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 단편소설집, 첫 번째 이야기 : 봄을 보다
첫 번째 이야기 : 봄을 보다
두 번째 이야기: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세 번째 이야기 : 마법 카메라
네 번째 이야기 : 사진팔이 소녀
다섯 번째 이야기: 고 래 집
여섯 번째 이야기 : 용과 기사
일곱 번째 이야기 : 만다라
첫 번째 이야기 : 봄을 보다
그것의 손에 들린 칼날은 상어의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살짝 닿기만 해도 속살까지 갈라질 것이 분명해서 나로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의 얼굴 위에선 음흉하고 비틀린 미소가 점차 쾌락의 만족으로 바뀌어갔다. 그래, 기어코 내 안에 식칼을 쑤셔 박아야, 피를 보고 토막을 내어야 만족하겠다는 거구나. 나는 한없이 아등바등거렸지만 그것의 억센 손은 내 사지를 강하게 억눌러 오고 있었다. 칼이 다가오고 있었다. 곧 이어질 살해와 식사와 욕망의 충족에 대한 기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입술이 없었다. 칼날은 단두대의 작두처럼 정수리부터 떨어졌다. ‘썽둥’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반이 되었다.
나는 두 번째 칼질을 이어서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남편이 귀신처럼 서재에서 흘러나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살짝 찌푸린 그의 미간에다가 대답했다.
“토마토 샐러드 할 거야.”
내가 넘겨짚었던 모양인지 남편은 식사의 종류를 궁금해한 것이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민이 여전히 가득한 그의 미간에게 이번에는 질문을 던졌다.
“왜? 뭐 신경 쓰이는 거 있어?”
그는 의외로 순순히, 하지만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대답과 질문을 쌍으로 건네었다.
“이번엔 뭐에 몰입한 건지 궁금해서. 칼이었어?”
“아니. 이번엔 토마토. 살해당하는 식물이야.”
부끄러움에 얼굴이 조금 빨개지는 것 같았다.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식칼 치고는 너무 겁에 질렸다 싶었어. 중간에 즐거운 표정이 보이길래 식칼인 줄 알았는데. 그건 뭐였어?”
“글쎄. 둘 다 조금씩은 이입했나 봐.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네가 칼 고르면서 흥얼거리기 시작할 때쯤. 그 노래 이름 물어보려고 나왔었어.”
보고 있는 모든 것에 나 자신을 대입하는 것은 내 오래된 특기이자 취미였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요새는 이입하는 줄도 모르는 채 이입을 시작할 정도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과몰입’이니 ‘물아일체를 달성한 신선’이니 놀려대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문제 삼지는 않았었다. 적어도 어제저녁 전 까지는 그랬다.
금요일 저녁의 특식인 마라탕을 먹으며 남편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봄아.”
붉은 유황천 안을 들락날락하는 은빛 물고기 – 같은 수저- 가 되어보던 중이었던 나는 갑작스레 불린 이름 때문에 현실로 소환되었다. 꿈에서 깨듯 허우적거리는 내 정신에 닻을 달아주기 위해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내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봄아!”
“응?”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야, 너 아이를 갖는 게 어떨까?”
그 말은 너무 크고 무거운 것이라 나는 얼음물에 빠진 듯 살벌하게 정신을 차렸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이제 우리 생활이 안정되기도 했고, 어머니께서도 손자를 많이 바라시잖아. 한 번 얘기해 볼 때가 된 것 같아.”
당황한 나머지 나는 남편을 연애할 적에나 부르던 호칭으로 불렀다.
“오빠! 나 아기 갖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잖아. 그게 우리가 만나고 결혼하게 된 이유고! 갑자기 왜 그래?”
남편은 그 말에 잠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주저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봄아, 사실 있잖아.”
“응.”
“네가 그렇게 사방팔방 모든 물건에 감정이입하는 거가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서 그런 거라는 글을 읽었어. 몰입해야 하는 대상을 찾질 못해서 왔다 갔다 하는 거래.”
