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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Nov 17. 2019

그들만의 작은 천국 마지막화

가을 단편소설집 마지막 이야기 : 오소리꿈


마지막 사잇야기 : 더 깊은 밤
       


승복이와 고요의 이별여행 이야기는 그의 마음속에 여운을 남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운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둘이 그 여행 뒤에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건 참 특이한 태도였던 것이, 승복이와 고요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둘이 맞이한 이야기의 끝에 대해서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우두커니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비어있는 그의 술잔을 조금 채워주며 그의 여운을 읽으려고 애썼다. 나는 이 역시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문득 기억 속에서 잊혀가던 아이 한 명의 근황을 내게 물어보았다.    
  

"너 혹시 별이 기억나? 유별."     

나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알맞은 기억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유별. 별이. 내 마음 한편엔 항상 별이가 박혀있어. 별이는 이름 그대로 정말 유별났었거든."     

나는 웃으며 그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너보다도 유별나?'라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는 머쓱하니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상한 거고 별이는 유별났어. 너도 별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 참 이상하다. 너는 기억할 줄 알았는데."     

"왜 나는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너희 둘은 이상하게 닮았거든. 가끔 이상한 얘기를 하는 것부터, 나에게 자꾸 물어볼 것이 있는 것 까지."    
 

그제야 나는 기억의 거의 나지 않는 자그마한 여자아이 한 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누구 하고도 대화하기 싫어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집요하게 질문을 하던 아이. 오소리와 담비를 닮은 새하얀 아이. 그 아이의 질문은 날카로운 면과 괴이망측한 선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그 아이는 때때로 그 질문들로 주사위 놀이를 하듯 사람들을 꿰뚫어 보곤 했었다. 그건 참 끔찍하리만큼 오래전 일인지라 희미하고도 희미한 기억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아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기억나. 이상하리 만큼 조금 기억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억에 있기는 한 것 같아. 네가 걔를 어떻게 기억하나 싶기도 하고. 걔는 왜?"     

"너도 혹시 별이한테 이상한 얘기를 들었나 해서."     

"이상한 얘기?"     

"응. 굉장히 독특하고 특이한 얘기였어. 너 혹시 오소리꿈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어?"     
     

그는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같은 조로 토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였다.                     




              



마지막 이야기  오소리꿈       







"죽고 싶다 정말."     

등 뒤에서 들려온 섬뜩한 말에 나는 힐끗 고개를 들렸다. 여자아이들은 답변 체크를 하고 있었다. 큼지막한 시험지에 빨간 줄이 하나 그어질 때마다 그들의 입에서는 끔찍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진짜 자살해야 돼. 아 이것도 틀렸어? 진짜 병신인가 봐 난."     

나는 이런 대화가 싫었다. 시험이 끝난 교실에는 항상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자신의 가치를 저버리는 이야기들. 자괴와 자학이 교실 안을 오래된 먼지처럼 수놓고 있었다. 아이들은 분명 농담처럼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일 테지만 그럼에도 그 기저에는 무의식적인 진심이 조금씩은 담겨 있었고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한 여자아이가 시험지를 들고 내 앞에 멈춰 섰다.   
  

"찰리 찰리. 너도 시험 잘 봤어?"

"아니. 못 봤어."     

"그래? 너도 나처럼 죽고 싶을 정도로 못 봤어?"     

"아니. 나도 너처럼 살고 싶을 정도로 못 봤어."     

"뭐래 찰리. 또 이상한 소리 해. 근데 있잖아 뜬금없긴 한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너는 지금 기억들을 그대로 가지고 과거로 간다면 어떻게 살고 싶어?"     
     

아이들은 어느새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집어치우고 우리의 주변에 모여들어 있었다. 죽음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 교실에선 환생이란 꽤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성격 급한 성화가 먼저 으스대듯이 대답했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 거야."     

"왜? 로또 사거나 전교 일등 안 해보고 싶어?"     

"지금 꼭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고 있는걸! 막 시간을 되돌아간다고 해서 바꾸고 싶은 일들이 있다면 그건 다 후회인 거잖아. 난 지금도 후회 없이 살고 있다고!"     

"우와. 넌 그럼 살면서 후회되는 일들이 하나도 없다는 거지?"    

“그렇지!”     

“그럼 이번 시험도 되게 잘 봤겠네? "     

"그... 그렇겠지? 아하하하."     

"그럼 시험 잘 본 놈은 저리 꺼져 줄래 기분 나쁘니까?"     

상큼한 눈웃음과 함께 성화를 퇴치한 그 아이는 다시금 생글생글한 눈웃음으로 나를 보면서 물었다.
     

"너는 찰리? 너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거야? 해왔던 그대로의 삶을 택할래?"     

나는 고심 끝에 대답했다.     

"아니."     

