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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Nov 17. 2019

그들만의 작은 천국 4화

가을 단편소설집 네 번째 이야기 : 거울테


네 번째 이야기 : 거울테    
      





그는 성격이 나빴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보는 것마다 불안해했고, 닿는 것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눈이 나빴던 탓에 두꺼운 안경을 써야만 했던 그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참 많았다. 잘 볼 수 없는 것들은 때론 너무나 두려운 것이 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때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날카롭게 째려보며 얘기해야만 했다. 잘 안 보인다고, 잘 모르겠다고. 나한테 물어보지 말라고 말이다. 그 불확실성은 그의 불만을 키웠고, 불만은 그의 성격을 더럽게 만들었다.


그의 눈에는 만족스러운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찬사를 건네는 꽃도 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이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영화도 그의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있다는 여행지도, 즐겁다는 놀이동산도 그의 눈에는 다 흐릿하고 부정확한 형체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흔한 짝사랑 한 번 해보지 못했었다. 눈이 잘 보이질 않으니 예쁜 것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무엇이 배려인지도 몰랐던 셈이다. 모든 것이 흐릿한 그에게는 날카로운 것, 날카로울지도 모르는 것, 날카로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만 분류되었다. 그는 날카롭고 선명한 것들을 꿈꾸며 스스로 날카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 어느 누구도 날카로운 것에 베여가며 사랑에 빠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불만과 짜증 가득한 채로 불편함과 불안함 가득한 세상을 살아갔다. 사랑과 배려가 빠진 날카롭고도 날카로운 곳이 바로 그 자신이었고 그의 세상이었다. 그는 아마 성격이 나쁠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천국이 하나쯤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천국은 목욕탕이었다. 하루 일과를 끝마친 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자 행복이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는 적어도 목욕탕에 들어앉아 있는 순간만큼은 불만이 사라지곤 했다. 일종의 행복이 찾아오는 장소였던 셈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한 적은 없지만, 그는 목욕탕에 오면 자신이 똑똑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똑똑함이 예민함을 잦아들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편안해지는 거라고 말이다. 그것은 그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왔다 갔다 할 때면 일어나는 아주 신비로운 일이었다. 몸이 발갛게 익을 때까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가 등골이 서늘해질 때까지 차가운 물속에 잠수를 하다 보면 기묘한 느낌과 함께 감각이 고조되었다. 마치 집중력이 고형화 되고 생각이 투명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 속에서 그는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세상을 마치 만지듯 느낄 수 있었다. 무엇도 보이지 않았지만, 온 세상이 그에게 와 닿았던 셈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순히 혈액순환이 잘 되어서 느껴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그는 몇 번 명상과도 같은 경험을 한 뒤에 확실히 깨달았다. 그건 단순히 몸상태가 좋아지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는 목욕탕에서만큼은 현명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목욕탕에서 행복해지는 방식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진다거나, 고민들이 해소된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 순간의 그는 생과 사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도 되어볼 수 있었으며 그 무엇에도 휘둘리거나 억압당하지 않은 채 자애로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그를 화나게 했던 사람들이나 일주일 내내 그를 괴롭혔던 고민들마저도 목욕탕 안에서는 곧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우주의 이치를 관조하는 그에게 인간적이고 편협한 다툼들은 그 마수를 뻗칠 수 없었던 셈이다. 물론 그 현명함은 목욕탕을 떠나서 머리를 말리는 와중에 모두 증발하여 사라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가 잠시 현명해질 수 있는 시간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수증기와 빛번짐 때문에 안 그래도 안 좋은 시야가 더 제한되기는 했지만 목욕탕 안 만큼은 보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장소였던 셈이다.

그가 그만의 작은 천국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사실 아주 사소한 사건 때문이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은 아마 그날따라 목욕탕이 어린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까스로 퇴근을 한 그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생각에 기대에 부푼 채 목욕탕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곤 열명 남짓한 초등학생들이 아주 시끄럽게 물장구를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들은 어찌나 시끄러웠는지 그는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조차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아주 큰소리로 호통을 쳐야만 했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시끄러워! 조용히 못해?"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자신의 훈계에 한껏 고취되어 말했다.


"여긴 사람들이 다 같이 쓰는 장소인 거 몰라? 시끄럽게 놀 거면 나가서 놀아!"


