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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Oct 03. 2024

밤 지옥에 빠진 가을날 밤 줍기

모락산 둘레길 밤 줍기에 나서다

밤을 주우러 갔다. 가을이면 떨어진 밤을 우연히 발견해 주워본 적은 많았지만 어딘가에 처음부터 밤을 줍기 위해 간 것은 이 번이 처음이다.  직장 후배를 만나 이야기 중에 텃밭 주위에 밤이 많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가 솔깃해서 날을 잡았다. 국군의 날 아침 일찍 가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후배도 비바람이 불어서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아쉬움이 컸다.


약속이 없어진 오전에 TV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절도 있고 질서 정연한 군인들의 행진모습이 아주 늠름해 보였고 선보이는 신식무기들이 믿음직스러웠다. 특히 콘크리트 지하 100미터도 뚫는 괴물미사일 현무-5의 위용은 대단했다. 지하에 설치된 평양지휘부를 궤멸시킬 수 있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녔다고 한다. 마지막 에어쇼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아찔한 곡예비행을 보여주었다. 핵으로 위협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무력시위로 아주 적절한 것 같았다. 힘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오늘 자랑스러운 국군장병들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오후에 날이 개었다. 아내가 무료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밤을 주우러 가자고 했다. 후배가 좋다고 해서 아내도 함께 출발했다. 집에서 출발 시각은 오후 두 시였다.


찾아간 장소는 경기도 평촌에 위치한 모락산 둘레길이다. 차를 타고 집에서 한 시간가량 달렸다. 나는 등산화를 아내는 장화를 신었다. 코팅된 장갑도 준비했다. 큼지막한 홈플러스 시장 가방도 챙겼다. 이왕 줍는 거 몽땅 줍고 싶었다. 수렵채집에 나서면 그 어느 때보다 열정이 활활 타오른다. 타고난 본성이 수렵채집하는 일인 것 같고 그런 일들이 마냥 재미가 있다. 이런 나에게 아내도 물이 들었다. 아내도 나만큼 좋아하니 우리는 천생연분이 분명한 것 같다.


도착한 모락산 둘레길에는 사람들의 통행도 많았다. 생각만큼 밤을 많이 주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사그라들었다. 비 온 뒤라 숲은 축축했다. 밤송이들이 지천에 깔렸다. 기대와 다르게 밤껍데기는 널려있는 데 정작 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기 전에는 알밤이 우수수 쏟아져 있을 줄 알았다. 후배도 멀리 왔는데 밤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크지는 않지만 작은 밤들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숲 속에 들어서니 더 많았다. 우리처럼 본격적으로 밤을 줍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가 온통 밤나무여서 하나 둘 줍는 재미가 쏠쏠했다.


떨어져 있는 밤톨들은 참 귀엽다. 윤이 나고 매끄러운 밤들이 앙증맞다. 때때로 밤송이채 떨어져 있는 것도 있고 주로 낙엽 위에 있지만 낙엽 밑에도 숨어 있다. 밤송이 안에는 한가족처럼 셋이서 꼭 붙어있다. 아무리 작은 밤송이라도 대부분 셋 씩 들어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가끔은 동그란 알밤을 만나기도 하는 데 이 아이들은 외동이 들이다. 허리를 구부리며 줍다 보니 허리가 엄청 아프다. "아이고 허리야!" 하면서도 허리를 한 번 펴고 나서 곧바로 채집모드 전환이다. 산밤이라 대부분 작지만 튼실한 녀석을 만나면 아주 반갑다. 또 어디 토실토실한 녀석이 없나 다람쥐처럼 두리번거리며 쉬지 않고 찾는다. 한참을 줍다 보니 가방이 꽤 무거워졌다. 아내도 아주 열심이다.

주운 밤과 호박잎


후배는 우리 부부가 주운 밤을 보고 깜짝 놀란다. 재미로 줍는 수준을 넘어 거의 수확하듯 많은 양을 모았기 때문이다.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주운 결과가 아주 뿌듯했다. 산을 오르는 김에 후배가 경작하는 텃밭에 가보았다. 산마루에 밭이 있었다. 상치와 배추를 심어놨는 데, 노루가 잎을 다 따먹어 버렸다. 반면에 가지가 제법 많이 열렸다. 아내는 잘 익은 가지를 따서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적당히 자란 가지는 단맛도 있고 식감도 좋아서 생으로 먹어도 맛이 있다. 나도 한 입 먹어보았다. 밭에서 바로 따먹는 맛이 났다. 덩달아 신이 난 일은 호박잎을 딴 일이다. 호박잎 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부드럽고 통통한 호박잎을 찾아내 욕심껏 따고 늙은 호박도 하나 얻었다.

밭 주변으로 칡덩굴로 뒤덮인 은신처가 있었고 그곳을 지나면 탁 트인 바위 전망대가 있었다. 백운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망이 좋은 바위에 앉아 간식을 먹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출출한 후라 아주 꿀맛이다. 후배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산에 올라 작물도 돌보고 쉬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심신을 돌보고 쉼을 누리기에 아주 그만인 곳이었다. 돌아오는 길가에 개여뀌와 수염가래꽃이 참 예쁘다.

개여뀌
수염가래꽃

보리밥으로 저녁을 함께 먹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밤지옥에 빠졌다.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너무 많은 양의 밤이라 처치 곤란할 정도였다. 일단 밤을 삶아 까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쉽게 까는 법을 찾아 그대로 따라 했는데 밤이 말라 그런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물에 불린 후 삶고 삶자마자 찬물에서 불리는 식이었다. 까도 가도 끝없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둘 다 지쳐서 팽개치고 말았다. 다음날 아내가 출근하고 난 후 나머지는 내 몫이었다. 하루를 지나니 더 까기가 힘들어서 숟가락으로 일일이 손질을 해야 했다. 거의 다섯 시간을 걸쳐 결국 일을 끝냈다. 아내는 대단하다고 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삶지 않은 밤이 한 보따리가 더 있다. 이건 대책이 없다. 수렵채집의 삶은 정말 힘들다. 어려운 삶을 살아낸 조상님들의 인내가 존경스럽다.


#밤줍기 #가을날 #밤 #모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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