“그래서? 그게 뭐? 어디에 실린 말도 안 되는 글을 보고 이러는 거야 대체?”
“이상한 글이 아니고, 너 지난달에 갔던 상담소 기억나? 우울하고 답답하다고 갔었잖아. 거기서 보내온 소견서야.”
어디 인터넷 신문에서 되도 않는 기사를 읽고 이러는 줄 알고 단단히 면박을 주려고 했던 나는 ‘소견서’와 ‘상담소’라는 말에 살짝 깨갱하는 기분을 느꼈다. 사실 상담소에 갔던 것 자체가 우울이나 답답함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켕겼던 것도 크다. 그때도 역시 몰입 상태가 최근 들어 잦고 길어지는 탓에 상담소를 찾은 것이었지만 남편이 걱정할까 봐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비밀과 단어들의 위압감 덕분에 나는 약간 움츠러든 채로 대화를 잇고 말았다.
“소견서에 뭐라고 적혀 있는데...?”
“방금 말해준 그대로야. 몰입할 대상을 찾지 못해서 모든 것에 이입하는 거래. 대상을 찾지 못하면 신경불안증적인 증세가 심해질 수도 있다고 쓰여 있고.”
우리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식탁 위 마라탕은 점차 식어 표면 위로 하얀 고추기름의 유빙이 생기기 시작했다. 포크로 쇄빙선을 만드는 상상이 시작되려는 찰나, 남편이 적막을 깨 주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황당한 말을 이해조차 할 수 없어서 머뭇거리자 남편은 계속해서 사과를 이었다.
“내가 좀 더 매력적인 사람이거나 좋은 사람이었으면 네가 나에게 몰입하고 이입하며 안정적으로 변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지 못해서 미안하고, 너를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사실 결혼하고 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어. 근데 아니더라. 나에게 집중하기보단 주변 많은 것들에 이입하는 널 보면서 나도 자괴감이 많이 들었어.”
그 심연처럼 깊은 오해와 빗나간 힐난 앞에서 내가 건넬 수 있는 말은 텅 빈 위로뿐이었다.
“아니야... 지금도 잘하고 있어.”
“아닐 거야. 아니니까 네가 힘들어하지. 그래서 아이를 갖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어. 다른 모든 것에 몰입하듯 아이에게 몰입하면 그건 분명 괜찮을 테니까. 생각해봐. 아닌 너 안에서 자라서 너를 통해서 세상으로 나오잖아. 너의 일부이고 너 자신인 거야. 나 자신에게 몰입하다 보면 감정적으로도 안정될 거라고 생각해.”
그때 나는 짧디 짧은 결혼생활에서 처음으로 남편에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욕을 할 뻔했다. 그리고 분명 그때 욕을 했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에는 커다란 금이 하나 갔을 것이다. 그 갈라짐이 더 커져 심연이 될지, 아니면 서서히 시간과 신뢰로 보수되어 다시 견고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위기가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 덕분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야속하다고 해야 할지 불분명한 일이 되기는 했지만, 욕이 나오는 것보다 0.5 초 앞서서 감정이입이 먼저 일어났다. 그 순간 나는 남편이 되었다.
그의 눈에 나는 이상한 여자로 비쳤다. 불안정하고 나약해 보이고 시도 때도 없이 사물에 자신을 투영하는 여자. 지금도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앉아있어서 나-그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웃는 것일까, 슬픈 것일까, 화난 것일까? 남편의 눈에 비친 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내 안에서는 화와 불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난주에 먹은 생선 내장탕처럼 하얗고 빨간 것들이 속을 덥히며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문장이 빚어졌다.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문장은 소리가 되지는 못해도 메아리는 되어 마음을 맴돌았다. 그 말이 몸 어딘가에 부딪힐 때마다 고통이 신음소리로 새어 나왔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고 보살펴주었는데 나만을 바라봐주지 않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고된 일이 끝난 뒤에 집에 들어왔는데 아내는 토마토나, 수저나, 저녁에 요리할 생선이 되어있으면 분명 즐거운 일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라서 그 감정을 눌러 담아야만 했고, 그것이 더 큰 고통을 낳았다.
