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충동4 _ 그림책 [넉 점 반] _ 윤석중 시, 이영경 그림_창비
호박 덩굴은 고개를 갸웃 늘어뜨리고, 빨강 치마저고리에 하얀 버선, 검정 고무신을 신은 단발머리 아기는 발을 내딛는다. 어디로 가는 걸까?
문에 드리워진 발을 밀고 아기가 ‘구복상회’로 들어간다. 담배도 팔고, 닭도 팔고, 얼음과자도 파는 가겟집 구복상회는 복덕방이기도 한 모양이다. 가겟집 영감님은 안방에서 라디오를 고치고 있다. 방바닥에는 라디오 수리에 소용되는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다. 창호지 문에 발라 붙인 쪽 유리 너머로 아기가 들여다본다. 이마만 훤히 보이고 눈은 보일락 말락 하는 걸 보니 아기는 까치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문이 열렸다. 이제 아기는 문지방에 팔을 괴고 댓돌에 앉아 방안을 들여다본다. 댓돌 가에는 고양이가 잠들어 있다. 아기의 고무신 한 짝은 댓돌 아래에 굴러 떨어져 있고 한 짝은 아기발 밑에 깔려 있다. 벽시계를 흘긋 쳐다보는 영감님과 아기의 뒷모습과 함께 가겟집 안 풍경이 정겹게 펼쳐진다. 추억의 불량식품부터 원기소, 미원, 설탕, 정종, 과일까지 없는 게 없을 것 같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백열전구가 드리워져 있다.
“넉 점 반이다.”
앉아 있는 품새로 보아 대답을 듣자마자 금방 일어섰을 것 같지 않다. 영감님의 손놀림을 지켜보고, 안방에서 눈에 띄는 물건을 두리번거렸을 것 같다. 몇 마디 참견도 하지 않았을까?
“넉 점 반 넉 점 반.”
되뇌며 구복상회를 나서는 걸 보니 심부름을 잊지는 않았나 보다. 집으로 향하는 발길과 달리 아기의 눈길은 가게 앞마당에서 물을 먹고 있는 닭을 향한다. 어느새 발길을 돌려 물 먹는 닭을 한참 서서 구경한다. 물이 담긴 커다란 대야 옆으로 개미 한 마리가 나타난다.
“넉 점 반 넉 점 반.”
이번에도 되뇌며 개미를 따라가 보니 개미들이 줄줄이 기어가고 있다. 개미를 따라가는 아이 뒤로 접시꽃이 흐드러지게 핀 담벼락이 보인다. 처마에 지어진 제비집 주위로 제비들이 부지런히 드나든다. 아기는 한참 동안 앉아서 개미 거둥을 구경한다. 담벼락에 붙어 낮게 피어 있는 꽃들 사이로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든다. 아기의 눈이 잠자리 떼를 향한다.
“넉 점 반 넉 점 반.”
엄마에게 전할 말을 다시 한번 되뇌며 잠자리 떼를 따라나선다. 마을 어귀까지 나가 한참 돌아다닌다. 잠자리가 분꽃 위에 앉았다. 잠자리를 잡으려던 아기는 분꽃을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흥얼거린다. 분꽃과 나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그 뒤에는 수수밭이, 그 속에는 메추라기 가족이, 그 너머에는 양산을 든 새댁 부부가 걷고 있다.
아기는 해가 꼴딱 진 다음에 집에 돌아왔다. 강아지가 대문을 넘어 마중 나오고 아기는 흡족한 얼굴로 대문에 들어선다. 가로등이 켜져 있다. 아기의 집은 구복상회 바로 옆집이었다. 구복상회 앞 의자에 앉아 부채질을 하던 영감님이 아기를 갸웃 쳐다본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분꽃을 양손에 들고 시간을 알리는 아기의 목소리가 의기양양하다. 저고리 앞섶에도 분꽃이 살포시 자리 잡고 있다.
엄마는 마루에 걸터앉아 동생을 안고 젖을 먹이고, 열린 방문 안에서는 언니와 오빠들이 밥을 먹고 있다. 마루로 기어오르는 아기와 엄마의 시선이 마주친다. 엄마 앞에는 작은 밥솥과 밥 한 공기가 떠져 있다. 방에서 밥을 먹던 언니가 내다보고 있다. 벽에 양복은 걸려 있는데 아빠는 어디 계신 걸까?
