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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Nov 17. 2019

그들만의 작은 천국 사잇야기

사잇야기 : 동창회


사잇야기 : 동창회




그날 그와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었다. 고통의 정원을 알려주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그들만의 작은 천국에서 우리를 다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눈 터라 시간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삶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약간의 접점과 자그마한 이해가 서로 사이에 싹텄지만 그것이 내 궁금증을 모두 해소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내게 들려주었고, 조용했던 자신을 이야기로 가득 채웠지만, 그것이 그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본질이 궁금했다. 내 눈에 그는 여전히 이상했고, 특이했으며, 특별했고 나는 여전히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결혼을 했고, 그는 계속 말없이 삶을 살아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서로 다시 마주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가 그를 다시 마주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둘 다 서른이 넘어서 우연찮게 작은 동창회를 갖게 되었을 때였다. 



     




아이들과 다시 만난 것은 어느 평범한 금요일 저녁이었다. 저마다의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아이들은 우연찮게 K에게 연락을 받고 한 자리에 모였다. K는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반장이었는데, 맡은 일들을 책임감 있게 척척 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나 좋아하는 친절한 성격을 지닌 아이였다. 우리가 모두 모이게 된 것도, 그런 사교적인 자리에 잘 나타나지 않는 그가 의외로 나타난 것도 어쩌면 K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강의 북쪽, 번화가 구석의 조용한 뒷골목에서 만난 우리들은 간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십 대의 추억을 간직한 채였지만 어느덧 삼십 대에 들어선 채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 모두를 약간 겸연쩍게 만들었다. 아직도 내면은 어설프고 순진하여 십 대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는데, 우리의 행동은 사회에 닳고 닳아서 웃기면서도 서글펐다. 우리의 이십 대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 아파하고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서 쓰였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고통을 갈무리한 채 웃음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그것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는 조금 늦게 나타나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다들 연락은 하고 지내는 것인지 시끌벅쩍한 환영인사나 격한 반가움은 없었다. 그를 몇 년 만에 다시 본 것인지 확실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흘러있었다. 4년? 5년? 조금이라도 이해에 가까워졌던 것이 어제 같은데 서로의 삶 속에서 표류하는 사이에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가끔 부드러운 미소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이야기에 화답했다. 나는 그때, 마주 앉아서 서로 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순간이 조금 그리워졌다. 만약 그날 서로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의 이상함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주제는 친구들의 연애 이야기로 바뀌어 열띤 토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와는 정반대로 갈굼은 되려 K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P는 H 하고 캐나다로 이민 가서 결혼한다고?”     

 K의 사람을 갈구는 능력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유구히 발전한 능력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K는 사람을 되려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을 어려워하여 부반장을 하던 다른 친구가 대신 화를 내거나 윽박질러주는 일들이 많았다. 복도에서 부반장이 K에게 ‘네가 애들한테 모진 말을 못 하니까 내가 맨날 뭐라고 해야 하잖냐. 잘 하자 좀.’ 하고 말하던 것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때는 K가 무섭다기보다는 그 부반장이 회초리를 든 학생주임보다도 무서웠었다.       

그때 이후로 K는 연습이라도 몰래 한 건지 사람을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갈구는 능력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뤘고, 이젠 사람을 몰아붙이면서도 되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 줄 알았다. 나는 그것이 K가 늘 갖고 있던 반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K에게 지적받은 P는 직장상사에게 업무로 갈굼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해명했다.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애걸복걸하는 P의 모습은 고등학교 때와 똑 닮은 것이라 나는 약간 안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유수의 세월과 시간의 끔찍함을 겪었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만 바뀌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화의 방식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O의 장난스러운 다음 말로 분명해졌다.     

“엇? 너희 둘이서 캐나다로 간다는 거였어? 결혼계획이 좀 빠른데?”     

상대방의 항변을 못 들은 척 넘어가는 것과, 한술 더 떠어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대화의 전통이었고 나는 웃으며 술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나는 다만 그들이 갈구는 대상이 내가 아닌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지금이야 P를 놀리고 있으니 내가 밥이라도 먹을 수 있지만 저 놀림의 화살은 언제 나한테 돌아올지 모르는 것이었다. P를 물고 뜯다가 심심해지면 저 장난스러운 돌멩이들은 그 어떤 개구리를 향해 날아올지 알 수 없었고, 혹시나 그 개구리가 내가 될지도 모르니 미리 든든히 먹어두어야만 했다.     