아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까?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면 잘못이 나에게 있는 것만 같아질 것이 분명했다.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이라고 실토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일이고, 내게 문제가 생기는 일이다. 나는 남편으로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이토록 사랑했는데 잘못이, 문제가, 불합리함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그동안 어떤 기행을 벌여도 웃으며 받아줬는데 그 대가가 사랑받지 못함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래어서도 안되었다.
나는 비어져 나오는 감정을 눌러 담고 해결책을 찾으려 애썼다.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모루 위의 망치처럼 마음을 두드렸다.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뿐이었다. 그래야지만 아내와 나 모두가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붙들어 자존심을 지켰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몰입이 끝났다. 나는 다시 아내가 되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몰입이 끝난 뒤의 나는 긴 시간 수저나 토마토보다 고귀해지기 위해서, 식탁이나 돼지고기보다 사랑받기 위해서 애써왔던 남편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되어보는 것은 그를 아는 일인 탓에, 그가 어떤 고민과 고통 끝에 아이를 갖자고 얘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기에, 나는 차마 비난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는 것은 나라고, 그리고 나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네가 뭔데 나에게 이 문제를 마치 무슨 생선토막을 내어놓는 마냥 내 식탁에 올려놓느냐고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가 맞는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깔고 머저리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조금만 생각해 볼 시간을 줘. 지금은 대답하기 어려워.”
생각해볼 것 따위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았지만, 그렇게 비겁하게라도 한 발을 빼야만 했다. 남편은 조금 더 스스로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준비되면 알려줘.’ 나는 언제 준비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어제저녁의 일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요구-그에게는 사려 깊은 해결책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무례한 요구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와 힐난을 건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남편은 벌서부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화를 건네고 있었다. 그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전까지는 그저 장난스럽게 넘어갔던 몰입이, 대상이 되어보고 상상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놀이가, 이제는 부끄럽고 숨겨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무의식적으로 또다시 토마토가 되었던 나는 이제 범죄현장을 들킨 죄인처럼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떨고 있었다.
결국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올게. 샐러드 먹고 있어.”
남편은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혼자 먹으라고?”
그 말은 조금의 죄책감을 더 심어놓았지만, 나는 애써 담담히 말했다.
“응. 조금 걷고 뛰고 해야지 배가 고파질 것 같아.”
남편 역시 어제의 일을 염두에 두었는지 군말 없이 보내주었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오자 봄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꽃향기와 새들의 노랫말이 가득한 봄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면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감옥에서 풀려난 수인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 홀가분함 속에서 나는 마음껏 보이는 모든 것에 몰입했다.
나는 새가 되고 강물이 되었다. 그들은 돌아갈 집이 있음에도 때론 쏜살처럼, 때론 유수처럼 자유로웠다. 나는 세월을 삼키는 긴 이무기였다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화살이 되었다. 날고 흐르는 초월자들의 시선 속에선 사람의 삶이란 빨라도 너무 빠르고 느려도 너무 느린 것이었다. 그 무미건조함과 자극적인 것들 사이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벗어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새가 되고 강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하고 세월에 물었다. 더 높은 곳을, 더 대단한 자리를 갈망하는 그 의문들은 세월을 지치게 만들곤 했다.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었다. 강물이고 새인 지금의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실을 다시 잊고 대단하거나 위대한 것이 되기 위해 애쓸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돌아가고 싶지조차 않았다.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이 되고, 위대하고 불변하는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그 삶은 불변자의 시선에서는 구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가 되고 강물이 된 채로 머물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었지만 사람이지는 않은 채로 나는 날고 흐르고 있었다.
