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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Nov 17. 2019

그들만의 작은 천국 6화

가을 단편소설집 : 여섯 번째 이야기 : 이별여행

  


사잇야기 : 깊은 밤






어느덧 밤은 깊고 아이들은 한 명씩 각자의 이유로 떠나갔다. 내일도 출근이어서, 가서 마쳐야 할 잔업이 있어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너무 피곤해서, 무겁고 불편한 삶의 이유들에 그들은 저마다의 작별인사를 말했다. 짧게 인사해야 다음 만남이 가까워진다는 이유로 우리는 단촐한 인사만을 서로에게 건넨 채 배웅마저도 하지 않았다. 열두 시가 되자 남은  것은 고작 네 명뿐이었는지라 우리는 조용하고 고즈넉한 골목길 술집으로 대화의 장소를 옮기기로 마음을 먹고 길거리로 나왔다.     

여러 명이서 시끌벅적했던 상황이 끝나자 나는 마침내 그와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말을 할 때에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일대일로 말을 거는 상황에선 마냥 침묵을 지키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오랜만이라고 말했고, 그는 그렇네 -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술집에 들어서자 다른 두 명은 주식에 관한 무슨 심각한 얘기라도 하는지 맥주 한 잔씩 시켜놓고 그들만의 이야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돈과 시장논리에 대한 이야기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던 나와 여전히 말이 없던 그는 서로 마주 보며  간간이 소식이 들려오는 친구들에 대해서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석양이 얘기 들었어? 벌써 애가 둘이래! 단호는 세계 일주를 떠났다고 하던데 부럽더라. 길하는 하고 있는 사업이 잘 된다던데 언제 한번 찾아가 보려고. 나는 걔 별로였어. 예전부터 허세가 많은 아이였잖아. 우린 다 그랬지 어렸는걸. 걘 특히 더 그랬어.  
   

나는 그에게 성희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지 물어보았고,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인연들은 혜성처럼 강렬하고 동화처럼 몽환적이지만 그만큼 쉬이 흘러가는 법이다. 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이야기를 거듭했다. 삶이 그렇게, 인연이 그렇게, 시간이 그렇게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는 이제는 선생님이 되었어. 정말? 그 성격에 어떻게 선생님이 된 거야? 가르치는 아이들이 벌써 서른 명이 넘는대. 대단하지? 걔는 또 어떻고. 아프리카로 선교활동을 갔다는 거 들었어? 머나먼 바다 건너에 정착한 아이들도 많고, 이제는 다시는 못 볼 곳으로 떠나간 아이들도 있네. 우리도 그래도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치.     

그건 사실이었다. 우리는 참 파란만장한 고등학교 생활과 사건사고로 가득한 이십 대를 보냈었다. 고등학교 때의 자살과 살인사건, 이십 대의 수많았던 데이트 폭력과 가슴 저미는 이별들. 불합리와 몰이해의 바다에서 우리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다독이고 위로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수백 번은 겪은 일임에도 나는 그 사실을 돌아보며 잠시 또 몸서리를 쳤다.     

맞아. 우리는 참 잘 견뎠어. 앞으로도 잘 살 거고. 대견하네 우린.     

우리는 차분하게 닿았던 것들과 멀어진 것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긴 세월의 풍랑 사이에서 많은 것들이 마모되고 으스러져 갔었다. 그 와중에도 남은 것들은 소중한 것이었고, 이미 사라진 것들은 아쉬울지언정 우리의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고 미워했던 세상천지의 수없이 많은 보물들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자잘한 웃음꽃을 틔웠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나는 그에게 알려주어야 했던 것을 다시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그것도 대단한 일이다. 망망대해 같은 기억의 물결 속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기어코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젠 무엇도 선명하지는 않을 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마냥 정확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이름 모를 바다에서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가 수신인을 정확하게 찾아가듯이 말이다.    
 

나는 그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너는 이별여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이별여행이라니? 헤어지면서 가는 여행이야?"

"응. 서로 헤어질 것을 알지만, 마지막 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가는 여행이지."

"그런 걸 가는 사람들이 있어? 너무 마음 아플 것 같은데."

"그 왜, 걔네도 갔었잖아. 우리 반이었던 애들. 고등학교 때부터 만났던 애들 있었는데.

"그런 애들이 있었어?"

"응. 이름이 뭐였더라? 그, 맞아. 고요랑 승복이."