아이들은 곧 풀이 죽은 채로 하나씩 둘씩 탕을 떠나기 시작했고, 그는 가까스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해야 될 일을 한 거라고, 아직 뭘 모르는 아이들에게 따끔하게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물의 온도를 따라 몸이 따뜻해질수록 그는 다시금 현명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스스로 저지른 어리석은 짓에 대해 후회를 하게 되고 말았다. 아이들도 놀고 싶었을 텐데. 목욕탕에서 친구들과 물장난 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나도 저렇게 어린아이였고 저렇게 목욕탕에서 놀곤 했었는데, 내가 뭐라고 그들을 나무랐을까. 내가 왜 그들을 그렇게 혼내고 가르치려고 들었을까. 내게 그런 자격이 있기나 한 걸까. 현명함이 불러들이는 첫 번째 친구는 자기반성이었고, 자기반성은 곧 타인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결국 그는 목욕을 채 즐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머리만 후딱 말린 뒤에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의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스러워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흉물스럽고 불만스러운 피조물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모든 부분들이 다 싫었다. 멍청하게 생긴 눈과 쭉 찢어진 입, 커도 너무 큰 귀와 절구통 같이 둥근 코. 팔다리는 너무 짧았고 배는 너무 툭 튀어나온 것 같았다.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고 동작은 한심하리만큼 어설펐다. 그는 거울을 마주 볼 때마다 푸석푸석한 괴물을 마주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날은 무언가 달라도 한참 달라 보였다.


처음 언뜻 보았을 때는 아침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의 괴물이 그를 반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흘깃 보던 시선을 돌려 정면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의 그의 모습은 조금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더니, 조금 반짝거리며 희미해지더니, 보기 좋은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그것은 형태나 외양이 변하는 것과는 다른, 마치 경계가 사라지는 것 같은 일이었다. 부드러운 눈매와 웃는 듯한 입. 복스럽게 큰 귀와 부처님 같은 코. 팔다리는 귀엽게 짧았고, 배는 갓 식사를 마친 강아지의 배 같았다. 어느덧 거울 속에는 편안한 표정을 지은 채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것 같이 생긴 남성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사랑받을만한 얼굴이었고, 그가 생각하던 자기 자신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그 자신의 모습이기는 했다. 당황한 그는 거울을 더듬으려고 했지만 곧 거울의 테두리마저 흐물흐물해지더니 아예 테두리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안경을 찾아 사방팔방을 더듬었다.           


"안경! 안경이 어디 있지!"


하지만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안경 역시 거울 테두리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안경을 목욕탕에 두고 나온 것일까 봐  난리법석을 떨며 세 번이나 탕 안으로 들어가 온통 헤집어놓았지만 (그 와중에 할아버지 한분이 호통을 치셨다. "여긴 사람들이 다 같이 쓰는 장소인 거 몰라? 시끄럽게 굴 거면 나가!")  안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목욕탕의 지배인과 세신사와 관리인까지도 그를 도왔지만 안경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안경이 없으면 눈뜬장님 신세가 되는 그는 크나큰 겁에 질렸다. 이미 저녁시간이 한참 지난 터라 근처에 열려있는 안경집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사는 아파트는 이 목욕탕 같은 건물 12층이라는 사실 정도였을 뿐이다. 그는 어떻게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흐릿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 세상을 헤매어 간신히 목욕탕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찾기 위해 벽에 딱 달라붙어서 조심스럽게 걷던 그에겐 작은 행운이 하나 찾아왔다. 그동안 그가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지하상가의 작은 매장들 사이에서 '안경집'이라고 쓰여있는 사인이 보이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는 절박함에 보이는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찌푸렸다가 문질렀다가 해보니 안경모양의 간판이 걸려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다시피 하여 안경집을 찾아갔다. 


안경집 안에는 늙수그레한 중년 남성이 문을 닫는 중인지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요. 정말 죄송한데요. 누가 목욕탕에서 제 안경을 가져가서요."


중년 남성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지금은 문 닫을 시간이라서 안돼요. 내일 아침에 다시 와요."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눈이 진짜 나빠서 이대로는 집에도 못 가가지구요. 혹시 비슷한 도수의 안경이라도 빌려주실 수 없을까요? 내일 안경 맞추러 오면서 꼭 돌려드릴게요. 안경 대금도 미리 치루고요."


남성은 그제야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는 얼굴 앞에 뭐가 지나가는 듯한 바람과 희끄무레한 형체를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안경가게 주인은 말했다.


"정말 하나도 안 보이는 모양이구먼? 그러다 사고 나겠는데?"

