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프로님!, 혹시 전공이 머예요!?'
'아, 저는 경영학 마케팅 전공했어요~!, 프로님은 어떤 전공이셨어요?''
'진짜요? 프로님 마케팅이셨구나, 저는 불어불문이요!'
'ㅎㅎㅎㅎㅎ, 우리 패션비전공자가 둘다 MD하고 있네요 ㅎㅎㅎㅎ.'
회의를 끝내고, 같이 일하는 프로님과 Small Talk를 하던 중 서로의 전공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삼성은 현재 직급을 통일해서 모두 프로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필자 옆에 막내 MD의 전공은 'Sports Science' 학과이며, 체대 출신이다. 건너편에 있는 MD님은 하물며 한국체대 졸업생이다. 영역을 넓혀서, 동기를 살펴봐도 패션전공은 절반인 것 같다. 어쩌다가 패션 비전공자들이 모여서 MD를 하고 있는 재미있는 상황이 만들어 진 것일까? 다양성의 존중인가?(아 생각하니, 우리 팀장님은 패션직물 전공이시긴 하다. 한 분 있긴 있네!) 그리고, 마케팅 전공을 하던 필자는 지금 MD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한번 과거의 생각에 잠겨 본다.
□ 이진법적인 기준에서 결정된 첫 선택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면, 인문계를 갈지 이공계를 갈지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한다. (상담인지 면담인지 통보인지 잘 모르겠다.) 10월달 모의고사를 치고 나서 성적을 바탕으로 하는 면담이다. 생각해보면, 수학은 50점 넘기는 것이 목표였던 시절이다. 과학은,,, 신문에 나오는 운세를 보듯이 손이 가는 대로 OMR카드를 칠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렇게 누가 봐도 수학/과학적 자질은 야구로 치면 멘도사 라인에 머물고 있었다. 멘도사 라인(Mendoza Line)은 규정타석을 채우고도 2할대 초반을 맴도는 타율을 기록하는 타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멕시코 출신으로 1974년부터 1982년까지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시애틀, 텍사스에서 뛰었던 마리오 멘도사 선수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유격수였던 멘도사는 9년간 통산 타율이 2할1푼5리로 타격 능력이 형편없었다. 그렇다고 멘도사 라인이 '팬들을 열 받게 하는 최악의 타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멘도사 라인에 이름을 올리려면 '낮은 타율'과 함께 '규정타석 충족'이라는 쉽지 않은 조건도 채워야 해서다. 어찌 보면 낮은 점수와 꾸준히 시험을 치고 있는 필자와 적합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사회/국어는 이야기가 달랐다. 마치 매년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는 야구선수처럼 점수가 꼬박 꼬박 나왔다. 여포라는 별명을 가진 담임선생님은 23번째 면담자인 필자(당신에는 이름 순서대로 번호를 했었다.)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셨다. 필자의 성적을 보자마자, 방천화극을 꺼내서 휘두르는 여포의 기세로 필자를 몰아 세웠다.
'너는 무조건 인문계열이야. 이공계열 가면 시원하게 딴 애들 내신점수의 바닥을 깔아줄 운명이다.'
그렇다. 필자의 운명은 그렇게 인문계열로 옮겨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수능을 봤다. 당시에 삼성전자, LG전자에서는 이공계열 졸업생들을 우대했고, 전자·컴퓨터 관련 전공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정작 필자는 인문계였다. 선택지가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03학번이던 필자에게 아직까지 1998년 IMF의 기억은 생생하기에, 취업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취직 아니면 없다 라는 강요된 이진법적인 사고였던 것이다. 취직이 1이었고, 나머지는 그저 0이었던 옵션에서 취직하기 좋다는 경영학부라는 1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필자의 전공은 경영이 되었다.
□ 시드니 거르고 뉴욕?!
