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 상상, 전달

유희충동_1 [Mole Music]_David Mcphail

by Maria 윤집궐중

가장 은밀한 것만큼 잘 보이는 것이 없으며 가장 미미한 것만큼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莫見乎隱 莫顯乎微).

- 「중용」




왜 두더지가


수채물감과 잉크로 섬세하게 그려진 David Mcphail의 그림책 「Mole Music」은, 바이올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 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던 주인공이 가슴 뛰는 일을 발견하고, 그 일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고, 외롭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자신뿐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영웅적인 이야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두더지이다. 작가는 왜 ‘땅 속에서 혼자 사는 두더지’를 주인공으로 발탁했을까?

땅속의 거미, 지렁이, 애벌레 등을 먹고사는 두더지는 야간에만 가끔 땅 위에 나타날 뿐, 대부분의 시간을 땅속에서 생활한다. 두더지의 눈은 피하에 묻혀 있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작고 시력도 좋지 않지만, 청각과 후각은 매우 발달해 있으며 진동에 대단히 민감하다. 넓은 앞발과 긴 발톱은 땅을 파기에 적합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땅을 파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셈이다. 두더지는 자신이 지닌 생물학적 조건이 ‘능력’으로 발휘되는 일을 하며, 자신이 만든 지하 터널에서 단독 세력권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림책 속표지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몰의 집 안 풍경은, 이러한 두더지의 생태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상상력을 잘 보여준다.




땅속과 땅 위가 어떻게


32페이지로 이루어진 이 책은, 거의 모든 장면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얼핏 보면 동일한 장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실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몰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변화가 들어 있다. 장면마다 달라지는 빛의 음영, 공간과 소품의 표현방법, 몰의 마음을 시각화하는 방식, 땅 위와 땅속을 매개하는 소통 채널, 공간 분할 등 그림에 담겨 있는 단서를 따라 ‘대비와 변화’에 주목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Mole이 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비는 ‘땅 위’와 ‘땅속’이다. 땅 위는 빛이 비치는 밝은 세상이고 땅 속은 빛이 차단된 어두운 세상이다. 땅 위에는 농부, 기사, 여왕, 대통령, 군사 등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땅속에는 몰 혼자 살고 있다. 이렇게 단절되어 있는 땅 속과 땅 위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을까? 땅속에서 연주하는 몰의 음악이 어떻게 땅 위로 울려 퍼지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었을까?

몰의 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과 몰의 우체통은 땅 위와 땅속이 서로 단절된 별개의 세상이 아님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품들은 우리에게 대비가 곧 단절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그림책에는 우체통과 텔레비전이라는 소통 채널보다 더 극적으로 두 공간을 매개하는 아이템이 들어 있다. 몰의 집 거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참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참나무 한 그루를 통해 땅속에서 연주하는 몰의 바이올린 소리가 땅 위로 울려 퍼진다.




참나무는 어디에서


이 참나무는 어떻게 몰의 집 거실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까? 표지를 넘기면 제목과 함께 실려 있는 그림 한 컷이 보인다. 그믐달 아래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먹고 있다. 다람쥐가 서 있는 곳은 몰의 집 거실 바로 위다. 다람쥐는 자신의 발아래에 몰의 거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몰도 다람쥐가 그곳에서 도토리를 먹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믐달 아래에서 호젓하게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의 모습은 몰의 거실이 몰에게 호젓하고 아늑한 공간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 준다.


한 장을 넘기면, 여우의 등장으로 깜짝 놀란 다람쥐가 도망가는 장면이 나온다. 고즈넉한 시간을 침범당한 다람쥐는 급하게 달아나느라 도토리를 떨어뜨린다. 땅 위에서 이 일이 벌어지는 동안 몰은 샤워를 하고 있다. 환하게 밝혀져 있는 몰의 집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있는 몰의 모습은, 다람쥐와 여우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추격전과 대비를 이룬다. 다람쥐는 여우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먹이인 도토리를 놓치고, 그 덕분에 도토리는 다람쥐의 먹이가 되지 않고 땅에 떨어져 나무로 성장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몰은 이들과 무관하게 평화로운 저녁을 보내고 있다.


