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명랑한 무지(無知)

유희충동6_ 그림책『그림자가 따라와요』_프랭크 애시 글·그림/마루벌

by Maria 윤집궐중


어느 날 달곰이는 낚싯대랑 지렁이가 가득 든 깡통을 가지고 호수에 갔다. 낚싯바늘에 지렁이를 끼우고 있는데, 커다란 물고기가 물속에서 어른거렸다. 그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달곰이는 생각했다. 그런데 낚싯줄을 던지려고 일어섰더니 물 위에 달곰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물고기는 놀라서 도망가 버렸다.

“그림자야, 저리 가!”

달곰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림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를 쫓기 위해 달곰이는 낚싯대를 내려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곰이는 그림자를 떼어 버리려고 호수를 빙 돌아 마구 달리고, 시냇물을 건너뛰고, 나무 뒤에 숨고, 절벽을 오르고, 망치와 못으로 그림자를 땅에 못 박기도 하는 등 온갖 시도를 한다. 하지만 그림자는 계속 따라온다. 달곰이는 삽을 가져와 크고 깊은 구덩이를 판 뒤 그림자를 구덩이 안에 집어넣고 흙으로 구덩이를 덮었다. 그러는 동안 한낮이 되었고, 해가 하늘 높이 올라가 있어서 그림자는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됐어! 그림자는 가 버렸어!”

몹시 피곤해진 달곰이는 집으로 들어가 낮잠을 잤다. 달곰이가 자는 동안 해가 기울면서 여기저기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잠에서 깨어나 문을 연 달곰이는 마룻바닥에 그림자가 있는 걸 봤다. 달곰이는 그림자를 집 안에다 떼어 놓으려고 문을 쾅 닫았지만 그림자는 너무 빨랐다.


“음, 이러면 어떨까.”

달곰이는 그림자에게 말했다.

“물고기를 한 마리 잡게 해 주면 너도 한 마리 잡게 해 줄게. 좋으면 이렇게 끄덕끄덕해.”

달곰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림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달곰이는 호수로 돌아가 다시 낚싯줄을 물에 던졌다. 이번에는 해가 앞쪽에 있었다. 그림자는 달곰이를 방해하지 않고 열심히 낚시만 했다. 달곰이가 마침내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다. 그림자도 한 마리 잡았다.





미국의 그림책 작가 프랭크 애시의 ‘꼬마곰 달곰이’ 시리즈 중 한 권인 『그림자가 따라와요』 이야기이다. 파랑, 초록, 갈색의 선명한 대비가 만들어내는 밝은 분위기, 동글동글 귀여운 달곰이가 보여주는 엉뚱한 행동들이 책장을 넘기는 내내 웃음 짓게 한다. 그림의 선만큼이나 단순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던 이야기는 적당한 지점에서 따스하게 마무리된다.


그 누구도 달곰이에게,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몰랐구나,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어, 넌 괜한 노력을 하느라 힘만 뺀 거라고, 네가 물고기를 잡게 된 것은 그림자와의 협상이 성공해서가 아니야, 방해를 한 건 그림자가 아니라 사실 너 자신이었어, 너는 네 문제를 그림자 탓으로 돌린 거지, 이건 모두 네가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야’라고 조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이 그림책 속 달곰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이 그림책을 읽는 우리는 너무나 행복하니까.


달곰이는 몰랐다. 빛과 물체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것, 그림자는 물체가 빛을 차단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광원을 차단하거나 물체를 치우거나, 물체가 투명해지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달곰이가 오전 내내 했던 모든 시도는 이 무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빛과 그림자의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엉뚱한 행동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달곰이를 보며 웃음 짓는다. 달곰이의 무지와 그것이 빚어낸 무모한 도전이 가져다주는 웃음, 그 웃음이 비웃음이나 어이없음이 아니라 그림책의 색감처럼 푸르르게 우리 마음을 초록과 파랑으로 물들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모든 무지가 사랑스럽고 유쾌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아이가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울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끔 이야기를 꺼내곤 했지만 학교 밖에서 특별히 따로 준비한 것은 없었다. 작년에 관련 학원을 잠시 다니다가 코로나로 인하여 멈추게 되었을 때도 별말이 없어서 ‘그 정도의 마음’이라고 짐작했었나 보다. 1학기 말쯤, 아이의 마음이 막연한 동경보다는 크다는 것을, 나름대로 늘 염두에 두고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학고 진학을 위한 선행을 집중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진학을 염두에 두고 내신을 관리했고, 과학 관련 교내 활동이나 영재교육원 과정에도 열심히 참여했다는 것이다.