그건 나에게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역시 마찬가지인 일인 것 같았다. 그 역시 대화에는 별반 집중을 하지 않는 눈치였고 대신 눈 앞의 음식을 먹는데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먹고, 생존하기 위해 그 중요한 대화의 대부분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넘어가고 말았다.   
  

O는 신이 나서 계속 H와 P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만우절에 고백을 했느니, 그러니까 지금 만나는 것이 만우절 농담 같은 것은 아니니 하는 질문들이 등장했다. 나는 O의 기자정신과 취조 능력에 감탄하기는 했지만, 귀를 기울여 듣지는 않았다. 만우절날 고백은 고등학교 때도 있었던 일이었고, 그런 일을 저지른 아이들은 그 뒤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토록 놀림받곤 했다. 그 한 번의 실수로 십 년쯤 놀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어느 누구도 만우절에 고백을 하는 황당한 선택을 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O가 갈구는 내용이 분명 장난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화는 어느새 누가 먼저 고백했냐, 성격상 H가 먼저 고백한 거 아니냐, 하는 내용으로 발전해 나갔고, 나는 이 아이들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엔 없었다. 15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 주제라니! 정말 이 아이들은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비가 없다. 하지만 결국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진짜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왜 안 만나?’하고 말했던 나는 그 순간 H와 P의 흔들리는 눈빛이 나를 향하는 것을 보며 ‘아,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그 역시 아무것도 몰랐던 모양인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음.. 이거 어디까지가 농담이었던 거야?”
"야 뭐야 ㅋㅋ너네 정말로 몰랐던 거야? 우린 너네도 이미 알고 있어서 조용히 있는 줄 알았는데ㅋㅋ”

“어... 음... 난 아직까지 만우절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둘이 만난다는 거야?” 

H와 P는 부끄러워했고,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하며 설명해주었다. 둘이 이미 만나고 있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2년이나 지났는데 이제와 서야 신생 커플이 되었다고 말이다. 나는 꽤 흥미롭다고 생각했고,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아이들은 그에게 물었다.


"너 왜 대화 하나도 안 듣고 있었어? 무슨 일 있어?"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 말은 하도 헛소리가 많아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이젠 알 수가 없거든. 너희 둘이 이제 와서 서로 좋아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 리람."


그러자 아이들은 모두 맞다고 깔깔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그 부딪힘에는 신생 커플에 대한 축하의 의미도 들어있었고, 모일 수 있었던 우리에 대한 찬탄의 의미도 들어있었으며,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에 대한 경외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나는 어쩌면 이 곳도 우리들만의 작은 천국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 죽었다고 생각한 불모지에서도 꽃은 피고, 다 끝나서 굳어져버렸다고 생각한 관계 속에서도 애정은 움틀 수 있었다. 그리고 다 들어버려서 더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도 이어질 수 있는 법이다.


K는 돌연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 혹시 용이 기억나?"

"용? 무슨 용인데? 흑룡? 백룡?"

"아니 아니. 김용 말야."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사조영웅전?"

"아니 그 김용 말고 이 정신병자야. 우리 같은 반이었잖아 용이랑. 그 왜 깡마르고, 엄청 예민하고, 성격 나쁘고, 불만 많고, 눈도 더럽게 안 좋았던 애."

"아 나 누군지 기억날 것 같아! 근데 넌 용이를 정말 싫어했던 모양이구나. 묘사가 거의 뭐..."
"아니 뭐 싫어한 건 아니고. 걔는 항상 불만이 많았는데 나는 반장이라서 불만을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었거든."

"그럴 만도 하지. 근데 걔 뭐?"

"용이 다음 달에 결혼한대."

"걔가? 그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으로 어떻게? 그걸 받아주는 의인을 찾았나 보구나! 역시, 누구에게나 의인 하나쯤은 있다더니."

"내가 사실 지난주에 용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거든, 근데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더라고. 그래서 내가 물어봤지. 어떻게 된 거냐고, 바뀌어도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냐고, 사람이 확 바뀌면 죽는다고 하던데 죽는 거 아니냐고, 죽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K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4번째 이야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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