공원 강둑에서는 새로운 계절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벌과 지렁이와 개구리들이 산책로와 그 주변 갈대밭을 노닐었고, 조용했던 자전거 도로 위에는 어느새 운동하는 활기찬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활기에 물들어 잔디밭에 풀어진 채로 앉았다. 봄이었고, 봄은 수천수만 가지의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끽하는 것은 내 자유였다. 어디선가 올라오는 구리구리 하고 시큼한 냄새에 나는 그것도 봄이라고 여겼다. 아마 산책 중이던 견공께서 어디 근처에 실례를 하신 모양이었다. 견주는 배변 봉지를 가지고 나오지 않는 더 큰 무례를 저질렀던 모양이고, 개똥은 묽어지며 냄새와 끈적거림으로 변화하며 대지에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개똥이나 진흙이 되어보는 상상을 했다. 묽어지고 단단해지고 냄새나고 비천해진 나는 자괴감을 양분 삼아 피어나는 당당함을 만끽했다. 그것 역시도 봄이었다. 개똥 위에서 핀 진달래는 다른 꽃들과 똑같이 아름다웠다.
개똥이 되어본 것이 효과가 있기는 했던 것인 곧 작은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내게 덥석 다가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 공원에 있는 대부분의 강아지들이 작고 하얀 강아지이기는 했지만, 이 강아지에는 다른 강아지들과는 다른 멋진 특징이 하나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 강아지는 그날 내게 다가와준 첫 번째 하얀 강아지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었다. 아이를 갖는 것은 끔찍하게 두렵고 무거운 일인 반면, 강아지를 갖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어릴 적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어릴 적에 아기를 키워보지는 못했지만, 강아지는 길러보았으니 말이다. 여섯 살 때 마당에서 터주대감 행세를 하던 것은 찌끄만하고 똑똑한 갈색 강아지는 내겐 제일가는 친구이자 첫 번째 몰입 대상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어느 여름날에 나는 툇마루 위에서 그 아이가 되었었다.
강아지의 감정은 인간의 감정과는 달랐다. 인간보다는 훨씬 단순하고 큰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강아지의 감정은 앞뒤 없이 달려들어 또렷하게 사랑한다. 여섯 살의 나는 내 감정도 잘 모를 만큼 어렸지만, 강아지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불편해하지는 않았다. 여섯 살짜리 꼬마들의 순수함과 강아지의 감정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기 마련이다.
어디가, 가지 마! 혼자 두고 갈까 봐 무서워. 낑낑. 밥 줘! 밥 좋아! 밥 주는 사람 착한 사람! 근데 왜 이건 못 먹게 해? 그거 맛있어 보여! 나 그거 잘 먹을 수 있어! 멍! 나 짖었어! 근데 왜 화내? 무서워! 가지 마! 혼자 두지 마! 멍멍! 안 짖을게. 점잖아 질게. 쓰다듬어줘.
집에 혼자 남겨질 때의 두려움은 거대했으나, 가족이 돌아왔을 때의 행복은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싹트는 외로움을 매일 밤 묻고 달려가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눈을 맞추고 코를 비빌 때면 사랑에 대한 확신이 그곳에서 자라났다. 그것 의외에는 무엇도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은 강렬한 감정이었다.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은 멋진 것이었지만 그 역시 혼자서는 충족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홀로 맞서는 세계는 무섭고 두려운 곳이라 발걸음 하나 떼기도 어려웠지만, 가족들과 함께 나갈 때만큼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어주었다. 함께 나갈 수 있을 때마다 나는 지나치게 흥분하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신발을 빨리 신으라고 보채곤 했다. 막상 밖에 나오면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펼쳐질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코를 킁킁대며 내 것이 아닌 냄새들을 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존재의 본질에 다가서는 기분이었다. 그 냄새의 결을 따라서 세상 만물이 맞물려 있었다. 나보다 큰 개. 건강하지 못해서 성격이 나쁜 고양이. 더러워서 멍청한 비둘기. 말이 너무 많아서 쫓아버려야 하는 참새. 비겁한 인간. 웃고 있지만 무서운 사람. 사랑스럽고 두려운 인간들. 사람들. 그들. 세상에 넘쳐나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이들. 나는 강아지로서 그것들을 사랑하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매일 두려움을 행복으로 잊고 사랑하며 세상의 뿌리에 코를 부비곤 했었다.