왜 과학고에 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과학 관련 수업이 많고 과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아이의 대답이 너무 해맑아서 말문이 막혔다. ‘그곳에 가려면 미리 준비했어야 해’라고 말하는 대신 여름방학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쳐 주실 선생님을 알아보았다. 아이에게 선행의 공백을 뛰어넘을 만큼의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고, 과학고에 가고 싶은 자신의 열정이 어느 정도의 농도인지 아이 스스로 확인할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도, 전혀 알지 못하는 입시의 세계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 방학이 끝날 때 최종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이는 울었다.


여름방학 내내 도쿄 올림픽이 열렸다. 여름방학을 시작할 때 스스로 SNS 앱을 지웠던 아이는 그 스마트폰으로 올림픽 경기를 보느라 바빴다. 아이를 가르친 선생님과 상담하기도 전에 내 마음은 기울고 있었다. 주위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입시 관련 이야기들도, 선생님과의 상담 결과도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합격한다고 해도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해온 친구들과 경쟁이 될 것인가, 그걸 뛰어넘을 만큼의 타고난 능력과 근성이 있는가, 일단 도전해 보느라 한 학기를 낭비하는 것은 현실감 없는 선택이다,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해서 2학기를 알차게 보내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아직 설득당하지 않은 것처럼, 팩트와 유경험자들의 조언이라는 형태로 전달했다. ‘그러니까 엄마는 일반고 쪽이죠?’라는 물음에 ‘응, 엄만 그쪽으로 마음이 기우네’라고 대답했다. 평소라면 ‘엄만 50:50이야’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런 태도는 엄마로서 직무유기인 것 같아서 마음먹고 의견을 표면에 드러냈다. 사실 ‘반반’이라고 대답했어도 아이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원한다고 하는데 ‘그래, 해 봐’라고 하지 않고 반반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미 주저하는 마음이 반이나 있다는 거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아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이 아이는 결정에 시간을 오래 들이지 않는다. 마트에 가면, 비교하고 망설이느라 오랫동안 고르는 큰아이와 달리 들어서자마자 집어 들었다. 대체 고른 걸까, 그냥 아무거나 집어 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파 옆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슬쩍슬쩍 말을 흘린다. 이 망설임은 아침 식탁에서 내가 한 말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답지 않게 한참 빙빙 돌며 머뭇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결정하기 힘들지? 네 마음을 모르겠지? 한쪽으로 마음이 기울면 반대쪽 저울에 추가 자꾸 올라가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데, 자기 마음 들여다보고 결정하는 게 젤 어려워. 근데... 그건 자기가 할 수밖에 없어.”


아이의 얼굴이 해쓱해지며 눈에서 눈물이 배어 나온다. 아이를 안았다. 나는 어느새 아이가 어렸을 때 잠자리에서 불러주곤 했던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내 심장에 머리를 기대로 있던 아이가 본심을 꺼내 놓는다.


“여러 가지 진로를 탐색해 보라고 하면서.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선행교육 금지법도 있는데. 내신 관리도 열심히 했고 비교과 활동과 교내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과학고 팸플릿에도 그럼 된다고, 그런 게 목표라고 쓰여 있는데······.”

“그래, 속상하지...”

“속상한 게 아니라 짜증이 나요. 내세우던 말과 현실이 다르다는 게.”


떠듬떠듬 말하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말 그대로 학교생활 열심히 하고 동아리 활동이나 영재교육원 성실하게 다니는 것으로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현실(사실 무엇이 현실인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 현실에 기반한 것인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현실에 대한 소문이나 막연한 짐작 때문인지)에 부딪히니, 혼란스럽고 억울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내세울 만큼 충분히 노력한 것이 아니어도 오랜 시간 키워온 마음을 어떻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실체가 잡히지 않는 현실, 그리고 아이의 마음 사이에 낭떠러지가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뛰어 봐, 까짓 꺼'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달곰이의 무지는 사랑스럽고 달곰이의 도전은 유쾌하다. 달곰이의 엉뚱한 시도들이 마음에 한 점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달곰이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명랑한 표정과 가벼운 발걸음, 실패하면 지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천진난만한 도전, (내가 해를 묻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오가 되어 그림자가 짧아졌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취감, 그 성취감에도 불구하고 바로 낚시터로 달려가지 않고 피곤하니까 낮잠부터 자는 아이다움(진지하나 명랑하다. 자신을 해치는 집착이 없이 순간 속에 산다. 모든 것이 일이 아니라 놀이다.), 잠에서 깨어나 성공이 실패로 바뀌어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그림자를 곁눈질하는 모습(이 장면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해 낸 그림자를 달래는 방법.

