니 쉬어보라고 했고, 한의원에서는 침과 한약을 처방해 주었다. 심장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자는 심정으로 우리나라 심장내과 권위자로 알려진 의사를 찾아갔다. ‘부정맥 증상이 보이긴 하지만, (심장내과 전문의인) 제가 도와드릴 것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시적인 증상일 수 있으니 두통에 진통제를 먹듯,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처방받은 심장약을 복용하면서 지내보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심장이 구조적으로나 기능적으로는 이상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몸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몸보다 마음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몸보다는 마음을 돌보는 데 마음을 많이 썼다. 내 몸은 그림자 정도의 존재감으로 몸을 따라다녔다. 가끔 몸이 말을 건네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나는 집안일에 정신을 쏟고 있을 때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아이에게 그러했듯 ‘응, 응, 그래, 그래, 잠깐만~’ 정도로 호응했다. 몸은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고 순한 아이처럼 슬그머니 물러서 주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내 몸은 울음을 터트렸고,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안아 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4주 병가에 들어갔다. 서둘러야 할 상황을 가능한 한 만들지 않기 위해 일상을 가지치기하고 의도적으로 느릿느릿 생활했다. 규칙적으로 약을 챙겨 먹고, 일정한 시각에 혈압과 맥박을 재고, 음식을 조절했다. 야행성 습관을 버리고 가능한 한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했고, 심장이 신호를 보내면 하고 있던 일을 바로 멈추려고 애를 썼다. 조심스럽게 산책을 했고, 일주일에 두세 번, 필라테스를 하러 갔다.
그리고 병가 직전에 학교에서 서둘러하는 일을 틈틈이 했다. 학급문집에 실을 아이들의 글을 고르고, 졸업 기념 동영상에 필요한 사진들을 골랐다. 고르는 일은 곧 버리는 일이라서 그건 내게 늘 어려운 일이었는데 시간을 두고 느릿느릿하니 더 어려웠다. 목요일 저녁에는 교실에 숨어들어 다음 주 주간학습안내와 수업에 필요한 자료 몇 가지, (임시로 학급을 맡은 분보다) 내가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은 일들을 하고 왔다. ‘병가 기간인데 이것도 내려놓아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학교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가 기간에, 심장 박동이 빨라질 때 누워서 쉬는 것보다 천천히 걷는 것이 박동수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운동량을 늘렸다. 산책과 필라테스 외에, 매일 계단을 오르내렸고, 실내에서는 짬이 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스태퍼를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몸이 열리며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내 과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장 박동수’에서 ‘땀방울’로 바뀌고 있었다. 땀방울은 나를 도취시켰고, 이 새로운 감각은 점점 나를 과하게 밀어붙였다.
관절과 근육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안 쓰던 기계를 윤활유로 달래듯, 참고 견디며 운동을 지속했다. 평생 이 정도로 운동해 본 일이 없어서 ‘힘듦’과 ‘통증’을 구분하지 못했고, 전자는 참는 게 미덕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내 몸은 알이 배긴 것과 부상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한 채 더 내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저앉아 버렸다. 3달 동안의 운동은 그렇게 강제 멈춤 되었다. 계절은 아직도 겨울 한복판이었다.
이렇게 미련스러울 수가. 그동안 방치했던 몸을 돌본다면서, 다른 사람 몸도 아닌 나의 몸인데, 어쩜 이렇게 둔할 수 있을까. 앉아 있는 자세가 힘들고, 특히 앉았다 일어날 때의 고통이 극심했기 때문에 식사조차 서서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치료법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무조건 쉴 것, 본드로 붙여 놓은 인형 다리가 잘 붙었나 흔들어 보지 말 것(컨디션이 나아져도 시험 삼아 걸어보지 말 것)’이었다. 강제로 떠나긴 했어도 ‘운동과 함께 하는 느릿한 일상’은 내가 선택한 목적지였지만, 침대는 내가 선택한 곳이 아니었다. 불시착한 침대에서 나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가수면 상태를 헤매다가 느닷없이 수마에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꿈이었을까, 생각이었을까.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리스트’가 보였다. 무수한 의욕과 의무감들이 맛집 앞에 늘어선 손님들처럼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급한 사안이 아니고, 묻어두었다가 때가 되었을 때 꺼내서 처리해도 될 일을 내 머리는 놓칠세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재생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외부의 무언가가 나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습관이 외부의 자극을 재촉의 시그널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니 몸은 누워 있어도 마음은 늘 달리기를 할 수밖에.
그렇게 조금씩 몸과 마음의 관계가, 나라는 사람이, 가끔 궁금해했던 ‘몸놀림이 느린 내가 말이 빨랐던 이유, 나는 늘 쫓기는 기분인데 남들 눈에는 여유롭게 보이는 이유, 성격은 급한데 행동은 느린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래서 실은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 질문 속에 실마리가 있었다.
그랬다. 내게, ‘늘보’라는 엄마의 말은 극복대상이었고, ‘서두르지 않고 섬세하고 정확하게 처리한다’는 동료들의 피드백은 달콤한 유혹이었으며, ‘성격은 급하고 행동은 느리다’는 규정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이자 자기 방어였다. 성격이 급한 것이 아니라 느린 천성을 재촉하느라 마음이 급했던 것이고, 몸놀림이 느리다는 것을 미리 공표함으로써 반전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온통 타인의 마음뿐 그 어디에도 나의 마음은 없었다. 이솝 우화 ‘당나귀를 팔러 가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바깥의 소리(다른 사람의 말뿐 아니라 자기 위안이나 자기 방어 또한 바깥의 소리다)를 쫓아다니느라 내 안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그러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소리 내는 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솔직하고 명랑하게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지만 그건 모두 찰랑거리는 수면 언저리에서의 일이었을 뿐,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내 마음에 무지했다. 때로는 은폐도 했다. 그때 로지가 떠올랐다. <로지의 산책>에 나오는 주인공, 암탉 로지가.