공원에서 내게 갑작스럽게 안긴 하얀 강아지는 내게 강아지가 되어보았던 그 어린 나날들의 기억을 떠올리게끔 해주었다. 그 티 없이 맑은 눈 속에는 내가 보았던 것, 사랑했던 것, 되어보았던 것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강아지는 나를 보았고, 나도 강아지를 보았다. 그 순간, 다시 몰입이 일어났다.
하얗고 작은 강아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일가. 나는 온종일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작은 존재였다. 삶에는 공부할 것도 깨달을 것도 쟁취할 것도 없어서 나는 나 자신과 다툴 필요가 많지 않았다. 물론 때론 욕망이 자라나 마음을 물들일 때가 있기는 했다. 저녁밥이나 사랑하는 사람 (그 둘 사이에서는 저녁밥이 우선이기는 하다. 아주 약간일 뿐이지만.) 그리고 바깥 세계와 모험에 대한 갈망은 마음에 얼룩덜룩한 욕망의 그림자들을 그려놓기는 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생존이나 주거, 또는 꿈같은 것들이 갖는 위상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견고하고 분명한 욕망의 일종이었다.
때문에 작고 하얀 강아지인 나는 존재할 수 있음에 기뻐하거나, 소유한 것들 사이에서 의미를 찾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그저 건네어지는 것들에서 만족을 찾았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가 매일 돌아온다는 사실에, 밥을 주고 어루만져주고, 함께 밖을 거닐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나는 생존보다 큰 만족감을 느꼈다. 나의 작고 하얀 삶은 나쁘지 않아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 되지 않아도 매일 행복할 수 있었다.
멀리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 느껴졌다.
“봄! 이리온! 이쁜 언니 괴롭히면 못쓰지!”
나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나는 봄이었다. 작고 하얀 강아지였다.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봄을 안고 있는 나도 봄이었다. 아이를 가져야 하는지 고민하는 삼십 대의 여성이었다. 봄의 품에 머물러있는 것이 봄이라면 이 감정들은 어느 봄의 것일까. 내가 지금 머무르는 이 곳은 누구의 봄인 걸까. 이대로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은 걸까. 모든 것에 만족하고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아도 괜찮은 채로 봄일 수 있을까. 봄이 그대로 이어져도 좋을까. 매일 주어지는 것들에 안주하여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면 나는 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는 한 걸까.
빙글빙글 도는 세상 속에서 내가 스스로의 몰입에 갇혀버리기 전, 강아지의 주인은 내게 미안한 말투로 사과했다.
“아유, 미안해요 아가씨. 우리 봄이가 예쁜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 그만. 잠시 끈을 놓쳤는데 아가씨에게 달려가버렸네요.”