그림책 소개가 되어 있는 마지막 페이지 한쪽에 언니와 아기의 그림이 실려 있다. 언니는 수를 놓고 있고 아기는 양손을 방바닥을 짚고 수틀을 들여다보고 있다. 잔뜩 앞으로 쏠린 몸을 지탱하는 양 손 근처에 분꽃이 흩어져 있다.
1940년에 윤석중이 쓴 동시에 이영경이 그림을 그린 그림책 『넉 점 반』은, 정감으로 가득하다. 고즈넉한 농촌 풍경과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갖가지 소품들은 향수를 자아내고, 무심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넉 점 반’을 잊지 않고 끝까지 꼭 붙들고 있는 진지함은 웃음을 선사한다. 거기에, 아기의 집과 가겟집이 바로 옆집이었다는 반전은 감칠맛을 더한다. 순하고 명랑한 기운이 한지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마음에 번진다. 바로 옆집에 심부름을 보냈는데 딴 데 정신이 팔려 해가 꼴딱 진 다음에 들어온 아기, 해가 꼴딱 넘어갔는데도 ‘시방 넉 점 반’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아기의 순진함에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옆집이라도 어린 아기 혼자 심부름을 보낸다거나 그렇게 심부름을 보낸 아기가 해가 지도록 안 들어오고 있는데 아무도 찾으러 나서지 않다니!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벽에 남자 양복이 걸려 있는 걸 보니 퇴근한 아빠가 아기를 찾으러 나간 모양’이라고 짐작하는 나는 요즘 사람이다. ‘시방 넉 점 반’이라고 말하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이나 동생이 들어온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밥 먹는 데 열중하고 있는 두 오빠의 행동은, 이 상황이 이들에게 낯설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리적 시간은 넉 점 반에서 해가 꼴딱 진 저녁 시간으로 바뀌었지만 아이의 시간은 아직도 넉 점 반이다. 아기가 ‘물 먹는 닭을 구경하고 개미 거둥을 구경하고 잠자리를 따라다니고 분꽃을 입에 물고’ 놀았던 그 시간은, 아기의 물리적 시간 속에 들어 있지 않다.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시간의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길 닿는 대로 푹 빠져 버리는, 그것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시간은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물리적 시간과는 다른, 또 다른 차원의 그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이다. 마치 나니아 나라의 시간처럼. 놀이의 세계란 그러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의 재촉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어른들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어른들은 그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린아이들에게만 허락된 시간이다.
그림책 속 엄마는 어른이지만 어른의 잣대로 이러한 ‘아이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다. 엄마의 표정은 아이의 그 시간을 알아보고, 보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알아보는 시간만큼 엄마도 그 시간에 살고 있다. 아기가 따온 분꽃을 보며 분꽃 무늬 수를 놓는 언니 또한 아기의 ‘흐르지 않는 시간’에 동참함으로써 그 잃어버린 시간으로 회귀한다. 아기의 놀이는 언니의 ‘수놓기’로 따뜻하게 변형되며 성장한다.
큰 아이는 44개월 무렵 이 책을 참 좋아했다. 그맘때 아기들이 그러하듯 ‘또! 또!’를 외치며 몇 번이고 다시 읽어달라고 조르곤 했다. 44개월 큰 아이와 25개월 작은 아이의 책 취향이 달라서 언제나 응할 수 없었던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이 책의 면지에 ‘**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어떤 엄마로 살아왔나’ 생각하다가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 써두었던 글을 꺼내 보았다.
2009. 9. 19.
저녁을 일찍 먹고 큰아이와 둘이 산책을 나섰다. 늘 가던 소양강 상류 쪽으로 가지 않고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춘천댐에서 흘러오는 물과 소양강댐에서 흘러오는 물이 만나는 지점, 소양 2교 아래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아이가 손짓을 한다.
저- 기- 로 가자고...