군제대를 하니 원래 그랬지만 글로벌 시대라는 압박이 확 다가왔다. 영어가 필수인 대세에 따라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했다. 어디를 갈까 이곳저곳 가격과 환경을 비교한 뒤 결심이 섰다. 학과성적이 선동열 방어율(학점 1점대를 뜻함)에 필적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주제였기에,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워킹비자가 가능한 호주로 마음을 먹고 어머니를 모시고 유학원에 갔다. 비용 사용에 대한 결재를 받고자 상신을 올린 것이다. 유학원 갈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호주를 가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캥거루나 코알라를 보겠거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날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뉴욕양키스 레전드)의 말처럼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경제상황에 어두웠던지라 상황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처음으로 호주와 캐나다 환율이 급등하고, 미국달러가 급락한 것이 기억이 난다. 쉽게 설명하면, 시드니나 벤쿠버 비용보다 뉴욕이 더 저렴한 말도 안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었다. 이런 기적이... 필자는 마음 속으로 만세 삼창을 외쳤다. 그렇게 필자는 9회말 2아웃 역전 홈런처럼 세계의 경제, 문화의 중심 빅애플시티 '뉴욕'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때가 필자의 인생을 바꾼 중요한 2년이 될 것이라고...
JFK공항을 내려 홈스테이에 짐을 풀었을 때. 먼가 벌써부터 피곤하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정감이 없었다. 홈스테이를 한 곳이 Queens의 Jamaica라는 곳이었다. 국가 이름 Jamaica는 들어봤어도 지역이 있는지는 몰랐다. 학원이 있는 맨하튼까지 버스 + 지하철 환승으로 1시간반이나 떨어진 시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다수가 흑인들이 거주하는 동네였다. 한국에서 나름 큰 도시인 대구에서 자란 필자지만, 사실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으며, 더더욱 흑인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에서 보는 라디오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힙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먼가 우주의 안드로메다를 헤매는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지하철로 가는 8개의 버스정류장을 지나는 동안 흑인이 아닌 사람은 필자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외국 경험이 많지 않던 필자에게 환경이 정말로 낯설었다. 그리고 주택가여서 상가를 찾기가 힘들었던지라, 갈 수 있는 선택지래봐야 세븐일레븐이 유일한 핫플레이스였다. 주말 동안 식사는 모두 편의점에서 해결하며, 2020년대의 '편도족 : 편의점 도시락을 애용하는 이들'을 10년 넘게 일찍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래도 뉴욕은 교통카드가 월정액이었던지라, 교통비만큼은 신경쓰지 않고 엄청 편하게 마음놓고 다닐 수 있던 장점은 있었다. 그렇게 한달동안 어학원을 다니면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영어를 이야기하자면, 참 대책없이 미국에 간 거 같다. 대화자체가 거의 되지 않던 수준인데,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었기에 거의 단어와 수화로 실생활을 해결하던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영어가 되지 않았느냐 하면, 나름 뉴요커의 모습을 보고 모닝커피를 마시겠다고 처음 카페에 들어 갔다. 필자의 차례가 되어, 자신있게 'Americano, please!'를 말했다. 당시 카페에 근무하는 대다수는 라틴계의 Spainish쪽 억양이 심한 직원들이었다. 나를 바라보며, 'With sugar or not?'이라고 물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저 외계어 같았다. 그렇게 여러 차례 되묻더니, 체념한 직원은 'stay or to go?'를 물었다. 다행히 to go라고 대답한 필자는 나중에 한 컵의 아메리카노와 작은 설탕봉지를 받은 뒤에야 그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참 무식이 용감이라는 어른들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다.
□ 뉴욕에서 만난 인생의 터닝포인트
두번째 용감한 무식은 인생의 최대 위기였다. 학원에서 일상체험을 위해 은행에게 가서 통장을 개설하라는 숙제를 받았다. 한 달이 지나서 조금 자신감이 붙었던지라, 32번가의 코리아타운 시티은행을 외면하고, 멀리 있는 시티은행으로 산책도 할겸 출발했다. 도착 후 어렵지 않게 통장을 개설하고, 체크카드를 받았다. 체크카드를 받고, ATM기도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문화의 차이에 따른 문제는 여기서 미국의 토네이도처럼 필자를 강타했다. ATM기에 카드를 넣고 가지고 있던 전재산을 넣었다. 그리고 한번도 확인할 겸 계좌잔고를 확인했더니, 웬걸... 입금 내역이 없던 것이었다. 하늘이 깜깜해졌다. 분명 넣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황급히 창구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거기서 하는 말이 참 필자의 마음을 비수처럼 훅 찌른다.