다시 한 장을 넘기면, 떨어진 도토리의 변화를 보여주는 세 컷이 조그맣게 나타난다. 땅에 안착한 도토리가 시간과 햇빛과 비의 도움으로 싹을 틔우고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그림이다. 이 귀여운 그림이 있는 바로 옆 페이지에서 몰이 등장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몰은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열심히 굴을 파고 있다. 이 첫 장면은 표지 그림과 대비를 이룬다. 앞표지 그림의 몰은 곡괭이 대신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있고, 그의 헤드라이트는 땅이 아니라 악보를 비추고 있다. 그동안 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하루 종일 굴을 파는 일과를 마치면 몰은 저녁을 먹는다. 식탁이 아니라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그 거실 천장을 뚫고 도토리가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그 거실에서 몰도 도토리처럼 싹을 틔우게 된다. 몰은 성실하게 일하고 소소하게 휴식을 누리는 자신의 일상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몰은 자신의 삶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안정적인 삶을 누리던 몰의 일상에 희미하게 찾아든 이 균열은, 마치 도토리가 안정화된 내부 상태를 뚫고 나와 뿌리를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씨앗 상태의 도토리는 공기, 물, 영양분이 없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 휴면이 타파될 때, 도토리는 비로소 나무로 성장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몰의 집 거실에 뿌리내린 도토리와 몰의 마음에 스며든 느낌은 서로 닮아 있다. 도토리가 아름드리 참나무로 커가는 과정은 음악과 함께 성장하는 몰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시하거나 미미하거나


“나도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몰의 감동은 소망으로 전환된다. 몰은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밝히고 깃털 펜에 잉크를 찍어 가며 주문서를 쓴다. 땅 위에서는 새 두 마리가 어린 참나무를 갸웃갸웃 들여다본다. 몰은 주문한 바이올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매일 우체통을 확인한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나가 바이올린이 들어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한 빈 우체통 속에 손을 집어넣어 확인해 본다. 그렇게 3주를 기다려 드디어 바이올린을 받아 들었을 때, 몰의 마음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몰이 처음 바이올린을 들고 끔찍한 소음을 내는 장면은 깜짝 놀랄 만큼 재미있게,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이올린 소리에 매혹되어 배우기 시작해 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얼마나 생생한 묘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이올린은 아무에게나, 처음부터 자신의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바이올린은 섬세한 손길을 만나기 전에는 얼추 비슷한 소리조차 내지 않고 소음만 토해내는, ‘길들여지기’를 기다리는 예민한 아이 같다. 그래서 처음 바이올린을 손에 잡은 사람은 그 끔찍한 소리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연주자의 손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던 그 악기와 내가 들고 있는 이 물건이 같은 것임을 믿을 수가 없다. 그림책에서는 이 장면을 참나무의 뿌리, 잎, 새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통해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다.


몰은 바이올린을 시작하고, 끔찍한 소음만 내는 실망스러운 시간과 도무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은 절망적인 시간을 통과한다. 그런데 몰의 표정이나 몸짓에서는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그림책은 한결같이 연습에 몰두하는 몰의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몰의 마음 상태는 참나무와 그 나무 주위에서 살아가는 새들을 통해, 그리고 몰의 주변에 감도는 불빛의 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될 뿐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나아지지 않는 날들은 시들어가는 참나무와 그 나무를 떠나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새들로 표현된다. 이후 진행 상황은 참나무가 묘사된 모습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되며, 참나무 주변에 모여드는 새, 토끼, 사람들의 모습은 몰의 바이올린 연주와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맺는 관계를 아기자기하게 보여준다.

성실한 연습으로 채워진 몇 해가 흘러간다. 몰의 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의 안테나에는 거미줄이 가득하다. 몰의 연주 실력은 점점 더 좋아졌다. 몰은 예전보다 행복해졌다. 굴을 파는 낮에도 밤에 연주하는 곡을 흥얼거린다. 바이올린은 몰의 저녁 시간뿐 아니라 일을 하는 낮 시간도 바꾸어 놓았다.