쫓아 버리고 떼어 버리려고 하는 대신 함께할 수 있는 방법으로의 전환은 ‘낮잠’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명랑했기 때문에 낮잠을 잘 수 있었고, 낮잠을 잤기 때문에 여전히 명랑할 수 있다. 다시 나타난 그림자를 곁눈질하는 곰곰이의 눈동자에 질문과 대답이 반짝인다.


‘이 그림자는 어디서 또 나타난 거지?’

‘아, 이 그림자가 나구나!

’그렇다면...?’


전투에서 화해로의 전환, 그것은 다른 대상과 바깥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는 데에서, 내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시도해 보는 것에서, 적당한 시점에서 마음을 놓기도 하는 데에서, 자신의 경험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한 발 내딛는 데에서, 마음을 열어 손을 내미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림자를 떼어내는 대신 손을 내민, 그림자와의 화해는 그야말로 적절한 타이밍에 이루어져서 이 그림책은 해피엔딩이 된다.




이 그림책을 보면서 우리가 웃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달곰이가 모르는 과학적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모르는 일이었다면 달곰이의 모험을 긴장된 마음으로 지켜보았을지 모른다. 우리는 알고 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웃으며 지켜볼 수 있다. 그러나 달곰이 이야기에는 과학적 무지 이상의 이야기, 나와 그림자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다. 그림자가 또 다른 나라면, 나와 그림자의 관계는 무엇일까?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어 '그림자는 나의 과거이며,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자가 나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내 눈’에 그림자가 나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누군가는 알고 있는) 그 무엇을 내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괴로워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무엇인가를 내가 몰라서 그런 것이니 (그것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말을 한 알의 약 인양 꿀꺽 삼키고 그것으로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과 괴로움을 덮어 버리면 되는 것일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느낌과 판단을 묻어 버리면 내 인생의 질문도 사라져 버린다. 내 질문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의 언설에 몸을 기대는 순간, 내가 깨달음에 다다를 가능성은 원천 봉쇄된다.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가진 한계 속에서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그 좌충우돌 속에 내가 있고, 그 명랑한 내가 나를 ‘아는’ 상태로 데려다줄 수 있다. 오직 그 명랑한 나만이.


먼 훗날 달곰이는 그 자리에서 그림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물고기를 잡으려면 오후에 가면 된다는 걸, 호수를 빙 돌아 건너편으로 가면 오전에도 그림자가 방해하지 않는다는 걸, 그림자를 잡겠다고 처음 했던 시도가 호수를 빙 돌아다녔던 일이라는 걸, 그런데 그때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될까. 달곰이가 자라서 ‘빛과 그림자의 원리’를 배우게 되면, 그걸 깨치는 날 자신의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환하게 펴지며 펄럭인다. 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이미 보고 있는 사람은, 그 길을 이미 걸어본 사람은 나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웃음을 머금고, 한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본다는 것을 나는 안다. 왜냐하면 내가 달곰이를 볼 때 바로 그 마음이니까.




아이가 울고 있다. 저 울음이 아이의 진심이다. 그 속에 아이의 모든 것이 있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울음을 억지로 그치게 하지도,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고 말하지도 않기로 했다.


“그래, 해보자. 가보고 아니면 그때 거기서 다시 선택하면 되지, 뭐!”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오늘 이 지점에서 달리 선택할 걸 그랬다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엄마로서 조금 더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했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나라면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그것이 지금은 안 보이고, 어쩌면 그건 미래가 되어도 여전히 모를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 아이는 지금 달곰이고 나는 달곰이의 어리석은 시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싶은 엄마라는 것이다. 열여섯 살 아이의 도전은 그림책 속 아기곰인 달곰이의 도전보다 무겁지만, 그래도 그 마음은 달곰이의 그것을 닮아있다. 나의 염려가 아이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혼란스럽고 안쓰러워 눈물이 나는 오늘도, 이 모든 것을 돌아볼 미래의 내 눈에는, 이미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그 누군가의 눈에는 슬며시 웃음 나는 장면일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아이는 자정이 넘어 쓴 편지를 내 머리맡에 가져다 두었다. 자다 일어나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불을 켤 수가 없어서 욕실에 들어가 썼다고 했다. ‘벽에 대고 쓰니까 펜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어젯밤 처음 알았어요’라고 말하는 아이의 표정이 달곰이 같다. 편지에는 아이의 ‘곁눈질’과 그래서 다다른 결론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나니 기특함과 안쓰러움이 교차되었다. 아이가 마음을 돌리길 기다렸던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처음부터 나와 판단이 달랐던 남편은 아쉽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곁눈질하고 나서 말개진 아이의 얼굴만 바라보기로 했다. 아이의 명랑한 발걸음을 따라 나란히 걸어가기로 했다. 우리의 무지는 명랑하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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