그러자 그 아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욕망과 퇴폐의 길을 갈 거야? 로또도 사고 주식도 사고 그럴래? 아니면 자유롭고 흥분되는 삶을 살 거야? 다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나는 거지.”     

“그것도 아니. 둘 다 아니야.”

“그럼?”

“나는 오늘과는 다른 어제를 살래.”

"그게 무슨 뜻이야?"     

"오늘은 오늘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어제는 어제대로의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지 뭐. 똑같이 산다고 해서 똑같은 너희들을 만날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그 말에 그 여자아이는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곧 자신은 로또를 살 거라느니, 다시 태어나면 이 학교엔 절대로 안 올 거라느니, 선생님이 되어서 이 시험문제를 낸 놈을 박살을 내어놓겠다느니 하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지만, 그 아이는 담비 같은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매점에 다녀와야 한다고 핑계를 스무 번쯤 댄 뒤에야 가까스로 교실에서부터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날 저녁은 조용했다. 시험이 끝난 날인만큼 야간 자율 학습을 하려고 남아있는 아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쩌다 남아있는 아이들 역시도 스쿨버스가 오는 시간을 기다릴 뿐인 건지 삼삼오오 모여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교실에서 바빠 보이는 것은 초침과 분침 정도뿐인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품을 참으며 시간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 아이는 그때 내게 말을 걸었다.     

“찰리, 뭐 하고 있어?”     

아까 쉬는 시간 때의 질문들 이후로 별이와는 눈이 마주치는 시간이 잦았고, 나는 잠시 이것이 사랑의 시작인가- 라는 헛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별이는 내 내면까지 다 꿰뚫어 보겠다는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이 기묘한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뭐 하는 거 없어. 왜?”   
  

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잠깐 나랑 도서관 가서 얘기 좀 하지 않을래? 너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나는 ‘그럼 그렇지, 이건 역시 사랑의 시작이었어, 이렇게 살며 첫 고백을 받는 건가’와 같은 헛생각들을 별이가 들을까 내심 조마조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교실을 빠져나와 도서관을 향해 걸었고, 시험이 끝난 아이들 중에선 그 누구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서관은 텅텅 비어있었다. 학교 꼭대기층에 위치한 고즈넉한 도서관은 논술 독서 수업이나 시험기간일 때가 아니면 학생들이 찾아오는 법이 없었고 책과 이야기들만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장소였다. 장서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빼서 자리에 앉은 별이는 책을 잠시 훑어보는 척하다가 물어보았다.   
  

“찰리, 너도 혹시 오소리꿈을 꾸었니?”     

“오소리꿈? 아니? 그게 뭐야?”     

“정말? 이상한 오소리가 나와서 너를 나무 구멍 사이로 안내하는 꿈을 꾼 적이 없단 말야?”     

“응. 넌 그런 꿈을 꿔?”     

“거 참 이상한 일이네. 그럼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지?”     

“뭐가 처음이라는 얘기야?”     

“누가 너한테 이런 이상한 질문을 한 거 말야.”     

나는 별이가 이것이 ‘이상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으슥한 도서관에 끌려와선 로맨틱하기는커녕 오소리스러운 질문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경험이었고, 상대방이 ‘이상함’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라는 반증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조금 안도하는 한숨과 함께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럼. 처음이지. 누가 나를 도서관에 끌고 온 것 자체가 처음인걸.”     

“미안해 찰리! 말하기 전에 뭔가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았어. 기회가 많을 것 같지는 않았거든.”     

“무슨 기회?”     

“너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 말야. 나는 아마 이번이 1000번째라 마지막일 것 같거든. 네가 다음 오소리꿈의 주인일 줄 알았는데 아쉽다!”  
   

나는 별이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별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짓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찰리, 나는 생각보다 아주 오래 너를 봐왔어. 이번이 천 번째 삶이거든.”
       

그녀는 오래도록 시간을 거듭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담담한 어조로 풀어나갔다.