"아. 기억날 것 같아. 걔네 막 꽁냥꽁냥 하던 기억이 있어. 보기 좋았었는데. 근데 걔네가 이별여행을 갔어?"

"응. 아주 먼바다로 갔지."     

그때 그는 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에게 주어진 것 보다도 긴 시간이 건네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은 참 이상하고도 특별한 일이라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섯 번째 이야기 : 이별여행






그는 오늘따라 모든 것이 시큼하다고 생각했다. 대기 중의 미세먼지 때문인지, 아니면 초콜릿 케이크가 조금 상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시큼함을 견디는 것은 그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는 입 안을 맴도는 불편한 맛을 꿀떡 삼키곤 말했다.     

"우리 헤어지자."     

그 말에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을 터,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의 흔적이나 후회 같은 서정적인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그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고맙지만, 아직은 안돼."     

무엇이 고마운지는 그도 알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둘은 잘 맞지 않았다. 지난 2년 서로 함께 한 시간은 전쟁에 가까웠고 둘은 이제 인정할 수 있었다. 함께 살아선 안된다는 것을, 헤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둘은 아직까지는 서로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서로 질척거리다가 원수가 되기보다는 이렇듯 좋은 감정이 남아있을 때에 끊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주변의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못해 관계의 쳇바퀴를 돌았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사랑하고 하는 끔찍한 관계들을 보며 그들은 다짐했었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그럴 바에야 서로에게 웃으며 안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말이다. 그렇기에 헤어지자는 그에게 그녀가 고마워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아직 안 된다는 말은 조금 이상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왜 지금은 안 되는 걸까?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고, 곧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주말에 너희 부모님 댁에 가기로 해서 그래?"

"응. 그건 그래도 같이 해야 되는 일이야. 그거 마무리하고 헤어지자."     

그는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 말은 목구멍까지 기어올라와 그를 찔러댔지만, 차마 그녀의 면상에다가 대고 내뱉지는 못했다. 그건 그동안 그녀가 이기적이라는 말을 싫어했기 때문이거나 그의 우유부단한 배려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 지적만큼은 사실이 아닐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했다.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 것은 그녀의 결정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되려 그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편이었다. 부모님은 어려서 가출하여 상경해버린 그녀를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고 생각하셨고, 그녀는 굳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서울로 올라온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게 지나 부모님과의 관계가 나아질 법도 한건만, 그 사이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해묵은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이 일정이 잡힌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모든 일에 반대와 거부만 해오던 그가 유일하게 찬성을 한 일이  부모님 댁에 방문을 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부모님께서도 몇 년 만의 그녀의 방문을 기꺼워하셨고 그와의 관계도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여행을 다행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대로 모든 것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아픔과 두려움을 억눌러보았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역시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이 여행 때문에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도 사실 자신이 이 여행에 왜 동의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가 물어봤을 때에 축구 경기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있었을 수도 있었고, 본인도 일상에 지쳐서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를 더 사랑해보고 싶다거나,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일어난 숭고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한 일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이별을 할 것이라 여행을 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함께 보낸 지난날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도 불타듯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고,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 불길에 대한 제를 올리는 것은 어쩌면 건강하게 작별하는 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그것만 다녀오고 정리하자."

"응. 부모님께는 친한 친구 데려간다고 그랬으니 괜찮을 거야. 이별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다녀오자. 서로 정리할 시간을 주는 거라고 생각해."     

그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너무 아프지 않게, 사랑하지는 않아도 존중은 하면서 마무리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의 대답은 짧았다.    
 

"그래. 그러자."   
  