"그러니까요. 지금 앞이 거의 안 보이는 수준이라.. 시간이 늦은 건 알지만 한 번만 도와주실 수는 없을까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리 와서 앉게."


안경집 주인은 그를 시력 검사하는 기계 앞에 앉아서 몇 가지 검사를 후딱 하더니 말씀하셨다.


"이건 내일도 안 나오겠는걸. 안경알을 네다섯 번은 압축해야 할 정도야. 내가 본 눈 중에선 가장 나쁘구먼."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타고 난 눈인데. 그래도 아저씨 안 계셨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한 3일 있다가 찾으러 오도록 할게요."

"그려, 그리고 오늘은 일단 이거라도 쓰고 가고."


그 말을 하면서 안경집 주인장께서 내어놓으신 것은 황금색의 둥그런 안경테였다. 마치 머리에 번갯불 모양의 흉터라도 나있는 마법사나 쓸 것 같은 안경이었지만, 그에겐 이것저것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안경을 눈에 씌웠고, 곧 흐릿했던 세상이 부드럽게 초점이 맞아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해보았고, 임시방편치곤 생각보다 잘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했다.


"와! 이거 꽤 잘 맞네요. 아저씨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긴 뭘 대단해. 우연히 잘 맞은 거지. 적당히 비슷한 도수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오래 끼면 눈 나빠지니까 사흘 뒤에 와. 그때 제대로 된 거 줄게."

"감사합니다. 얼마죠?"

"나도 몰라."

"예?"

"이렇게 높은 도수는 안 만들어봐서 일단 만들어봐야 혀. 다섯 번 압축하면 알 값만 한 사오십 만원 나올겨. 가지러 와서 계산해." 


어차피 안경 비싼 것이야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숙명이었고, 그는 이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감사하며 안경집의 연락처를 받아갔다. 감사하는 마음이 워낙 컸던 덕분에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시원하게 맥주 한 캔을 들이켜고, 따뜻하게 전기장판을 킨 뒤,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은 다음날이 되고서도 한참 뒤, 출근길에 올라서였다.




그는 조금 늦게 일어났고, 급하게 준비하며 나와야 했다. 어젯밤 마신 맥주가 조금 취하게 만들었던 모양인지 알람 소리를 살짝 놓친 상태였다. 덕분에 거울도 제대로 볼 새 없이 부리나케 나온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와중에 살면서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그의 옆에서 기다리던 고등학생은 그가 여태껏 살며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멋지게 생겼는지 그는 잠시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 의구심마저도 들었을 정도였다. 여태껏 여성을 보면서도 그렇게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두근거릴 정도로 멋져 보인 사람이 남성이라니! 하지만 그런 감정은 잘못된 일이었고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아야 했다. 잘못된 점은 분명했다. 그가 좋아하는 대상이야 당연히 남성일 수도 있고 여성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미성년자일 수는 없었다. 그는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남학생의 얼굴에서 눈을 떼었다가 붙였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곤 1층에 내려서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의 눈 앞에는 어디 미남미녀 대회라도 열린 것인지 온통 기가 막히게 잘생기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한가득 돌아다니고 있었다. 벤치에 걸터앉아 신문을 읽으시는 아저씨는 중후한 매력이 영화배우도 뺨을 때릴 것만 같았고, 강아지와 함께 조깅하는 중년의 여성은 어찌나 멋져 보이는지 잡지에서조차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성을 따라 뛰는 강아지는 털이 어찌나 새하얗고 보드라운지 봄 하늘의 온갖 구름과 햇살을 다 빚어서 만들어놓은 것만 같을 지경이었고, 저놈의 까치는 어쩜 저리 아름다운 색채의 깃털을 지닌 건지! 그는 잠시 안경을 벗어서 눈을 세게 비비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세상이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아침햇살은 마치 향기처럼 대기를 꿰뚫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느껴질 것 같은 그 선명한 부드러움에 그는 잠시 코를 벌름거렸다. 구름들은 상상도 못 한 신수들의 형태로 착하디 착한 하늘의 허리를 휘감았고, 가로수들은 천상의 신들처럼 그 잎사귀로 가냘픈 춤을 춰댔다. 차선은 완벽했고, 자동차들은 너무나도 날렵하고 예술적이었으며, 날씨는 따뜻한 데다가 선선한 데다가, 지나가는 유치원생은 너무나도 - 그는 더 이상 생각하면 범죄가 될 것 같아서 유치원생에 대한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 세상은 빛과 행복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낙원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잠이 덜 깨서 그런 거라고 믿으며 가까이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평소에도 그가 담배를 사러 자주 오던 가까운 편의점이었다. 그는 이 시간에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고, 그동안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르바이트생은 그가 들어오자 환하게 웃으며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잘 주무셨어요?'하고 인사해주었고, '말보러우 레인보우 하나만 주세요'라고 말하려고 했던 그의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그에게 웃어주는 아르바이트생의 모습은 마치 햇살이 가장 아름다운 모래사장에서 뒹굴다가 조개껍질과 파도 거품과 뒤섞여 여신이 된 채로 성녀의 반열에 올라 대리석으로 빚어져서 영혼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된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는 살면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완벽하고 숨결을 빼앗을 정도로 이지적이며 강인한 생명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컥컥거리며 숨결을 되찾다가 겨우겨우 말 한마디를 꺼내어놓았다.