나는 봄의 주인에게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도 봄이라고, 봄을 만나 기뻤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봄이 봄을 보며 어느 봄이 더 나은지를 고민했다는 것은 철학자들의 악몽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순적 문장들로 의미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울 수 있었으나, 그것을 봄의 주인에게 알려주어 닿을 수는 없었다. 나는 봄을 다시 보았다. 나는 그 봄이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봄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스스로를 조금 더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낳거나, 갖거나, 보거나, 키우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 되고 싶은 나는 분명 봄이었다. 그것 만큼은 변하지 않을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얀 봄과 그 주인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보아서, 되었다. 강물을 보면 강물이 되었고, 하늘을 보면 하늘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보면 아이 밖에는 될 수 없을 것 역시도 알았다. 아이를 본 순간 나는 아이가 될 것이고, 어머니가 된 나를 볼 것이며, 그 위대한 순환의 일부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 두 개의 봄은 영원토록 순환하며 인간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되지 않은 채 아이를 볼 방법도 없고, 아이가 되지 않은 채 어머니가 될 방법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환은 변화가 사라진 채로 지금의 나를 잃는 과정이기도 했다. 강물은 내가 강물이 된다고 해도 변하지 않고 흐르고, 하늘은 내가 하늘이 된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고 지지만, 아이가 되거나 어머니가 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있기에 괴로워하고 행복해하고 불안해하고 흔들렸고, 어머니는 아이가 있기에 괴로워하고 행복해하고, 불안해하고, 흔들렸다. 그 둘은 한 몸이었다가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는 기묘한 순환을 이룰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몰입하는 것, 다른 것이 되어보는 것은 기묘하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 의외의 것에 대한 동질감으로 연결을 지속했고, 이질감으로 나 자신을 구분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흐르는 강물 속에서 나 자신을 느껴 강물이 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내 안에서 흐르지 않는 암석 같은 부분들을 발견하며 강물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했던 셈이다. 같아서 닮을 수 있고, 달라서 이해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공감이라는 선물을 나에게 건네주었던 셈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몰입하고 구분 짓고 발견해나가며 세상 다른 모든 것들이 되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남편이 어제 내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아이는 너의 안에서 자라서 너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잖아. 너의 일부이고 너 자신인 거야.’
그 잘못된 말을 다시 되새기면서야 나는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몰입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해서 생기는 불안증상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다가서려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이었던 셈이다. 아이는 남편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의 일부이지도, 나 그 자체이지도 않았다. 아이는 나를 찾는 수단이 될 수도 없고 내게 어머니의 역할을 강요하는 굴레와 억압의 원천도 아니었다. 나는 달라서, 그리고 비슷해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고, 그것은 아이도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나는 그제야 몰입이 상대방을 이해하여 나도 함께 이해되는 과정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비록 남편이 한 말들이 옳지 않고 내게 큰 괴로움을 남겼을지언정 그에게 화를 내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나를 이해했고, 그렇기에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슬픔과 불안과 외로움이 있었기에 나의 슬픔과 불안과 외로움도 이해될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해했기 때문에 나는 남편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세상 모든 용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이루어진다. 이해할 수 없기에, 공감하고 납득할 수 없기에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싶은 일을 용서하지는 않는다. 이해하고 납득할 뿐이다. 하지만 ‘나라면 전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싶은 흉포하고 무도하며 잔인하고 비상식적인 데다가 비인간적인 일들에 대해서라면 용서할 수도 있다. 납득할 수 없기에 용서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용서를 해서라도 내려놓지 않으면 사람은 증오와 괴리에 불타 들어가며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괴물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용서하는 대신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방식대로 다독인 것이었고, 이제는 나 역시 나 나름의 방식대로 나를 다독일 차례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봄을 보았다. 봄은 꽃과 들과 나비와 활기로 가득했다. 나는 봄을 들이마셨다. 봄 안의 꽃가루가 콧속에 맺혀 재채기가 나왔다. 우렁찬 재채기 소리와 함께 봄이 내 안에서 튕겨져 나왔다. 튕겨져 나오지 못한 부분은 영글어 내 안에서 봄이 되었다. 나는 봄을 보았다. 그리고 봄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을 보며 봄이 되었고, 그도 나를 보며 봄이 되었다. 모두가 봄이 되었다. 아무 말 없이, 의외로 안심한 표정으로 저녁을 만드는 남편의 표정 속에는 분명 봄이 있었다. 모두가 봄을 보고 있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