초콜릿 케이크는 여전히 씁쓸한 것이었고, 그들은 한 귀퉁이를 조금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기차는 부드럽게 흔들렸고 그들은 서로 대화하지 않은 채 여정을 거듭했다. 둘 사이에는 불필요한 긴장도 없었고, 고조되는 기대감도 없었다. 하긴, 이미 7년을 만나온 사이였다. 어리고 풋풋한 17살에 처음 만났던 그들은 이미 여러 개의 삶을 함께 겪어왔었다. 지옥 같은 수험생활에서 둘은 서로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고, 그가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하고 결국 대학에 가길 포기한 심연을 겪을 때에도 둘은 서로를 놓지 않았었다. 함께 작은 자취방을 구하고, 각자 대학생활과 기술을 배우고, 고달픈 취업과 매일매일의 야근까지를 견뎌가며 그들은 이미 수천수만 개의 삶만큼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래서 마모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서 심장은 탈곡기처럼 터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그는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보았다. 막상 떠나오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부모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과는 접점이 없는 분들이라서 자주 생각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얘기로만 들어도 두 분은 그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도시로 올라오지 않고 작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것도, 매년 제사를 올린답시고 성묘와 제초를 가는 것도, 그녀에게 보이는 꽉 막힌 태도와 반말, 고리타분한 정치적 견해들, 주변 사람 말을 안 듣는 아집까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특징들을 그녀의 부모님께서는 모두 가지고 계셨다. 꽉 막힌 노인네들과 고집 센 아저씨들의 특징들. 그는 일터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종종 마주치곤 했다. 그런 사람들은 그를 얼굴만 보고 하대했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쉽사리 무시해댔다. 이미 그런 사람들에게 수차례 데어왔기 때문에 그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잘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마주친 그녀가 기가 차 했을 때 짜증은 났을지언정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너는 옷을 이따위로 입고 와?"

"왜. 뭐가 불만인데."

"정장 빼입고 오라는 것 까지도 아니잖아. 그래도 빨간 등산 점퍼에 츄리닝은 좀 너무 하지 않아?"

"진정해. 무슨 상견례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잔디 깎으러 가잖냐. 가는 거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까. 옷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말자 우리 서로."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그를 쳐다보았지만, 무언가를 기대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아는 것 같았다. 대신 그녀는 그 순간부터 그와 말을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기차표를 사고, 플랫폼으로 가서 기차를 탈 때까지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그는 홀가분하면서도 약간 아쉬워하며 바다를 향해 내려갈 수 있었다. 사실 그의 마음 한편에는 무언가가 트집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도 들고 있었다. 옷 가지고 뭐라고 해준다면, 그 누구라도 그의 학력이나 외모를 가지고 뭐라고 지적이라도 한다면 그는 자리를 박차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않았고, 그는 조용히 여행을 해야만 했다.     

서너 시간의 기차 여행이 끝난 뒤 그들은 버스를 탔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택시를 탔다. 역에서도 한두 시간은 더 들어가야 하는 골진 시골이었다. 가는 길의 바다는 아름다웠고 산세는 가을빛으로 너울졌지만 그 무엇도 그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분명 더럽고 무시무시한 시골마을 일 것이 분명했다. 어디 전설의 고향에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의 마을. 그는 낡은 목조주택들과 거미줄, 묶여있는 황구와 백구, 벌레가 날아드는 동네 구멍가게와 가로등 아래서 사건을 기다리는 것 같은 공중전화 박스 같은 것을 상상했다. 고리타분한 늙은이들이 사는 오래된 마을이니 뻔하고도 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다 기괴하고 불편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따분해하며 핸드폰을 만졌고, 핸드폰으로도 할 게 없다는 것을 알아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짜증에 지쳐서 창문을 내렸다 올렸다 할 때 즈음, 마을이 눈앞에 들어왔다.    
  

깨끗하게 단장된 도로 주변으로는 산뜻한 양옥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대부분 2층 발코니가 도드라지는 맵시 있는 집들이었고, 간혹 가다가 3층 집이나 저택 같아 보이는 곳도 있었다. 그 어디에도 오래된 목조건물이나 음침한 벽돌집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며, 당연하게도 구멍가게나 전화박스 역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사이로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거나, 작은 마을 공터에 빠알간 싸리 고추가 건조되고 있는 풍경이 눈을 사로잡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가 생각했던 풍경과는 달랐던 셈이다. 그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면서 감탄했다. 공터에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덕분인지 마을은 신령스럽고 신비한 분위기로 그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그는 새하얀 대문을 밀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옛집으로 들어갔고, 사방팔방 자유롭게 피어있는 꽃들의 모습에 감탄할 수 있었다. 잔잔한 가의 감탄 너머에서 꼿꼿하신 여성분께서 부드럽게 그를 맞이해 주셨다.    
 

"어서 와요. 고요 친구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넙죽 인사했다. 고운 선의 여성분은 그가 아주 잘 아는 사람과 많이도 닮아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의 어머님이셨다.     

어머님께서는 그를 아주 살갑게 맞이해주셨고 멸시나 멸대 까지는 아니더라도 반가움까지는 예상하지는 못했던 그는 약간 허둥대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 고요 친구 이승복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 씩씩하네요. 고요도 어서 오렴. 오래간만이지?"