몰의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살면서 무언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삶을 충만하게 해 주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일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은 어쩌다 한 번씩 가슴에 이는 바람이라고 여기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며’ 살아간다.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게 행복이지’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삶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라고 자신을 다독이기도 한다. 그 허전함을 ‘초대의 속삭임’으로 감지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운 좋게 가슴 뛰는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을 시작했다고 해서 행복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설렘을 안고 시작한 일도 막상 해보면 시시하거나 어렵게 느껴져서 그만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초기 단계를 무사히 통과하더라도 어느 시기가 되면 피할 수 없이 정체기를 맞게 되고, 그 미미한 진척에 실망하고 지친다. 설렘과 기대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피로감과 회의감이 파고든다. 이 고비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이나 상황을 핑계 삼으며 멈추어 선다. 그렇게 멈춘 그들은 다시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아들거나, 가슴을 뛰게 해 줄 ‘또 다른 어떤’ 일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한 순간의 감동, 결의에 찬 시작, 이상한 힘이 깃든 초기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매 순간이 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언가를 익히는 데, 내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연습의 과정은 ‘무의미를 참아내는 훈련’이다. 빛 한 점 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캄캄하고, 거기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공들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면 그 순간은 분명 빛을 머금고 있다. 낙심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림책 속에서 몰은 스탠드의 불빛을 받는 존재에서 스스로 빛을 머금은 존재로 바뀌어 간다. 몰은 자신의 일상을 사랑했지만(어쩌면 일상을 사랑했기에), 어느 날 마음에 불어온 바람을 놓치지 않고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찾아온 기회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찾아냈다. 몰은 망설이거나 미루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굴을 팔 때처럼 성실하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 일이 힘들 뿐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던 것처럼 묵묵히 나아갔다. 그렇게 몰은 행복에 이르렀다.




거실 그리고 허밍

거실은 몰에게 회복과 재충전의 공간이었다. 몰은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분주하고 고된 낮 시간의 피로를 풀고 소소한 행복을 누렸다. 거실에서의 저녁 시간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잠을 자는 것과는 또 다른 휴식의 시간이다. 그 공간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몰은 바이올린 연주를 보았다. 그리하여 소소한 즐거움과 쉼을 누리던 공간이었던 거실은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공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몰의 저녁 시간은 휴식에서 ‘여가’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거실을 묘사하는 장면을 통해 표현된다. 첫 장면에서는 캄캄한 거실만 등장한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침실, 욕실, 거실, 부엌, 창고 다섯 공간이 모두 같은 밝기로 환하다. 몰이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동안에는 몇 페이지에 걸쳐 거실만 등장한다. 그러다가 몰이 이전보다 더 행복해지고 굴을 파는 낮에도 밤에 연주하는 음악을 허밍 하는 때에 이르렀을 때, 그림책은 다시 몰의 집 전체와 일터를 두 페이지 가득 보여준다. 이때 그려진 몰의 집은 앞의 장면과 확연히 다르다. 이제 다른 공간은 모두 어둠 속에 잠겨 있고 거실에만 불빛이 밝혀져 있다. 그 외의 불빛은 굴을 파고 있는 몰의 헤드라이트뿐이다. 땅 위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곳으로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든다.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나무에 기대어 쉬기도 한다. 다시 한 장을 넘기면 화면 가득 참나무가 등장하고 시간은 별과 달이 뜬 밤으로 바뀌어 있다. 나뭇가지 가득 음악이 흐르고 새들은 나무 위에 사이좋게 앉아 있다. 나무 둘레에는 농부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정답고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몰의 집에 있는 다른 공간은 모두 생략되어 굴로 그려지고 오직 거실만 남아 있다. 빛이 가득 채워진 거실과 그 거실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몰의 모습만 보인다.


이 장면의 변화는 노동과 휴식만 있던 몰의 삶에 여가가 등장하고 그것이 그의 삶 전체를 비추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중심이 생겨남으로써 같은 밝기로 빛나던 시간과 공간들이 구별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서 휴식의 시간과 대척점에 있던 낮이라는 노동의 시간 또한 단순한 노동에 머물지 않고 ‘허밍이 가능한 삶’으로 바뀐다. 바이올린 연주는 몰의 저녁 시간만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중심이 됨으로써 낮 시간도 바꾸어 놓았다. 몰의 허밍은 여가와 노동이 중첩됨으로써, ‘생활’이 ‘삶’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몰은 결코 자신을 노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뒤로 갈수록 거실을 제외한 다른 공간이 점점 사라지며 동굴로 표현되는 것, 몰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실만 밝게 빛나는 것,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몰을 비추던 스탠드 불빛이 몰의 후광으로 확장되는 것,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를 때쯤이면 스탠드 불빛이 없는 공간에서도 몰의 주변을 오라가 환히 밝히는 것은 모두, 삶의 중심이 어떻게 삶 전체를 밝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들이다.