석양 때문이었을까, 가을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흐릿한 느낌이 가슴을 스치는 듯싶더니 선명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작년 겨울,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으로 산책 나온 적이 있었다. 그날 아이는 여기부터 시작되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울면서 올라왔었다.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고 싶다는 녀석을 두고 '엄만 먼저 갈 거야'라며 휘적휘적 혼자 걸어가는 엄마와 바로 옆에서 찰랑거리는 강물을 번갈아 보다 부랴부랴 자전거를 끌고 따라오던 아이는, 그날 결국, 그곳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 힘에 부치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는 녀석을 보면서 괜히 더 화나고 속상하던 그날의 내 마음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순간에도 그랬고, 그 후에 다시 떠올려 보아도 그날의 내 마음은 참 난데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바로 전까지 평화롭고 행복하던 느낌이 어쩜 그리 한순간에 달아날 수 있는지 말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오늘 문득 깨닫는다. 그건 내 지병 때문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예외지만, 어느 정도 의무감이 뒤섞여 있는 일을 해야만 할 때, 잘못하는 일을 꼭 할 수밖에 없을 때 늘 도지곤 하는 '다음에 할 일은?'과 '모눈종이 위의 생' 때문이다. 드디어 이사를 왔다는 안도감과 작은 아이가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제대로 못해 주었던 큰아이와의 데이트'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삐끗’하는 느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갓지게 둘이 산책하고, 우아하게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고, 마지막엔 마트에 들러 풍성하게 장을 보리라.'
이렇게 미리 그림을 그려놓았던 것이다. 돌멩이를 던지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까닭은, ‘한갓진’이라는 단어가 내 머리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부지런히 도서관을, 마트를, 그리고 집에 있는 작은 아이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마음으론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은 채, 몸만 집 밖으로 나와서 허둥대고 있었다. 나는 아이와 산책을 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늘 그랬다. 작은 아이를 보고 있을 땐 큰아이 생각을 하고, 큰아이와 놀고 있을 땐 작은 아이 생각을 하고, 셋이 함께 뒹굴고 있을 땐 집안일을 생각하고, 집안일을 할 땐 아이들 생각을 하고. 늘 다음 일을 생각하거나 해야 할 일을 걱정하거나 못하고 있는 일을 아쉬워하며 살았던 것 같다. 쳐다보기만 해도 생긋생긋 웃어주려고 기다리는 'Here and Now'는 외면한 채 말이다.
큰아이가 네 돌 반, 작은 아이가 세 돌이 되는 동안 엄마로서 후회스러운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소소한 것부터 차마 말할 수 없게 부끄러운 것까지 세려면 끝도 없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후회스러운 것은, 걱정하고 아쉬워하느라 두리번거리며 살았던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무 후회도 하지 않고, 놀이에 빠져드는 아이처럼 이 순간 속에 머물려고 한다. 모눈종이 위에 섬세한 펜으로 그려나가는 것이 인생인 줄 알았던 철부지가, 잉크병을 엎질렀어도 또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서서히 깨닫는 중이라고 할까?
오늘?
오랫동안, 아이가 원하는 만큼 잘 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양껏 물수제비를 뜨고, 코스모스가 핀 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돌멩이를 던지며 행복했던 아이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제 아이는 앞뒤 재지 않고 놀이의 세계에 빠져 드는 나이를 지났다. 중간고사를 앞둔 주말, 밥 먹는 시간을 빼곤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이가 저 혼자 방에서 국어, 수학, 영어에 이리저리 치이며 허둥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이 쓰인다.
아이에게 공부는 어떻게 느껴지고 있을까? 어렸을 적 놀이처럼 재미있기만 할 수는 없겠지만, 순전히 미래를 위해 참아야 하는, 어쩔 수 없이 인내해야 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아이의 현재가 미래에 저당 잡힌 투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놀이’이기를 소망한다. 아기의 언니가 분꽃을 수놓던 수틀이기를 기도한다. ( 그리고 공부가 더 깊어진 다음에는 다시, 아기처럼 물 먹는 닭과 개미 거둥에 마음을 빼앗기고 잠자리 따라 돌아다니다가 분꽃 따 물고 노래를 불렀으면, 아이에게 공부가 그런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해가 꼴딱 져 돌아왔을 때, 다른 세상에서 툭 튀어나와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할 때를 기다리며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