"응 엄마. 잘 있었어?"

"그럼. 짐은 2층에다가 풀어. 승복 씨도 2층에 짐 푸세요. 고요가 어느 방인지 알려줄 거예요."    
 

그는 다시금 넙죽 인사를 하고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고 단정한 현관과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한 실내가 그를 반겼다. 이렇게 깨끗하게 살려면 얼마나 청소를 해야 하는지 그는 짐작조차도 가지 않았다. 정원의 편안한 분위기와 집 안의 삼엄한 분위기는 사뭇 달라서 그는 살짝 의아함과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조금 착잡해진 상태로 고요를 따라갔고 곧 이층 집 계단 앞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마주칠 수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은 그의 상상과 달랐지만, 한 가지는 그의 상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 그와 그녀를 대하는 아버님의 태도는 그가 상상했던 바로 그대로였다.     

그녀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아버지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고, 아버지 우두커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둘 다 인사하는 방법을 까먹은 장승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먼저 인사를 해버리고 말았다. 누구라도 이 침묵을 깨지 않으면 적막에 휩싸여 질식할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고요 친구 이승복입니다. 이번에 잔디 깎는 것을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냉엄한 표정의 남성은 고요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단지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그는 불호령과 핀잔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가버렸고, 그는 아버님과 독대하도록 남겨져있었다. 아버님은 혀를 한번 차곤 말씀하셨다.
     

"어서 오게. 와줘서 고맙네. 저 아이 친구라고?"

"네. 그렇습니다."

"일은 점심 먹고 시작하세. 반나절이면 충분히 끝낼 걸세. 어려운 일도 아니고."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님은 거실로 사라지셨고 그는 조금 전 과는 다른 의미로 혀를 내두르며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아직까지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그는 이 집이 벌써 조금은 불편해지고 있었다.

              

            





행장을 푼 뒤에 가볍게 먹기 시작한 점심은 새참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소박한 식사였다. 동치미가 떠있는 작은 막국수와 질박한 그릇의 오이소박이는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분위기 때문에라도 제대로 식사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아버지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고, 아버님 역시 말 한마디 없으신 채로 묵묵히 젓가락질만 하셨다. 그나마 어머님은 딸이 처음 데려온 친구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셨지만 결국엔 아버님께서 냉막하게 자르고 들어오시는 바람에 입을 다무셔야만 했다. 그간 지내온 이야기들의 온기를 칼처럼 자르고 들어오신 아버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거, 밥은 조용히 먹고, 일 다 하고 난 뒤에 얘기합시다. 당신도 애들 말 그만 시켜. 오늘 해야 할 일 많으니깐."     

어머님과의 작은 대화들로 조금이나마 생겨날 뻔했던 편안함과 평화는 그 말 한마디에 사라졌고, 그는 어째서 그녀가 이 집에 돌아오기를 그토록 싫어했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잔디 깎을 준비를 하며 옷을 갈아입은 그는 2층 계단에 걸터앉아 애증의 눈으로 마당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함께해온 지난 7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그는 그녀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볍게 말했다.     

"직접 뵈니 아버님 대하는 건 진짜 힘드네. 너 고생 많이 했겠다야."

"군인이셨거든. 대령까지 진급하시고 전역하셨어. 아직 그때의 습관들이 많이 남아있지."


그는 그제야 아버님께서 쏘아보셨을 때 받았던 느낌을 어디에서 받았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군대에서 대대장이 그를 쏘아볼 때 주던 느낌은 그것과 아주 똑 닮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가 느끼는 여러 가지 불편함들이 대번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바닥에 머리카락 한 올 없는 깔끔함도, 불편할 정도로 정리되어있는 가구들도 다 그가 이미 살면서 한 번은 느끼고 겪었던 형태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싫어했던 삶의 순간의 일부였다. 군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만은  그는 조금 더 많은 것을 이해하며 그녀를 조금 다독였다. 곧 헤어질 사람을 다독이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자연스러운 일 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하루 견뎌야 할 일이었지만 그녀에겐 평생에 걸쳐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같은 사람으로서 위로를 건네지 못할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도 마당은 집 안과는 달리 산뜻했다. 구석구석에서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가을이 깊은 탓에 밤이 열리고 대추가 익어가고 있었다. 먼 구석의 감나무에는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 오고 가는 이들의 시선을 자극했다. 먹기도 어려운 떫은 감인지 근처에 까치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작은 태양이 몽글몽글 맺혀있는 것 같은 그 모습은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갑갑하고 답답했던 기분을 마당을 둘러보면서 풀었고, 어머님은 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주셨다.      