"너.. 너무 아름다워요.."


그가 기껏 꺼내놓은 말은 고작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수준인지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미간을 찌푸리고 짜증을 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의 짜증 섞인 표정에 그는 아주 조금 정신을 차릴 뻔했다. 하지만 정신이 미처 다 돌아오기 전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을 보고 그것이 태곳적부터 존재하던 유려한 협곡과 별똥별 자국과 어머니의 사랑의 깊이 같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그의 눈에는 그녀가 햇살의 여신이 지상에 강림해 진주로 인간을 빚은 것만 같았다.) 결국 아르바이트생은 화를 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녀의 싸늘한 표정과 그에 상반되는 뜨거운 분노는 그에게 갖가지 매혹을 불어넣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니! 앗!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정말 예쁘셔서요!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게 너무 예쁘시네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 여자들이 화가 났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여러 만화영화에서 봤었지만, 그 말을 믿지는 않곤 했다. 낯선 사람의 무례를 예쁘다는 칭찬 한마디에 용서하는 단순 무식한 (혹은 칭찬에 미쳐있는) 사람이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이런 쓸데없는 곳에서 맞아떨어져서 아르바이트생은 이제 상당히 모욕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코가 분노로 벌름거리고 (어찌나 예쁘게 벌름거리는지 갓 태어난 강아지 같았다) 눈썹이 한껏 하늘로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며 (어찌나 말도 안 되는 완벽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지 그는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이 세상은 만화영화와는 전혀 같은 점이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진짜 무례하시네요. 굉장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시는 거 아세요? 몇 번 담배 사실 때 뵜었어서 인사해드린 건데, 이러시면 곤란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잘 설명이 안되는데, 오늘 진짜 너무 예뻐 보이 셔서요."

"나가주세요."

"네?"


알바생은 그를 매몰차게 문 밖으로 밀어붙이면서 말했다.


"나가주셔달라구요! 저 남자 친구 있어요!"


그는 딱히 그런 게 아니라고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아름다운 강인함에 떠밀려 편의점 밖으로 밀려 나와 버렸고, 그러자 또다시 숨 막히게 멋진 가을바람과 너울대며 춤추는 햇살이 그의 넋을 가져가 버렸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햇살을 바라보며 헤실헤실 웃는 그의 모습을 팔짱을 낀 채로 지켜보던 아르바이트생은 한숨을 내쉬고 혼잣말을 했다.


"어쩌다 저렇게 정신이 나갔담. 진짜 별 일 다 있네." 







그의 하루는 정신 나간 아름다움으로 가득해져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 기괴한 현실 속에서 여태까지 살아오며 가졌던 불만과 불안이 어떤 것이었는지 되살리기 위해 급급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고, 시간이 지날수록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사실은 모든 것이 아름다워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거울 속의 그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도 성형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더 잘생겨지거나 아름다워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외양은 변화가 없었다. 만져보아도 촉감이 그랬고, 주변 사람들이 그를 아무런 문제 없이 알아본다는 점에서 역시 그랬다. 다만 변한 것은 그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인 것 같았다. 그는 이 상태가 마치 목욕탕에서 현명해지고 행복해졌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은 것처럼, 마치 만물의 본질을 다 이해한 것처럼 그는 세상을 온통 아름답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싫어했던 모든 것들이, 불결하고 끔찍하고 모자라고 불완전해 보였던 세상 수많은 일들이, 지금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숨을 쉬듯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하고 빼야 할 점 투성이었던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진 이유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고심 끝에 어제 안경집에서 받은 안경을 빼 보았다. 세상은 흐릿해졌고, 온갖 테두리가 다 사라져 서로 섞여 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마냥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형체를 알 수 없는 혼돈을 잠시 응시했다. 그동안 그 희끄무레한 혼돈은 그에게 불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평온하게, 아름답지도 두렵지도 않은 상태로 그를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안경을 껴보았다. 혼돈의 형체들은 저마다의 테와 틀을 갖춰나가더니 다시 온통 아름다워져 버렸다. 그는 무엇하고든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괴이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그 느낌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날, 그는 일이 끝나고 다시 편의점을 찾아갔다. 다행히 아르바이트생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고, 그는 머뭇거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훔쳐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침과 똑같이 아름다웠고, 오후의 태양이 한밤의 북극성을 만나 춤을 추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는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있었다. 아름다워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게 된 것임을 자신에게 되뇌며 그는 편의점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 읍!"


