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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Oct 23. 2023

고구마를 캐는 시골의 아침

시골을 찾아 새벽의 비경과 가을걷이의 기쁨을 누리다

짧은 가을 여행길에 오랜만에 처가에 들렀다. 홀로 계셨던 장모님께서 작고하신 터라 손위 처형댁이 처가가 되었다. 동서와 처형은 언제나 따뜻하게 반겨 주셔서 방문할 때마다 옛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이 들마음도 언제나 푸근하다.

그분들이 사시는 곳은 남쪽의 전형적인 시골이다. 향토 짙은 따스한  정이 듬뿍 담겨 있고 전원의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있어서 좋다. 이곳에서는 철철이 도시에서 맛보기 어려운 특별한 체험과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봄에는 알알이 탐스런 매실을 고, 통통한 죽순을 캤다. 여름에는 강가에 나가 재첩과 다슬기를 잡았다. 가을에는 능이버섯을 따는 진기한 추억도 있다. 지금은 수확의 계절이기에 고구마를 캐볼 예정이다.


8시가 지난 캄캄한 저녁에 시골집을 찾았다. 사립문을 들어서니 구골목서가 진한 향기를 풍긴다. 달콤한 향내가 집 주위를 감싸고 있다. 어둠 속에서 짙푸르고 단단한 잎 사이로 흰꽃송이들이 뭉쳐나 겨울에 내린 눈처럼 나무를 장식하고 있다. 감나무에도 주먹만 한 단감들이 익어가고 마당에는 떨어진 감도 보인다.

구골목서

반가운 얼굴에 환한  미소로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가족으로 맺어진 정은 각별하다. 포장할 필요 없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맘 편하게 드러낼 수 있고, 진솔한 감정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다. 사람 사이의 진솔하고 살가운 정을 풍성하게 체감하고 누릴 수 있는 안정된 된 공간에서 마음을 풀어놓으며 회포를 다.


마당에서 따온 단감 몇 개를 맛보았다. 석곡의 단감은 씨가 없고 은근한 단맛이 일품이다. 아쉽게도 올해는 감이 많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씨알이 굵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감을 깎아 보았는데 아직 제대로 맛이 들지 않았나 보다. 시원하고 아삭하지만 깊은 맛이 없다.

 

이런저런 지난 이야기를 나누며 내일 아침 일찍 고구마를 캐러 가기로 했다. 가장 좋아하는 먹거리 중 하나인 고구마 순도 따서 서울로 가져갈 예정이다. 하루 종일 바쁜 하루를 보내서 곧바로 잠이 들었고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보성강변에 위치한 밭으로 향했다.

차로 지나가는 새벽 강가에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처음으로 만나는 신비로운 풍경에 눈이 저절로 커진다. 주위가 전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신비롭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비상하듯 연기산봉우리를 향해 솟아오른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피어오르듯 수면 위로 흰 안개의 자취가 가득하다. 

경이로움에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바쁜 일정이 있어서 차를 멈추고 사진에 담지를 못했다.


밭에 먼저 도착한 처형 부부의 손길이 분주하다. 하지만 평소 만나기 어려운 진기한 경관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차를 세워놓고 온길로 냅다 뛰었다.

나무와 강과 안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현실 세계를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만난다. 사진에 담아보지만 눈으로 체감하는 감동을 담을 수 없다. 한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눈앞의 풍경을 그려내려 애를 썼다. 아침 해가 산마루를 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새벽의 경이를 떨쳐야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일을 하러 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내와 처형은 벌써 고구마 순을 한아름 따놓았다. 동서는 예초기를 가지고 우거진 잡초를 베어내느라 바쁘다. 나도 장화로 갈아 신고 장갑을 끼고 고구마 캐는 일에 나섰다. 

고구마 잎들이 이슬에 젖어 축축하다. 줄기가 무성하게 덮인 이랑에서  먼저 고구마 줄기를 걷어낸다. 드러난 봉긋한 흙무더기를 호미로 살살 긁는다. 흙이 부드러워 촉감이 좋다. 붉은 자줏빛 고구마 꼭지가 보이면 손으로 잡아당긴다. 무른 땅이라 쑥 빠져나오는 느낌이 재미있다. 씨알이 굵으면 괜스레 흐뭇하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호미날에 고구마가 찍히기도 한다.  그럴 땐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마음이 좁아진다. 힘이 들지만 수확하는 기쁨에 손은 분주하다.

밭두둑에 나물로 먹을 수 있는 쇠별꽃이 탐스러워 캐려고 하니 옆집에서 밭에 농약을 뿌려 못 먹는다고 하신다. 동서네는 대부분 유기농으로 기르는데 이웃이 미워진다.

 

한 시간이 후드득 지났다. 부지런한 손놀림에 크고 작은 고구마들이 이랑에 무더기로 쌓였다. 호박고구마, 반고구마가 알찬 수확의 기쁨을 안긴다.


집으로 돌아와 채마밭에서 가을 상추를 솎아냈다. 어린 상추로 겉절이를 하면 이보다 입맛을 돋우는 것도 없다. 이어서 호박잎도 딴다. 호박잎 쌈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별미다. 하지만 다음 일정이 촉박해 맛보질 못했다. 시간도 없는데 왜 일거리를 만드냐고 아내에게 타박만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없는 일, 야무지게 봉지에 담아 차에 실었다.

채마밭의 상추

처형이 뚝딱 차린  아침을 먹었다. 손이 빠르고 손맛이 좋은 처형이 차린 식탁에는 오이 무침과 민물새우인 토하가 일한 뒤의 시장기를 살뜰히 채워 주었다.


시골은 정겹다. 사람들이 정겹고 자연이 정겹고 인심이 정겹다. 멋진 새벽 풍경을 만났고 가을걷이의 기쁨을 만끽했다. 처형네가 바리바리 챙겨준 인심을 차에 한가득 싣고 감사와 아쉬움을 함께 나누며 다음 일정인 태안사로 떠난다. 행복한 가을날이다.

구골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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