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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Jan 17. 2024

눈 속으로 산책

눈 내리는 산길을 홀로 걷다

지난밤을 설쳐서 꽤 피곤한 오전이다. 글쓰기 챌린지로 새벽에 기상해서 글을 쓰고는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여전히 잠이 오질 않아 그냥 일어났다. 아침이 한참 지난 시각에 거실에 나왔더니 베란다 창밖으로 눈발이 날린다. 따뜻하고 푹신한 소파에 자리 잡은 반려견 쁨이는 쿨쿨 숙면 중이다.


오늘은 다른 일정이 없어 느긋하다. 아내가 출근 준비를 하는 사이 점심을 챙겨 먹는다. 숙면을 하지 못해서 입맛도 없다. 식탁에서 보이는 창밖의 눈발이 제법 굵어졌다. 일어나 바라본 풍경은 눈이 빚어놓은 깨끗한 세상이다.



눈 속으로 산책을 가볼까 하는 마음이 인다. 다른 한편에는 옷을 차려입고 나서야 하는 귀찮음도 있다. 아내가 출근하는 것을 배웅하고 후식으로 귤을 하나 까먹었다. 평소 과일을 무지 좋아해서 한자리에서 10개 정도를 먹어치우곤 했다. 그러다 당분이 뱃살의 주범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운동을 많이 해도 뱃살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늘어지려는 게으른 마음을 다잡고 오리털 파카에 등산복과 등산화를 신고 가까운 천장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풍경 사진을 찍으려면 장갑이 불편하지만 손이 시릴까 봐 두툼한 장갑도 꼈다. 강아지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낸다. 그러나 젖은 땅에다 홀로 여유를 즐기려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미안한 마음을 품고 나간다. 아파트를 나서니 눈으로 덮인 나무들이 반갑게 인사를 전한다. 하늘에서는 마치 방앗간에서 빻은 쌀가루처럼 흰 눈송이가 춤추듯 날리고 있다. 눈에 젖을까 봐 모자를 뒤집어썼다. 시야가 좁아져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 중무장을 해서인지 하나도 춥지 않고 되려 신선하다.


길에도 눈이 제법 쌓였다. 행인들은 우산을 쓰고 걷고 있다. 하지만 눈을 그냥 맞으며 걷는 길이 더 자유롭다.

길을 건너고 골목길을 지나 의릉입구로 향한다. 눈 위를 걸을 때 나는 발소리가 좋다. 많이 쌓이지 않았지만 제법 뿌득거리는 소리가 함께 따라온다.

의릉

평소에도 의릉은 조신한 분위기지만 오늘은 유독 더 차분하다. 깨끗한 순백이 빚는 고요함이 더해서일까? 입구의 소나무도 더 의젓해 보인다. 조용한 경치가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의릉

예종을 지나야 천장산에 오를 수 있다. 산 초입에 정자와 연못이 눈을 입고 서있다. 많은 눈은 아니지만 정자 지붕과 얼어버린 연못을 하얗게 색칠해 놓았다. 인적 없는 고즈넉한 정경이 옛날의 고아한 정취를 빚어낸다. 정자를 제집처럼 머물던 고양이를 눈으로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한예종

들어선 산길에도 눈이 제법 쌓였다. 하늘을 가득 수놓으며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빈 산길을 홀로 걷는다. 미끄러질까 봐 조심조심 걷지만 숲은 미동도 없이 고요하다. 옷을 잔뜩 껴입기도 했지만 기온도 그다지 낮지 않아 나무 등걸이나 가지에 쌓인 눈이 추워 보이지 않고 포근한 느낌이다. 솜옷을 두툼하게 입고 밖에서 신나게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 같다.


신갈나무와 팥배나무 그리고 때죽나무가 대부분의 숲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같이 맨몸이지만 초라하지 않고 당당하다. 지나간 계절을 통해 치열한 시간을 보내며 단단히 겨울준비를 마친 이들이다. 한겨울은 그들의 느긋한 휴식의 시간이다. 미리 준비하는 삶에는 여유가 따른다. 우리네 삶도 현재를 열심히 살면서 내일 준비하게 되면 두려움이나 걱정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숲에는 늘 푸른 나무들도 있다. 눈이 시원해진다. 한겨울에도 푸른빛으로 생동감을 전하는 소나무가 그들이다. 푸른 솔잎에 흰 눈이 어우러져 생기가 도드라진다. 곧바로 자라는 나무도 멋지지만 굴곡을 지닌 소나무는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다. 눈 맞은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전하는 푸른 기운은 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도열한 편백나무 숲도 아름답다. 숲에는 동고비와 바위종다리를 닮은 귀여운 새들도 머문다.

동고비 /바위종다리

이들은 함께 살아가며 조화를 이룬다. 조화라는 단어는 아름다운 말이다. 어느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되는 것이다. 숲에 가면 그런 조화로움이 있다. 나도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자연인이 된다.


미끄러지며 산마루를 오른다. 운무에다 하늘 가득히 내리는 눈으로 먼 도심이 아련하게 보인다. 눈으로 덮인 나무들만 선명하다.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다 덮어버린 눈의 위력 앞에 모두가 겸손하다. 요란한 세상이 눈 속에 파묻힌 풍경처럼 깨끗해지고 조용해졌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풍광을 사진으로 담고 싶은 데 핸드폰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전화벨이 울리며 나를 찾는 세상에 마음이 급해져 산을 내려온다. 눈은 여전히 펑펑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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