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충동7_ 그림책『키오스크』_아네테 멜레세 글·그림/미래아이
얼마 전, 예전에 즐겨 다니던 해장국 가게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온다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입덧할 때도 맛있게 한 그릇을 비울 수 있었던 그 집 음식 맛이 떠오르면서, 사장님의 말투와 몸짓이 눈앞에 그려졌다. 꽤 자주 드나들었지만 특별히 나를 기억한다는 내색은 없으셨던 분인데 오랜 지기를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움이 마음에 번졌다.
설렁탕, 콩나물 해장국, 비빔밥, 세 개의 메뉴가 전부였던 조그만 가게였다. 벽에는 내리뜨린 발 위로 커다란 한지 세 장이 붙어 있었고, 그 각각에는 세 가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법이 붓펜으로 자세히 적혀 있었다. 거침없는 글씨체와 달리 적힌 내용은 섬세했고, 여백 한 귀퉁이에 그려진 음식 그림은 어설펐다. 그 섬세함과 어설픔이 콩나물 해장국 속 새우젓처럼 다정하게 입맛을 돋웠다.
손님이 붐비는 이른 새벽에 가도 질서가 수놓아져 있어서 여유로운 느낌을 주던 가게, 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을 먹이는 느낌이 들던 그 가게에서 사장님은 무심한 듯 손님들을 챙겼다. 그 정도 자주 갔으면 문을 들어설 때 반색할 법도 하련만 늘 데면데면한 것이 신기했고, 그러다 불쑥 가족이 아니라 손님에게 하기엔 좀 과한 간섭이 아닐까 싶게 챙겨주실 때는 당황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사장님은 생계를 위해 해장국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꾸기 위해 해장국을 끓이고 있는 듯했다. 그 작은 가게는 사장님의 인생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30년 동안 운영해 온 그 자리에서 왜 옮기는 걸까? 세 들어 있었는데 건물주가 나가라고 한 걸까? 아니면 시내 중심가에 있던 그곳을 팔고 외곽 널찍한 곳으로 ‘확장’ 이전하시는 걸까? 혹시 건강 등의 이유 때문에 자녀들에게 물려주신 걸까? 사장님이 시내 중심가에서 이 한적한 소양강 변으로 가게를 옮기기까지 어떤 사정과 우연이 있었던 것일까?
어느새 소양 3교에 다다랐다. ‘이제 다리만 건너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일요일은 휴무 아니었어요?”
“여전히 그러려나. 혹시 바뀌진 않았을까?”
남편과 나는 영업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대신, 다리 위를 걷기로 했다. ‘명랑했지만 조금 깐깐했던 그 사장님이 여전히 건강하실까’하는 우려 섞인 질문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그 언저리를 맴돈다.
그림책, 『키오스크』의 주인공인 올가는 키오스크 안에서 하루 종일 신문이나 잡지, 복권을 판다. 교통섬에 설치된 키오스크는 올가에게 일터이자 집이며 더 나아가 인생 그 자체이다. 올가는 날마다 단골손님들을 친절하게 맞았고, 손님들이 뭘 사려고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독자의 눈에는 좁은 키오스크를 꽉 채우고 있는 올가의 몸이 너무 커 보이고, 변기 위에 놓인 의자를 침대 삼아 잠이 드는 올가의 생활이 안쓰럽지만 그림책 속 올가의 표정에는 그늘이 없다. 저녁이 되어 일이 끝나면 기진맥진하지만 여행 잡지를 읽는 표정에는 생기가 가득하고, 잡지에서 바다 사진을 오려 내 벽에 붙이는 손놀림은 경쾌하다. 좁디좁은 키오스크 안에서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잠들었지만 올가의 한 손은 읽고 있던 여행 잡지를 쥐고 있고,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림책을 다시 앞으로 넘겨 표지부터 천천히 다시 넘겨본다.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없다. ‘불만족, 안달, 서두름, 투덜거림, 낙담, 답답함, 벗어나고 싶음’ 같은 그런 것들이.