"마당은 처음 가꿔보지요? 도시에는 이런 마당이 별로 없을 테니."

"네. 아주 처음이라 많이 어설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머님."

"아들 같기는 하지만 조금 천천히 말 놓도록 할게요. 일 하다가 어려운 것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본인이 이 정원을 가꾸셨다며 화사하고도 수줍은 꽃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셨다. 정원의 모양은 확실히 어머님의 성정을 닮아있는 것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이리저리 뻗어나가는 해국과 투구꽃은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질기게 자랐고, 층꽃나무 아래의 황기도 활달하면서도 친절한 부드러운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드넓게 얽혀 많은 것이 함께 자라는 마당에서 단 한 가지 어머님께서 가꾸시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잔디밭뿐이었다. 잔디밭은 잡초 하나 용인하지 않는 단호함을 뽐내고 있었는지라 자유롭고 소담한 화단과는 대비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제야 그는  무언가를 조금 깨달을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아버님께서 호미와 잡초 통을 들고 오시며 말씀하셨다. 어서 시작해서 해지기 전에 끝내자고 말이다. 편안하게 이어지던 대화는 끊겼고 그의 노역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시작은 잡초를 뽑는 것부터였다. 너른 잔디밭은 깔끔해 보였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종류의 잡풀이 섞여 자라는 장소였다. 흔히 보이는 토끼풀이 곳곳에서 기회를 노리는 것은 물론이고, 개미자리나 광대나물 같은 뿌리가 조금 깊은 풀들도 곳곳에서 자랐다. 가장 어려운 것은 갯잔디를 골라내야 할 때였다. 토종잔디인 갯잔디는 금잔디와 섞여 너울져 자라고 있었고, 어느 한쪽의 뿌리를 건드리지 않는 채 나머지 하나를 솎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는 네다섯 번을 아버님께 질문하고도 갯잔디와 금잔디를 구분하지 못했고, 그때마다 꾸지람과 핀잔을 들어야 했다.
     

"아버님, 이것이 갯잔디 뿌리 맞습니까? 잘 골라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

"자네는 애먼 잔디 다 죽일 일 있나? 멀쩡한 금잔디 뿌리는 왜 골라내나?"

"아 죄송합니다. 제가 또 실수를 저질..."

"죄송하다고 하면 뭐 나아지는 거 있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데 아직도 이 정도밖에 못하지 않았나?"
    

그는 몇 번씩이나 호미를 집어던지고 싶은 침울함을 느꼈다. 다 똑같은 잔디인데 그것을 구분하라는 것은 비이성적인 태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애당초 세상은 여러 풀과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아야 하는 곳이지 한 종만 남도록 솎아내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버님은 말씀하실 때마다 그가 하던 말을 자르고 들어오셨고, 그는 점점 더 무시당하는 기분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가 어떤 얘기를 하든 아버님은 어떻게든 말 중간을 자르고 들어오셨다. 그가 잔디에 대해서 물어봐도, 군생활에 대해서 여쭤보아도, 심지어 따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거나 흥미로웠던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아버님은 마치 숨을 쉬듯 그의 말 중간을 잘랐다. 문장이 잘리는 것은 때론 묵묵부답으로 무시하는 것 보다도 더 하찮게 여겨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법이고, '너 따위가 무엇을 말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고 내 말을 듣게'라고 주장하시는 것 같은 아버님의 태도는 그를 무척 지치게 만들고 말았다. 결국 그는 결국 땀을 훔치며 이 대화에 아주 조금조차도 참여하지 않은 그녀를 훔쳐보며 부러워하고 말았다.    
 

그녀는 저만치서 홀로 떨어져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잔디와 놀고 있었다. 호미를 붓 삼고 잔디밭을 도화지 삼아 자신만의 시간을 그리는 그녀의 모습은 사뭇 진지해 보이는 것이었고, 그는 조금 억울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그녀는 모든 것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자기 자신만의 공간과 거리를 미리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그와 눈이 마주쳤고, 찰나지만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건 조금도 위로되는 일은 아닌지라 그는 세상 모든 것이 조금 더 원망스러워지고 말았다.     