'봉투에 넣어, 계좌번호를 적어야 한다. 저녁에 수거한 뒤에 일일이 입금처리가 하는거야. 너의 실수야'
2007년 뉴욕 맨하탄 시티은행의 ATM기가,,, 이렇게 수작업이라고? 이미 한국은 당연히 돈만 넣으면 되는 시대였는데, 금융의 중심 뉴욕이 이렇다고?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내가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 돈은 무려 1달 뒤에야 돌려받았다.) 졸지에, 빈털터리가 된 상황에 집으로 SOS를 부탁할 수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당장 50달러와 어제 구매한 메트로카드 뿐이었다. 하루 종일 멘붕으로 정신을 못 차렸던 느낌이 생생하다.
세번째 용감한 무식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파트타임을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짧은 영어지만, 몸으로 때우는 건 자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Hiring'이라고 적힌 곳과 당시 한국교민 사이트였던 '헤이코리안'의 구인 광고에 문의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달밖에 안된 필자의 영어실력은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과 같았고, 예상대로 줄줄이 낙마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거주하던 곳(Jamaica -> Flushing으로 거쳐를 옮긴 뒤였다.)에서 멀지 않은 곳의 병원을 지나다가 'hiring'을 발견했다. 면접을 들어갔더니, 역시나 표정이 좋지 않다. 떨어졌다 싶었는데, 웬걸 늘어나는 한국인 환자 케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잡일할 남자도 필요하다며 이것저것 시키겠다고 하였다. 최소주급(당시 시간당 $7이 뉴욕의 최소 시급이었다.)을 받기로 하고 이렇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뒤에 알았지만, 그들이 말한 잡일은 고객CRM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마케터를 꿈꾸는 필자의 입장에서 CRM이 잡일이라니!! 덕분에 빠른 적응과 함께 고객과의 대화 기회가 많아 영어도 쑥쑥 늘었다. 제법 붙임성도 좋아 사람들과 잘 지냈고 주급도 인상되고 오히려 일을 안했을 때보다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참, 위기라고 생각했던 일이 어찌보면 큰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용감한 무식 덕분에 파트타임도 생기고, 잃어버린 돈도 돌려받아 갑자기 풍족해졌다.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평일에는 수업과 일을 병행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주말만큼은 온전히 내 시간이었던지라, 풍족해진 주머니 덕에 이곳저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뉴욕에 갈때 달랑 여행책 하나 사서 갔는데, 하물며 읽어보지도 않고 뉴욕생활 여러 달이 지난 뒤에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에 나온 핫플레이스와 일하던 병원에서 현지인들이 소개해준 핫플레이스를 다니기 시작했다. 주말 센트럴파크에서의 여유와 함께 SOHO 거리를 자주 방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패션은 필자에게 관심밖이었던지라 처음 SOHO를 다닐 때 큰 감흥없이 다녔던 거 같다. 그런데 나름 뉴욕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뉴요커들의 패션 간지가 눈에 들어오게 되고 때마침 '섹스앤더시티'를 보게 되었다. 이렇게 유명한 곳에서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다니, 그저 필자의 무식과 무관심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생기기 시작한 관심과 필자의 주머니 사정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운좋게도 병원의 의사들과 제법 사이가 좋아 그들의 쇼핑에 함께 가서 명품들도 자주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남자 의사들이라서 그런지 컨템포러리한 남자 뉴요커들의 세미 비즈니스캐주얼을 많이 구매했고, 끝내 필자도 그들과 같은 남성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다녔다. 기억해보니, 처음 산 비즈니스캐주얼은 Armani였던 것 같다. 한번 사니, 그렇게 부족한 게 눈에 보여서 충동 구매를 하기도 했다. 물론, 얼마 뒤 나의 주제를 깨닫고 자중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때는 몰랐다. 내가 패션일을 할 것이라고는. 그도 그럴 것이, 병원이후 건설회사 마케팅 인턴, 자원봉사 마케터 등 마케팅 관련 경력을 1년 반동안 쌓는 등 머리 속에는 오로지 마케터가 되는 것만 가득했었다. 그렇게 필자의 마음 속에는 어느 덧 패션이라는 큰 존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 직업이 된 패션