그런 올가에게 사건이 벌어진다. 어느 날 아침, 신문 뭉치가 평소보다 멀리 놓여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별일 아닐 수 있는 일이지만, 키오스크의 문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이 큰 올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올가가 애쓰는 사이에 더 곤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그로 인하여 키오스크가 넘어지면서 갑자기 올가의 세상이 뒤집히게 된다. 키오스크와 함께 넘어졌던 올가는 일어나 흩어진 물건들을 주우려고 애쓰다가 키오스크를 들어 올려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올가는 잠깐 산책을 하기로 한다.
그래서 잠깐 산책을 하기로 했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독자는 또 당황스럽다. ‘흩어진 물건들은 모두 어쩌고? 이번엔 과자 한 봉지가 아니라 더 많이 잃을지도 모르는데’라는 독자의 우려와는 거리가 먼, 명랑한 표정으로 올가는 거리를 활보한다. 거리 곳곳에서, 올가의 단골손님들이 키오스크를 들고 걸어가는 올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아침마다 만났던 희한한 개를 보고 반가워하던 올가는, 신이 난 개로 인하여 강물에 빠지고 만다. 이제 키오스크는 올가를 싣고 가는 배가 되었다. 올가는 키오스크를 타고, 강물을 타고 바다로 흘러간다. 다리 위에서 떨어질 때 샌들 한 짝이 벗겨지는 바람에, 올가는 한쪽 발에만 샌들을 신고 있다.
올가는 바다에서 사흘 밤낮을 떠다니다가 큰 파도를 만나 바닷가로 밀려온다. 나머지 샌들 한 짝도 잃어버려 맨발이 되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다. 신발이 필요 없는 바닷가 모래밭에 도착했으니까. 올가는 잡지를 보며 꿈꾸던 바로 그 해변에서 아이스크림을(만!) 팔며 살고 있다. 키오스크 앞에 누군가 파라솔을 치면 그에게 비키라고 하는 대신, 키오스크를 살짝 옆으로 옮기면서. 도시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아이스크림을 모래밭에 떨어뜨린 아이에게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퍼주면서. 그리고 저녁이 되면 올가는 늘 꿈꾸었던 황홀한 석양을 바라본다.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다른 한 손에는 새로운 여행 잡지를 들고서.
우리는 누구나 ‘삶의 여건’ 속에서 살아간다. 타고난 능력이나 기질, 건강, 지력, 외모, 성격, 경제력, 가정환경, 성장 과정, 교육 수준 등 그 모든 것의 결합으로 형성된 저마다의 삶의 여건 속에서 살아간다. 삶의 여건으로부터 벗어난 진공상태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재 처한 상황을 벗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삶인 한, 거기에는 반드시 삶의 여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올가의 키오스크는, 인간의 삶에는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여건이 있다는 것, 우리는 누구나 그 여건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책에서는 이 ‘벗어날 수 없음’을, 문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올가의 몸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올가에게 키오스크를 버리고 밖으로 나오라고 종용하는 것은 삶 자체를 부수라는 말이 된다. 인생 자체인 키오스크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각자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 삶이지만 내 힘으로 바꾸거나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올가의 표정은, 그리고 유쾌하지 않은 일이나 사고를 받아들이는 올가의 태도는 그녀의 삶이 안주나 체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좁은 공간에서 바깥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에는 애정과 친절이 담겨 있다. 올가의 일상은, 삶의 여건을 수용하고 거기에 깃든 숨결을 따라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직업, 경제력, 건강 등 삶의 여러 가지 여건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삶에 대한 태도’이다. (삶에 대한 태도는 삶의 여건과 무관하게 형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부터 나온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사람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곧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여건을 통째로 바꾸려는 시도가 삶을 망가뜨리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여건을 부정하는 태도는 삶의 여건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킨다.