상상이 가능한 것은

몰의 삶은 그렇게 바뀌었고, 몰은 이제 그 옛날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사람보다 더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몰은 가끔 궁금하다.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면 어떨까? 몰이 이 생각을 할 때 땅 위에서는 아름드리나무에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달도, 별도. 새들도, 사람들도 몰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몰은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통령과 여왕들 앞에서 연주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슬픔을 녹일 거라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음악이 세상을 바꿀지 모른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몰이 이런 상상을 하는 동안 땅 위에서는 상상과 똑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이 땅 위의 장면들은 몰의 상상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일까? 어느 쪽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에, 몰의 상상 속에 ‘꿈’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부터 땅 위는 세밀하게 표현되는 반면, 땅속 몰의 집은 단순하게 그려진다. 공간 분할에 있어서도 땅 아래에 비하여 땅 위가 훨씬 넓게 잡혀 있다. 뒷 페이지로 넘길수록 땅속은 점점 좁게, 땅 위는 점점 넓게 그려진다. 처음엔 어땠을까? 앞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참나무의 성장과 함께 공간 분할의 변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땅 위는 몰의 성장과 함께 커지는 꿈이거나 그 꿈이 실현된 현실을 나타낸다. 상상인가 현실인 가는, 언뜻 생각하기와 달리, 그리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몰은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바이올린과 함께하는 동안 몰에게 일어난 일이, 그 내밀한 경험들이 이런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온 연주자의 음악이 몰의 삶에 변화를 일으킨 것처럼, 몰은 자신의 음악도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내 마음속 슬픔과 분노가 가라앉았던 것처럼, 내 음악이 누군가의 마음을 그렇게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음악이 내 삶에 빛을 비추어 준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몰의 상상은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라 성실한 시간들이 쌓여 빚어낸, 꿈이다.

이런 상상을 하던 몰은 피식 웃는다.

‘어리석기는! 누가 내 음악을 듣는다고, 내 연주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면서도 몰은 한 곡 더 연주한 다음 바이올린을 내려놓는다. 잠이 든 몰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꿈을 꾼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몰의 호기심과 상상이, 과시하거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는 결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몰은 왜 이런 것을 궁금해하고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를 감동시킬 때, 우리는 상상한다. 이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세상에 이로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피식 웃는다. 누가 듣는다고.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반짝임은 형체도 소리도 없지만 밖으로 전달된다. 그 경로를 추적할 수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어디론가 흘러간다. 「몰 뮤직」은 이러한 전달의 신비를 땅속과 땅 위. 그리고 그것의 매개가 되는 참나무를 통해 아름다운 한 편의 그림책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무도 듣는 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곡 더 연주한 몰, 몰의 꿈길에 찾아가 전해 주고 싶다.

“몰, 당신의 음악 소리에 대치하고 있던 군사들이 칼과 창을 던져 버렸어요. 전쟁을 멈추고 서로 화해하고 안아주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한 곡 더 연주한 바로 그 음악을 들으며, 당신과 함께 잠들고, 당신과 함께 아름답고 평화로운 꿈을 꾸고 있어요. 아니, 말해 줄 필요가 없었나요? 어쩌면 당신은 이미 꿈속에서 그들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몰에게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 자기 자신의 세계에 오롯이 집중하여 그 전투에서 승리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한 피아니스트를. 몰과 그가 만나서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상상하는 순간, 그들의 연주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내가 내 연주에 만족하면, 청중 역시 만족한다. ··· 약간 거칠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청중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이렇게 말한다고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말을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나는 단지 내가 청중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청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청중과 나 사이에는 일종의 벽이 존재한다. 내가 청중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을수록, 나는 더욱더 연주를 잘한다.

- 브뤼노 몽생종, 「리흐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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