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가 춤춘다. 하늘하늘한 여린 몸짓이 우아하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빛난다. 은빛으로 단장한 억새는 윤슬처럼 햇빛에 반짝인다. 이곳은 화왕산이다. 소나무 숲을 따라 산 꼭대기를 지나면 너른 벌이 나타난다. 오 만여평 규모의 분지가 산마루에 걸쳐있다.선사시대 화산이 분출한 곳으로 온통 억새가 자란다.
이른 발걸음인지 아직은 억새가 수줍게 피었다. 비장의 무기를 감춘 듯 벌판이 수더분하다. 만발한 억새밭을 볼 수 없어서 조금 섭섭하지만 부지런한 아이들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 되었다.
화왕산은 757.7미터 높이로 경남 창녕에 있다. 창녕은 고대 가야의 중심 도시로 유서 깊은 고장이다.신석기시대 비봉패총을 시작으로 가야시대 고분이 산재한 송현동 고분군이 있다.화왕이라는 산 이름은 비사벌의 옛 이름이 화왕인 데서 비롯되었다. 창녕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천연늪인 우포늪도 있다.하루로 돌아보고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고장이다.
당일치기 산행으로 오전 7시에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화왕산 까지 거의 네 시간이 소요되었다. 도로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분위기다. 다행히 도착해서는 날이 갠다. 자하곡에서 출발하여 3코스 길을 택해 분지를 돌아 1코스로 내려왔다. 산행 시간은 세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산을 오르는 초입에 신라시대 왕릉을 닮은 커다란 봉분이 보인다. 송현동 고분군이다. 고대의 자취를 만나는 기분이 묘하다. 도솔암 일주문에서 가을의 전령이 우리를 반긴다. 다채로운 색이 뒤섞여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국화다.
송현동 고분
산길에는 장대한 소나무가 도열해 있다. 소나무들로만 이루어진 숲이 길 따라 이어진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고요한 느낌이다. 참나무가 한 두 그루 보일만 한데도 오로지 소나무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걷는 발걸음이 진중해진다. 물기를 머금은 길에는 가을꽃이 피었다. 산박하와 구절초가 지칠만 하면 힘내란 듯이 피어있다.
구절초/ 산박하
오르막이 이어지다 보니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호흡이 가빠지는 만큼 산의 맑은 정기가 몸과 마음을 씻는 중이다. 숲에 차츰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찾아든다. 고즈넉한 숲이 깨어난다. 푸른 솔잎의 자태가 드러난다. 덩달아 대기도 푸른 물이 드는 것 같다.
쌀쌀할 줄 알고 긴팔을 입고 바람막이까지 입었는데 완전히 틀렸다. 산에 들자마자 겉옷을 벗었는데도 땀이 흥건하다. 반팔 옷을 입어도 충분한 것을 잘못 선택해 고생이다.^
정상이 가까우니 반가운 바람이 분다. 충분하지 않아도 부드러운 바람의 촉감이 좋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창녕의 모습은 안개로 아스라하다. 정상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늘이 맑게 개었다.
정상을 돌아 내려가니 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화왕산성이 두르고 있다. 산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은 2.7킬로 미터 길이로 기원은 가야시대까지 거슬러 간다.조선 시대에 이르러 홍의장군 곽재우장군의 근거지로 큰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돌로 쌓은 단단한 산성에 굳센호국의 의지가 묻어난다.
화왕산성
분지전체를 억새가 차지하고 있다. 보기 드문 장관이다. 산성을 따라 굽이치는 둘레길이 구름에 달 가듯 떠나가는 나그네가 걷는 길처럼 운치가 있다. 억새밭에는 들어갈 수는 없다. 보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들판에는 활짝 핀 억새부터 막 피기 시작한 억새가 벌판 가득 넘친다. 대강 6 7할 정도 핀 것 같다. 눈에는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도 정작 사진에는 표현이 안된다.
길가에는 구절초가 무리 지어 피었고 들국화도 만발했다. 더위는 여전하지만 가을은 제걸음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억새는 무리 지어 바람결에 살랑대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태가 가장 아름답다. 분지를 절반쯤 돌다 그 풍경을 만났다. 햇살에 반짝이는 자태는 덤이다.
구즬초
1코스로 내려오는 길은 험했다. 험한 만큼 숨겨 놓은 풍경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수고에는 반드시 이익이 따르기 마련이다. 산을 오를 때 소나무 기둥들만 보였는데 내려가는 길에는 푸른 솔잎의 싱그러움을 눈에 지치도록 보여준다. 기암과 소나무는 천생연분이다. 기묘한 바위들과 짝지은 소나무들이 건강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푸른 기상이 내게도 전해져 내게도 푸른 물이 든다.
고민바위/ 곰바위
화왕산은 지조가 있는 산이다. 소나무의 순수함만이 존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외골수로 소나무가 주축이다. 산마루의 억새도 장관이지만 소나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억새를 보러 왔다가 푸른 솔을 물리도록 즐겼다. 하산 길에 페튜니아와 마삭줄이 피날레를 장식한다. 아름다운 가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