아르바이트생은 인사를 하다가 말고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머쓱해하면서 인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사과드리려고 왔어요."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몇 날 며칠을 마주쳤지만 그동안 몰랐던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제야 하나씩 인식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긴 속눈썹. 오후의 버드나무 같은 옅은 갈색의 눈동자. 작고 하얀 손, 여리여리한 손가락. 갸르스름하고 둥글고 곧은 그녀의 모든 부분들이 이제야 그의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선명하게, 그녀의 테두리들을 직시하며 그는 말했다.


"제가 어제 안경을 새로 맞췄거든요. 그런데 그 안경이 성능이 너무 좋았나 봐요. 사람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이는 거 있죠! 그래서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이 말도 안 되는 말에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예뻐 보이신다니 좋으시겠어요."

"예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선명하게 보이나 봐요. 그 전에는 안 보였던 좋은 부분들이 참 많이 보이네요."

"저도 안경이라도 새로 맞춰야겠어요. 무척 좋아 보이는데요?"


그는 대화 속에서 평생을 쌓아온 불안과 절망, 예민함과 날 선 생각들은 마침내 그를 떠나 푸른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불안했던 것은 아마도 잘 보지 않아서였던 모양이었다. 잘 들여다보지 못해서, 선명하고 깊게 보지 않아서, 모르고 불안하여 불만을 가졌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제가 그동안 형편없는 안경을 써서 몰라 뵈었었나 봐요. 아침엔 너무 무례하게 말했지만, 지금은 좀 더 잘 표현해보고 싶네요. 어.. 음... 되게 예쁜 부분들이 많으세요. 특별해 보여요. 뭘 어떻게 해보려는 건 절대 아니고요, 사과를 드리고 싶었어요. 이제야 봐서 죄송합니다. 나의 이 쓸모없는 눈깔들!"


그녀는 그의 사과와 농담에 살포시 웃었다. 그리곤 농담으로 맞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예뻐 보이셔서 저도 그렇다는 거죠? 그것 참 아쉽네요."


그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애써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금은 친근해진 미소로 그를 대했다. 


"말보로우 레인보우 필요하신 거 맞죠? 항상 그것만 사가시던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뇨. 이제 조금 바뀌어보려고요. 그건 그렇게까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담배를 내려놓는 그녀의 손길이 어쩐지 조금 즐거워 보여서 그는 조금 기뻐지고 말았다.






이틀 뒤, 그는 마침내 안경집을 찾아갔다. 그리곤 아저씨께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감사드렸다. 안경을 빌려주셔서 감사했다고, 원래의 안경보다 이 안경이 훨씬 더 잘 맞아서 세상의 참 면모를 볼 수 있었다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본질을, 모든 것의 본래의 성정과 태곳적의 매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안경이 선명하게 잘 맞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자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하셨다. 아마 아닐 거라고, 그 안경은 초점이 맞지 않아서 선명했을 리가 없다고 말이다. 더 선명하게 보이기는커녕 더 흐릿하게, 테두리마저 분간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라 아마 눈뜬장님처럼 다녔던 것일 거라고 아저씨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그에게 새로운, 잘 맞는 초점의 안경을 주셨고, 그는 선명한 시야 속에선 더 이상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의 테두리 너머를 볼 수 있었고, 그 테두리가 흐릿해질 때면은 그 이면의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잠시 선명한 눈을 감고 흐릿한 눈을 뜨는 것뿐이었다. 세상은 마치 목욕탕 속의 풍경처럼 뿌옇고, 흐릿했지만 이제 그것은 불안이 아닌 행복이었다. 그는 안경집을 나서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곳은 그의 새로운 낙원이었다. 온 세상이 그의 새로운 천국이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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