<로지의 산책>은 팻 허친스(한동안 ‘얼굴과 몸매가 다 되는’ 것보다 더 부러운 ‘글과 그림이 되는’ 그녀라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로 나는 이 작가를 무척 좋아한다)의 그림책이다. 그녀의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은 오케스트라의 서로 다른 파트 같다. 글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림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서로 다르게 진행되는데, 그 불일치가 더할 나위 없이 유머러스하고 아름답다. 그녀의 글과 그림은 말없이 나란히 걷다가 가끔씩 눈빛을 주고받는 사람들처럼 명랑하고 다정하다.
제목에 나타나 있듯, 이 그림책은 암탉 로지가 산책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닭장을 나온 로지는 ‘마당을 가로지르고, 연못 주변을 돌고, 건초더미를 넘고, 방앗간을 지나고. 펜스 사이를 통과하고, 벌집 아래를 지나,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닭장에 돌아온다. (간결한 문장 속에 다양한 전치사 - across, around, over, past, through, under, in, for-가 사용되고 있어서 이 책은 종종 ‘전치사를 가르치는 책’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속표지에는 로지의 산책 경로를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농장 전체의 모습이 실려 있다. 산책하는 로지의 뒤로 로지보다 몇 배쯤 덩치가 큰 여우가 뒤따른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아직 이 그림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상상한 후 그림책을 펼쳐볼 것을 권한다. 암탉과 여우의 관계, <로지의 산책>은 당신이 짐작하는 클리셰를 가뿐하게 뛰어넘을 것이다.)
산책 내내 로지는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걷는다. 로지의 발걸음에 따라 장면은 계속 바뀌고, 로지 뒤를 따르는 여우에게는 온갖 일이 벌어지지만 로지는 한결같다. 두 페이지로 이루어진 화면은 약간의 프레임 이동으로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연달아 두 번씩 등장한다. 각 장면의 첫 번째 화면에서는 여우가 로지를 덮치려는 모습을 강한 색감으로 보여주고, 두 번째 화면에서는 여우가 실패하는 모습을 톤 다운된 색감으로 보여준다. 장소의 바뀜에 따라 공격과 실패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되는 가운데 로지는 여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 걷고 있다. 무심하다 못해 천연덕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로지는 뒤에 여우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여우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번번이 곤경에 처하는 여우의 표정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실패가 반복되고 있는데도 표정이나 몸짓에서 크레셴도가 감지되지 않는 여우로 인해, 여우가 처한 곤경이 더 코믹하게 느껴진다. 노랑, 빨강, 검정 세 가지 색상과 그 색상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몇 가지 색으로 표현된 색조는 안정감과 따스함을 주고, 화면이 바뀔 때마다 잠깐씩 차례로 등장하는 개구리, 새, 염소, 쥐, 나비, 벌들의 몸짓과 표정 덕분에 이 그림책은 더욱 명랑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독자는 여우가 처하는 곤경에 부담 없이 웃음을 터트릴 수 있고, 여우에게서 눈을 돌려 로지의 산책을 응시하게 된다. 특별히 방어하지 않았으나(않았기 때문에?) 공격당하지 않는 로지의 산책을.
로지는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 여우가 눈앞의 암탉을 노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생태계의 이치지만, 로지의 발걸음은 자기를 덮치려 하는 여우의 접근을 ‘코믹하게’ 막아낸다. 바깥세상에 무심한 듯 걷고 있지만, 로지의 산책은 자신을 위협하는 여우까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담아내며 평화로운 농장의 한때를 그려낸다.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지 않고, 누가 나를 쫓아오지 않나 서두르지 않고 눈을 반쯤 감은 채 꿈이라도 꾸는 듯 자신의 속도로 걸음으로써 오히려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살면서 무수한 말들을 만났다. 그 만남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기도 했고, 걸려 넘어지거나 유혹에 이끌려 끌려다니기도 했다. 삶 속에서 말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은 그 자체로 말의 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로지가 묻는다. 정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느라고 네 마음을 놓친 거니? ‘느리다’는 콤플렉스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네 자신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느리다’는 말을 비난으로 알아들은 내 귀에는 엄마의 말 너머에 있는 말이 들리지 않았고, 마음 너머에 있는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말의 외양에 걸려 넘어졌고, 그것에 쫓겨서, 넘어서거나 부응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내가 허둥거리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여유로운 ‘척’했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여우의 먹잇감이 되어 갔다.
나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충돌하지 않고, 나와 세계가 적대하지 않는, 팻 허친스의 글과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세계로 산책을 나선다. 내 삶이 된 언어들 사이를 로지처럼 가볍게, 고요하게, 코믹하게, 다정하게 걸어서, ‘가로지르고, 빙 돌고, 넘고, 지나고, 사이를 통과하고, 아래로 천천히 걸어서’ 맞춤한 시각에 도착할 것이다. 맛있는 저녁이 기다리는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