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어(브라질에서는 포르투갈어를 쓴다)를 배운지 약 4개월 정도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받았지만, 휴일이다 뭐다 해서 빠진 날이 많아 실제로 수업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이렇게라도 핑계를 대보고 싶은 게 정말이지 4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말을 거의 못 알아듣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주재원의 아내가 오자마자 호기롭게 포르투갈어 과외를 시작하지만 3개월 정도 배우면 그만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과외만 한다고 실력이 늘 수는 없다. 선생님이 수업을 마친 후 그날의 수업에 대한 숙제를 내주지만 그것은 수업을 잘 이해했으면 할 수 있는 공식대로 푸는 수학 문제 같은 수준이다. 성수를 일치 시켜 빈칸을 채우는 그런 문제 말이다. 이것을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충분히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할 텐데 연습은커녕 다음 수업 시간까지 숙제만 겨우 해가는 정도다. 그런 와중 내가 수업 내용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니 진도는 쭉쭉 나간다.
처음에 인칭에 따른 현재형 동사 변화를 배웠다. 규칙동사는 쉽지만 불규칙 동사는 어려웠다. 그다음엔 과거형 동사 변화를 배웠고 불완전 과거형 동사 변화를 배웠다. 그 와중에 문장 속 남성, 여성을 구분해야 하고 복수, 단수도 체크해야 한다. 여기에 미래형에 가정법까지 더해지면 얼마나 어려워질까? 이쯤에서 과외를 그만두어야 하는지 고민이다. 과외로 어려운 문법을 계속 익히는 대신 단어를 많이 익혀서 비록 현재형밖에 모르더라도 단어라도 알아들으면 대충 말을 알아듣지 않을까. 내가 하는 말도 비록 현재형이라도, 단어라도 말하면 그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을 테니 말이다.
그런 고민을 하던 와중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화자의 엄마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혼자 지내시던 할머니가 한집에 같이 살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프랑스로 주재 발령이 나서 할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프랑스로 가서 살 게 된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해 나갈 무렵 낯선 이국의 집에 혼자 남게 된 할머니는 이웃에 사는 한 할아버지가 치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게 된다. 할머니는 ‘나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요.’라고 말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피아노를 쳐보고 싶은 마음에 할아버지에게 피아노를 쳐봐도 되겠냐고,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가며 단어를 이어 붙여 더듬더듬 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사전을 찾아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와중 나온 구절이 이 구절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살아갈 세월보다 많아서,
미래형보다는 과거형으로 해야 하는 이야기가 더 많았던 할머니.
나는 이 할머니처럼 과거형을 많이 써서 말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미래형을 많이 써서 이야기하는 사람일까. 미래형으로 할 이야기가 없어지는 나이는 몇 살일까. 나는 지금,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일까.
만약 이곳에서 브라질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나는 포르투갈어의 어느 시제를 가장 많이 사용하여 말하게 될까.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해야 할 때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 어떤 시제를 가장 많이 사용해서 말할까.
나는 오랫동안 방송작가로 일했지만, 최근 몇 년간은 규칙적이지 않은 일회성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그렇다 보니 혹시나 내 직업을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방송작가야’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방송작가였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직업을 묻는 사람이 없어 그런 대답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과거형’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럽게 느껴졌다.
나와 남편은 같은 과외 선생님께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있는데 남편은 브라질 현지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만큼 포르투갈어가 능숙하기 때문에 과외 시간에 선생님과 자유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에 내가 쓴 어린이 고사성어 책이 출간되자 남편이 과외 선생님께 내 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영어를 전공한 브라질 사람인데 내 책 소식에 무척 반가워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선생님은 그런 종류의 책을 매우 좋아한다며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전공이 무엇인지, 원래 직업이 뭔지, ‘고사성어’ 관련해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었는지 선생님의 질문이 쏟아졌다.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급히 ‘일하다’의 과거형 표현을 고심했다. 현재형 ‘일하다’ 동사를 ‘일했다’로 바꾸려면 무엇일까. 가까스로 떠올린 과거형 동사 변화를 이용해 ‘나는 방송국에서 작가로 일했어.’라고 말했다. 말하고 보니 누군가에게 내가 사랑하는 나의 직업을 과거형으로 말해본 것이 처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번에 책을 냈으니 나는 ‘책을 썼어.’라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앞으로 책을 또 내고 싶고,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으니 ‘나는 책을 쓸 거야.’라고 미래형으로 말할 수 있겠지.
과거형의 이야기보다 미래형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과거에 뭘 했든 그것은 나의 이력, 내 발자취로 두고 미래를 꿈꾸고 싶다.
엄마로 살면서도 내 삶을 내 일을 계속 꿈꾸고 이뤄가는 삶이 되고 싶다.
소설 속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서도 과거형으로만 말하지 않는, 미래형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과외 시간에 미래형을 배우면 선생님께 말해봐야겠다. “어린이 책을 계속 쓸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에세이도 쓸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