잡초를 모두 솎아낸 뒤에는 예초가 시작되었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잔디 이발이 끝나자 이번에는 깎인 풀을 갈퀴로 긁어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무엇하나 억겁처럼 반복되지 않는 일이 없는지라 그는 속이 타들어가고 자기 자신을 심지삼아 시간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루하고 고된 노동의 반복 끝에 그는 가까스로 두 포대의 잡초와 깎은 잔디를 그러모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희망을 갖고 아버님께 다가갔다.     

"아버님, 여기 두포대가 나왔습니다. 다 마무리된 것 같은데 이건 어디에 둘..."     

"수고했네. 이제 뒷마당만 하면 되네. 따라오게."   
  

그는 까무러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결국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며 그의 지친 어깨를 다독일 때였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최대한 아버님께 말을 걸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도구를 정리했다. 몸도 녹초였지만 반나절 동안 잘림 당하고 무시당하고 구박받은 그의 언어와 정신 역시 곤죽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모든 것을 정리한 뒤 데크에 드러누워서 석양이 뿌리는 광채의 이야기들을 감상했다. 기나긴 시간이 이제야 끝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밤이 다 가기 전에 아직 견뎌야 할 일이 조금 더 남아있을 것이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마당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톡톡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고생했어. 이제 들어와."

"왜? 뭐 더 할 게 있어?"

"아니. 고생했으니까 저녁 먹어야지. 어머니께서 너 해주려고 닭백숙 하셨대."
    

그는 사실 밥 생각조차도 없을 만큼 지쳐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것이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이것은 그가 견뎌야 하는 마지막 수난이었다.   
  

저녁 밥상은 아름답게 차려져 있었고 좋은 향기가 아른아른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탐스러워 보이는 토종닭의 뽀얀 속살과 자알 익은 감자와 고구마, 때깔 좋은 버섯과 마늘에 반짝이는 양념장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 보이는 요리였다. 다만 그 자리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요리가 아니라 대화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감사히 잘 먹겠다는 인사를 올리려고 했다. 오늘 많은 것을 배웠고, 살며 해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이었으며,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반절도 채 말하지 못했을 때 아버님께서는 자르고 들어와 말씀하셨다.     

"이제 들도록 하게. 아주 맛있을 걸세."     

그 뒤로도 식사 내내 대화는 비슷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는 요리가 기가 막히다고 어머님의 솜씨를 칭찬하려고 했고, 어머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손질을 했고 어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갔는지 알려주려고 하셨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딱 잘라 말씀하셨다.      

"손수 키운 닭이라 그렇네. 도시에선 먹어보기 힘들지."     

그리곤 아버님께서는 폐쇄형 양계장의 포악함과 그곳에서 얼마나 병아리만한 닭을 잡아서 '치킨'을 만드는지, 닭을 그렇게 키우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아버님께서는 닭들이 의당 먹어야 하는 사료와 각 개체별로 필요한 공간의 크기, 닭들이 낳는 계란의 색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셨고, 사실 닭들이 당하는 끔찍한 사건 일지나 사육환경보다는 이 비범한 양념장과 국물 맛에 대해서 더 궁금했던 그는 입맛을 쩝쩝 다셔야만 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는 아버님께서 쏟아내시는 그 모든 정보가 다 건네어진 뒤에 부드러운 미소로 그에게 다시금 돌아오셨다.      

"재료는 황칠나무 껍질과 백수오가 아주 중요해요. 이 두 가지만 좋은 걸 구해도 이런 맛을 낼 수 있답니다. 이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도시에서는 구하기 힘든, 건강하게 구했을 때만 의미 있는 재료죠."    
 

그는 잠시 대화가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 평온함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그 위화감에 대해 의아해 하려던 순간, 아버님께서는 다시 평온을 파탄 내는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요즘은 도시에서도 백수오 같은 건 다 구할 수 있어. 당신은 참 모른다니까. 자네 아까 군 복무를 마쳤다고 그랬지? 어디에서 했나?"     

"아 저는 북부에 있는 5 포병 여단에서 복무를..."     

"내가 군생활할 때는 포병 사단들이 포천 근처에 주둔해 있지 않았지. 그보다는 홍천 근처였다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다시 한번 말이 잘린 것에 대해서 약간 짜증이 났지만,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군대에 관련된 이야기는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졌고, 그는 인내심과 수명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그 시간을 인고했다. 어머니께서는 그 시간 동안 평온한 표정으로 듣고 계시다가 이야기의 흐름을 그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자연스럽고도 평온한 태도였다.     