한국으로 돌아와, 학점이 낮았던 터라 매학기 풀학점과 계절학기를 싹 다 들어서 학점 재공사를 시작했다. 대학의 커리큘럼에 이해를 잘 못하시던 어머니는 필자에게 '너희 대학은 도대체 왜 방학이 없냐?'라고 하실 정도였다. 웃픈 이야기지만, 사실을 이야기 못 드린 불효자의 고백이다. 다행히 학점과 평점을 채우고,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당시 지방대였던 필자는 무조건 in-seoul을 목표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기업 인턴부터 지원했는데, 삼성 인턴 모집이 공지되었다. 1위 기업이라서 그런지 계열사가 무지하게 많았다. 전자, 중공업(당시에 조선이 대세였다.), 물산 상사, 화재, 생명 등 30개가 넘는 계열사를 훑어보던 중에, 문득 제일모직이 눈에 들어왔다. 패션? 뉴욕에서의 경험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이거는 100% 재미있다. 전자제품보다는 그래도 옷 파는게 재미있지 않을까? 나름 뉴요커였는데? 정말 미래에 대한 고민이 촛불처럼 짧았다. 그렇게 제일모직 패션부문 마케팅/영업 직군으로 지원했고, 서류를 통과해서 면접을 가게 되었다. 엥? 패션이라서 그런지 면접 복장이 자율복장이었다. 고민되게 자율복장? 아직 보수적인 시대였기에 페이크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이라면 필자는 남성복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큰 고민하지 않고 수트를 차려입고 면접장에 도착했다. 면접장에 들어가는 순간, 아뿔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지원자들의 복장은 그들이 어디에 지원하는지 여실히 드러날 정도로 강렬했다.
'아, 저분은 구호느낌인 것이 여성복 지원하려나 보다.'
'저분은 디자이너인가? 아니면 그냥 아방가르드한 타입인가?'
'오, 면접에 반바지라니,,, 놀라운데.'
주위를 둘러보니, 참 필자는 너무 평범하고도 평범했다. 주눅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 마케팅 직군이니깐 너무 강렬한 것보다는 심플한게 좋지라는 위안을 하며, 면접을 봤던 기억이 난다. 다행이 면접을 통과해서 인턴을 거쳐 정식 입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부모님은 그래도 패션보다는 전자 계열이나 금융 계열을 선호하셨으나, 막내 아들이자 불효자의 컨셉을 한번 더 하겠다는 마음으로 제일모직 패션부문에 입사하게 되었다.
수트를 입고 인터뷰를 해서 그런지 역시나 남성복 영업팀으로 배치를 받았다. 처음에는 마케팅직군입사인데 어째서 영업일까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10년을 훌쩍 지난 지금, 차라리 그때 영업으로 현장을 많이 본 것이 참 큰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한국의 50개가 넘는 백화점과 전국 주요 상권을 첫 3년동안 마음껏 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MD를 하는 것에 있어서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영업을 하고 난 뒤, 패션을 한다면 결국 상품 MD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도 있었다. 그 때의 배움을 발판 삼아, 영업과 3년의 그룹 파견을 지나 드디어 MD의 명함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마케팅/영업/인사/교육 등 짧은 시간에 다양한 직무를 경험하고, MD를 하게 된 것이다.
□ "재미"라는 셀레임과 호기심의 결과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면, 문득 대장금에서 나온 장금이(이영애)와 민정호(지진희)가 시처럼 이야기한 장면이 떠오른다.
'기쁘십니까?'
'슬픕니다.'
'슬프십니까?'
'기쁩니다.'
'두려우십니까?'
'설렙니다.'
'설레이십니까?'
'두렵습니다.'
간결하지만,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던 대화였다. 대장금의 김영현 작가는 이 대목을 두고 '작가는 자신이 아는 감정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자기 감정에 솔직한 글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히는 것이다.' 패션과 전혀 무관하던 필자에게 패션이란 직업은 '재미'라는 설레임에서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 패션업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다양한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업/마케팅/교육을 지나 지금의 MD 커리어까지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여전히 패션업을 하는 필자의 마음 속에 가장 큰 감정은 재미에 대한 호기심과 설레임인 것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