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응급실 체험기 com 그림일기
2020년 9월의 마지막 날, 오후 5시.
나는 그저 부엌 찬장의 맨 윗 선반에 있는 컵을 꺼내고 싶었다.
그래서 찬장 문을 열고 컵이 있는 곳을 확인한 후, 그 아래에 밟고 올라갈 의자를 놓았다.
찬장 아래쪽에 식기세척기가 열려 있어서 그것을 신경 쓰며 의자 위로 힘차게, 그렇다. 힘차게 올라섰다... 가 머리가 깨질 뻔했다.
아니 조금 깨졌다.
열어놓은 찬장 모서리에 앞머리가 시작되는 부분과 이마 사이, 그러니까 머리카락이 나는 젤 앞부분을 심하게 부딪혔다.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한참을 멍하니 그 부위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내가 지른 비명에 아이가 와서 보여 달라고 했지만 너무 아파 손을 뗄 수 없었다.
고통이 약간 줄어든 후, 손을 떼었는데 더욱 놀랬다. 손에 피가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연출됐다. 머리를 부딪혔는데 고통에 손을 댔다가 떼었더니 피범벅인 그런 장면 말이다. 나는 사실 그 정도로 피가 많이 난 건 아니었는데 여하튼 피가 나니 당황하여 휴지를 뽑아 상처 부위에 갖다 대었다. 그냥 작은 상처려니 하고 화장실 거울을 보러 갔는데 또 놀랐다. 머리에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으로는 시뻘건 피가 계속 차오르고 나는 계속 휴지로 피를 받쳐야 했다. 피가 차오르는 구멍을 보고 있자니 내가 정신이 멀쩡한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이에게 '혹시 엄마가 쓰러지거든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라고 말해둘까 생각했다가 지나친 상상 인듯해 그만두었다. 내가 보기엔 병원에 가서 꿰매야 하거나 최소한 소독은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쪽이라도 무서웠다.
일단 듀오덤을 붙여보자 싶어 오려서 붙였는데 머리카락이 있는 부위라 잘 안 붙었다. 억지로 붙여놓으니 피가 계속 나와 결국 듀오덤이 떨어질 지경,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좀 일찍 올 수 있어?"
일하는데 방해될까 싶어 일단 이렇게 보냈다. 그런데 확인을 안 한다. 기다리다 지쳐 한 통 더 보냈다.
"나 머리를 부딪혔는데 소독해야 할 것 같아"
그래도 확인을 안 한다. 그래서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꿰매야 할지도 몰라"
그러자,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당장 회사에서 나오겠다며 걱정하는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니 왜인지 눈물이 나려 했다. 남편이 도착할 즈음이 되자 피가 멎었다. 피가 멎고 나서 보니 상처가 한글의 ‘ㅅ’ 모양인 것을 알게 됐다. 각 길이가 약 0.5cm인 'ㅅ'
잠시 후 도착한 남편과 함께 아이까지 대동하고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가는 길에 생각했다.
약 발라주고 반창고 붙여주는 게 제일 좋은 것, 꿰매는 게 최악이라고.
브라질에서 제일 좋은 병원이라 손꼽히는 아인슈타인 병원에 도착했다. 예전에 브라질에 살 때 아이가 어려서 이 곳 응급실에 자주 왔었는데 그새 리모델링을 해서 엄청 최신식 깨끗한 병원이 되어 있었다. 병원 입구부터 최고급 호텔처럼 되어 있었고, 입구에서 발레파킹을 해주었다.
차를 맡기고, 응급실로 들어가 만난 의료진에게 왜 왔는지를 설명해야 했는데 그는 영어를 못했다. 포어로 부딪힌 것을 뭐라고 설명할지 몰라 결국 내가 몸으로 들이받는 포즈를 취해야 했다. 체온을 재고 혈압을 쟀다. 그리고 담당 의사를 만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올 초 코로나 처음 터졌을 때 이 병원의 의료진이 50% 감염됐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래서 아프면 대체 어느 병원에 가야 하는지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좀 안정이 된 걸까. 응급실엔 나 외에 한 사람이 더 있는 정도로 한산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엄청 유쾌한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를 보더니 "포어 할 줄 알아요?"
그래서 못한다고 하니,
"영어 할 줄 알아요? 중국어 할 줄 알아요?" 그러기에 "저는 한국인이에요"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한국어 할 줄 알아요? 저는 못해요."
유쾌한 선생님 덕분에 치료받기 전에 한바탕 웃고,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상처를 보더니 꿰매야 하는데 꿰매는 대신 풀로 붙이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와~ 대박. 꿰매지 않을 수 있다니 너무 좋잖아!’
대신 꿰매는 건 보험이 되고 풀은 보험이 안 돼서 추가 금액 200헤아이스(약 45000원)가 들어간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풀을 선택했다.
풀을 바르기 전에 선생님이 난데없이 이발기를 들고 오셨다. 상처 부위가 머리카락이 있는 부위라서 머리를 좀 깎아야 한다고 했다. 거울도 없고 내 머리가 어떻게 밀리고 있는지 볼 수도 없었지만 그저 나는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약간 밀고 난 후 선생님이 새끼손가락보다 가느다란 통에 담긴 풀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벌어진 상처를 서로 붙도록 밀면서 풀을 발랐다. 따가웠다. 그러나 시간이 길지 않았고, 꿰매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렇게 간단히 치료가 끝났다.
3시간 후 씻어도 되고, 일주일 후쯤 딱지 떨어지듯 떨어질 것이라고 하니 좋았다.
이렇게 간단하고 완벽한 치료법이라니! (아직 상처가 어떻게 아물지 알 수 없지만.)
치료하면서 선생님이 브라질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면서 브라질은 날씨가 따뜻하고 사람들도 따뜻하다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도 그의 말에 적극 동의하며 "Muito bom!"(무이뚜 봉!_ 정말 좋아요!)이라고 외쳤다.
혹시 흉터가 남을지 물었더니 정말 정말 정말 조그맣게 날 수 있지만 머리카락이 새로 날 것이니까 괜찮다고 했다.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나오는데 선생님이 "Nice to meet you"라고 인사를 하셨다.
'저도요 선생님. 밝은 에너지를 가진 선생님을 만나 반가웠어요.'
진료실에서 나와서 남편이 계산을 하러 간 사이, 나는 딸에게 핸드폰을 내밀며 사진을 좀 찍어달라 했다. 과연 내 머리가 얼마나 깎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9살 딸아이는 매우 근접하게 사진을 찍어 주었다. 'ㅅ'자 모양 주위로 동그랗게 머리가 잘려 나가고 없었다. 마치 자동차 브랜드 '벤츠'의 마크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잘린 머리카락이 잔머리 부분이라 타격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엄청 크게 보이긴 한다.
부디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할 텐데...
딱지처럼 떨어질 때까지 풀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만 한 가득이다.
그나저나, 이 나이에 이런 일로 응급실에 갈 줄 몰랐다.
정말 사람 일, 한 치 앞을 모른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