하루 일과를 끝낸 올가가 변기 위에 놓인 소파를 침대 삼아 잠들어 있다. 올가를 널찍한 침대에 눕히고 폭신한 이불을 덮어주고 싶다. 이런저런 마음 쓸 일들을 깔고 베고 잠드는 밤에 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을 올가에게 해주고 싶다. 손에 쥐고 잠든 잡지 덕분일까? 불편한 잠자리 건만 미소를 띠고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다. 불편이 곧 불행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우리 가족이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어찌 보면 우리도 올가처럼 그렇게 이곳에 왔다. 뜻하지 않던 상황이 생기면서 갑자기 이사를 결정해야 했고, 어디로 이사할 것인가를 두고 망설이고 있을 때 몇 가지 우연이 겹쳤다.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가 놀러 와서 강 건너 새로 지은 아파트 이야기를 꺼냈다. 거실에서 바로 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멀리까지(그래 봐야 15분 남짓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느껴졌다) 건너가고 싶지 않다는 내 말에 친구는 그저 집 구경이나 해 보자면서 부동산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하는 데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이유라고 내세우기에는 어쩐지 우연적이고 소소한 것들이었다. 그 무렵 여주 신륵사 여행지에 본 강이 인상적이었는지 매일 ‘강물, 강물’하던 40개월 큰아이를 위해 강이 내려다 보이는 콘도에 예약을 해두었던 상태라는 것(갑작스레 이사를 하느라 결국 그 여행은 취소했다), 연년생 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걸리고 다니는 동안 내 마음속에 평지 산책로에 대한 갈망이 자라났었다는 것, 마침 매물로 나온 집이 현관 바로 앞에 널찍한 놀이터가 있는 동이었다는 것, 이것이 전부였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선택하지 않을 이유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아웃포커싱 상태였다.
세 살, 네 살이던 연년생 남매는 이제 강 건너에 있는 학교와 학원을 다니느라 차를 한참씩 타야 하는 중·고등학생이 되었다.
“내가 픽업 전담할게. 나는 운전하는 게 좋아. 일부러 드라이브도 하는데, 뭘.”
이곳으로 이사 오자고 설득했던 내가, 이번에는 이곳에서 이사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약간의 대화 끝에 우리는, 시간 소요와 운전의 수고로움을 대가로 치르는 대신 ‘현관에서 바로 이어지는 산책로, 매일 구봉산 일출과 의암호 석양을 볼 수 있는 전망, 상고대를 볼 수 있는 거실, 이불 빨래를 널 수 있는 옥상’을 누리기로 했다. 키오스크를 벗어나지 말고 키오스크를 타기로 했다. 우리가 가진 삶의 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한계는 더 이상 한계가 아닐 수 있다. 내가 가진 여건을 무리하여 안배 포치 하지 않아도 때가 차면, 그래야 한다면 우연의 모습으로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소양 3교를 건너는 동안 내 생각은, 콩나물 해장국 이전에서 올가의 키오스크로, 우리 집으로 흘러간다. 며칠 동안의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강바람에 먼지를 털어내고 포근하게 보송 거 린다. 다리를 다 건넌 다음 돌아서서 강 건너 우리 아파트 쪽을 바라본다. 이리저리 앵글을 바꾸며 사진을 찍다 보니 이쪽 강가 풀숲 사이로 새로 난 산책로가 보인다.
“여기도 산책로가 생겼네요? 돌아갈 땐 이 길로 가요. 이제 왔던 길 돌아가지 않고 동네 한 바퀴 할 수 있겠어요.”
“좀 멀 텐데... 힘들지 않겠어? 콩나물 해장국을 먹게 되면 그럽시다!”
하얀색 간판이 환했지만 가게 불은 꺼져 있었다. 여전히 일요일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구나. 못 먹는다는 아쉬움보다 여전하다는 안도감이 커서 기쁘게 돌아선다.
「새벽 6시 오픈, 아침 드시고 출근하세요.」
간판 한쪽에 적혀 있는 문구에서 사장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전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어떤 사정으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장님은 여전히 올가일 것 같다. 어려움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선택과 우연으로 어우러져 사장님의 삶을 새롭게 빚어내어 여기에 당도한 것이리라. 이 강가에 때때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콩나물 해장국의 더운 김이 피어오르고, 나는 그 더운 김 나는 콩나물 해장국을 먹으러 여기에 올 것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 우리는 강을 거슬러 오르고, 소양 3교를 건너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강물이랑 함께 걸어 내려가 소양 1교를 건너 우리 집에 돌아갈 것이다. 올가처럼 걷고 올가처럼 둥둥 떠내려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