"맞아요. 그때 군생활은 참 쉽지 않았죠. 요즘 군생활은 어땠을는지 궁금하네요. 포병 여단에서의 근무는 어땠어요?"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짧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 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중간중간에 맞장구를 쳐주셨고, 몇 가지 질문들을 추가로 하시기도 했다. 물론 아버님은 기회만 나면 자르고 들어오시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이 다 잘려나가거나 그가 말을 아예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기묘한 분위기를 조금 더 지켜보았다.     

천 번의 이야기에 걸쳐 만개의 감정들이 자리 잡기까지, 모든 것은 그대로 반복되었다. 불편함과 편안함은 서로를 잇고 극복하며 이야기를 빚어나갔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금 이해할 것도, 조금 알 것도 같았지만 아직 시도해볼 수는 없었다.     



       





백숙과 함께한 전통주가 조금 강했던 모양인지, 그의 여자 친구는 먼저 이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잠시 술만 깨고 다시 내려오겠다더니 조용한걸 보니 이미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밤은 깊어갔고 그는 그 자리에 앉아 그대로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는 끊어지고 이어지며 위태로운 흐름을 보였다. 아버님께서 칼 같이 잘라내어 긴장감을 고조시키면 어머님께서는 늘 잘린 단면을 쓰다듬어 이으셨다. 어느덧 아버님께서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본인의 옛 추억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젊고 철없던 어린 시절, 여행을 동경하던 작은 소년의 모습이 이야기 속에서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화산재처럼 굳어진 오래된 남성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품었던 작고 몽실몽실한 조각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머님께서는 '걘 이불이라도 덮고 자는 건지 모르겠네. 한 번 보고 올게요.'라는 말씀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셨고, 식탁 위에는 그와 아버님만이 남았다. 아버님께서는 단 둘이서 남게 되자 말을 멈추시고 술잔만 기울이셨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먼저 질문을 여쭤보았다. 마침내 무언가를 알 것만 같았기에 할 수 있었던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여행을 항상 가보고 싶어 하셨던 모양이군요.”     

아버님은 그의 말을 자르지 않으셨다. 그리곤 짤막한 대답을 건네셨다.
    

“그렇네. 그중에서도 영국에 꼭 가보고 싶었지.”     

그는 아버님께 왜 영국이었는지를 여쭤보았고, 아버님께서는 어려서 읽은 책들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깨달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다. 대성당의 고고한 자태와 영원할 것 같은 기나긴 구릉들, 외로움과 안개의 낙원에서 자아와 희망을 찾아가는 위대하고 깊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은 이 오래되고 단단한 남성 속에서 한가닥 본질을 빚은 것 같았다. 머나먼 땅나라의 신비와 미지를 말씀하시며 아버님의 눈은 단단함과 집요함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특히 대성당에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그는 무언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확신을 갖고 계속해서 물었다. 그 높다란 첨탑과 강인한 기둥들 사이에서 무엇을 찾으셨느냐고, 어떤 의미와 역사가 당신 안에 놓여있느냐고 말이다. 아버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버님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또 들었다. 이야기는 이어지며 기둥을 빚고, 천장을 받치고, 수천 개의 조각난 유리조각으로 창문을 만들며,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게 만들었다. 어두운 구석구석과 음악이 울려 퍼지는 천상 사이로 아버님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높다란 계단들 사이에는 희망이, 널찍한 지하 저장고에는 아쉬움이, 쪽문과 아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회랑들 속에는 추억이 하나하나 단단하게 여미어지고 있었다. 그는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은 채로, 자랑과 회한이 뒤수룩하게 얽혀 자라 마침내 굳어진 이야기 사이로 함께 발걸음을 놀렸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고, 마침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님의 이야기의 끝에서 그는 기도를 올리듯이 말했다.     

"저도 어려 대성당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 모든 것이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너무나도 생생합니다. 거대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자 수천 개의 스테인글라스를 통과한 빛살이 저를 감싸 안듯 내리쬐었죠.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해지며 그 공간으로 발걸음을 들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잘리지 않았다. 아버님께서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질문하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는 대답했다.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고, 그들의 밤 역시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 역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을 것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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