그 첫 시작은 스물아홉 살, 그녀가 월요일을 두려워하며 피곤한 몸을 뉘었을 때였다. 달콤한 잠과 함께 그녀는 빨려 들 듯이 꿈속의 세계로 잡혀갔고, 그곳에서 검고 흰 오소리 한 마리를 마주칠 수 있었다. 오소리는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듯이 열광적으로 손짓했고, 그녀는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기이한 생명체를 따라갔다. 오소리는 일곱 개의 황금으로 가득 찬 굴과 다섯 개의 도서관 사이로 그녀를 안내했고, 어느 낯선 교실 앞에 도달했을 때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들여다 보내어 주었다. 그리곤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16살의 어느 여름, 고등학교 1학년 때의 교실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을 되돌아온 것처럼 그때의 몸과 감정들 그대로였다. 단 한 가지, 기억만큼은 달라져 있어서 그녀는 아주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 사이로 돌아왔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새로 주어진 이 기회에 뛸 듯이 기뻐하며 많은 것을 누리려고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기에 로또 번호를 외워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앞으로 나올 수능 문제나 세계의 변혁이나 크나큰 사건들 같은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아주 쉽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세상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돌아왔지만 아무래도 세상은 한없이 변한 것 같았다. 일어났어야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녀가 기억하는 사건들 역시 순서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선 23살에 결혼했던 친구는 확고한 독신주의자의 삶을 살아갔고, 연인이었던 아이들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자리를 차지했으며, 나지 않았던 전쟁이 일어나거나 일어났던 전쟁이 사라지기도 했다. 반신반의하면서 그녀는 2회 차의 삶을 그저 지켜보면서 보냈다. 그리곤 스물아홉 살에 다시 한번 오소리꿈을 꾸었다.     3회 차에 들어선 그녀는 더 신중해졌고, 많은 것들을 기록하거나 외우려고 애썼다. 이미 두 번이나 되돌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변화하는 것들을 조금씩 눈치챌 수 있었다. 가장 큰 차이는 그녀가 마주치는 사람들이 바뀐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돌아오는 교실은 매번 같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아이들은 조금씩 달랐다. 서른 명 중에 그녀가 기억하는 아이들은 열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물론 존재감이 없어서 그녀가 잊어버린 아이들도 몇은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녀를 알았지만, 그녀는 낯설고 기이한 감정에 조금 매몰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엔 자퇴를 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녀 보았다. 다시 한번 돌아온 스물아홉 살에 그녀는 아주 많은 준비들을 해놓았다. 16살 때부터 스물아홉 살까지의 로또번호를 하나씩 외웠고, 중요한 사건들과 그 원인들, 특히 증시와 관련된 이슈들을 완벽하게 암기했다. 심지어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의 이름과 특징까지 모조리 외웠으니 실로 대단한 준비를 한 셈이었다. 그리곤 또다시 오소리 꿈이 그녀를 찾아왔다.     

4회 차의 삶에 들어선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반 아이들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곤 또다시 전체의 절반 정도는 새로운 아이들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알았던, 오소리꿈 이전부터 그대로였던 아이들은 이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그녀는 이 기묘한 현상에 조금 난감하다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녀는 작은 가설 하나를 세웠다. 돌아올 때마다의 세상은 다른 곳이라고, 돌아오는 자신만 같지만, 모든 것이 다르게 일어나는 곳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설은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로또 번호는 하나도 맞지 않았고, 일어났어야 하는 사건들은 그 비스무리한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녀는 3회 차 막바지에 열심히 공부해두었던 사건의 원인들을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그 원인들이 어디선가 비켜나갔다는 사실만을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다. 붕괴했어야 하는 다리는 조금 정의로운 사람이 건설을 맡은 덕분에 붕괴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더 나쁜 정치인들이 그로 인해 힘을 얻었으며, 좀 더 보수적인 문화가 사회 전반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 보수적인 문화는 어떤 예술가들의 반항정신을 자극했고, 그 결과 그녀가 좋아했던 영화는 그녀의 기억보다 무려 7년이나 빨리 개봉을 하고 말았다. 다른 배우들이 연기한 다른 결말의 영화였지만, 그녀는 그 감독만의 결과 영화의 작품성을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뿌리가 같은 나무에서 자란 두 개의 서로 다른 잎사귀 같았다. 그녀의 기억과 현실은 닮았지만 달랐고, 같은 원류를 자랑했지만 다른 열매를 맺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한참 동안 지켜봐야만 했다.     

십 회, 이십 회, 오십 회를 거듭하며 그녀는 점차 삶에 대해서 알아갔다. 그동안 아주 많은 바보 같은 짓들을 하면서 수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던 셈이다. 39회 차쯤에는 습관처럼 사던 로또가 한 번 당첨되기도 해서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녀가 외워두던 번호 중 하나가 우연찮게 한번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39회 차는 그만큼의 비극으로 끝났다. 어차피 덧없음을 알았기에 그녀는 돈을 흥청망청 주변 사람들에게 써버렸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여러 번의 삶 중 가장 끔찍한 결말들을 맞이했다. 그 뒤로 그녀는 복권을 구매하지 않았다. 

삶이 백회 차가 되었을 때 그녀는 주변 인물들에게도 무언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반 아이들은 매번 바뀌는 것 같았지만, 실제론 일정 범주 안에서 교체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좀 더 높은 확률로 같은 반에 존재하게 되는 몇몇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그들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험을 봐서 들어오는 특목고였기 때문에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매번 세상이 새로 시작될 때마다 아이들은 다시 처음부터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운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아이들은 그녀의 삶에 등장할 수 있는 빈도가 들쭉날쭉했지만, 선천적으로 좋은 머리를 타고나거나 남들보다 우월한 언어적 감각을 지닌 아이들은 좀 더 지속적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지난 100번의 삶 중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 반장이라는 아이는 더욱 그랬다.      

반장은 처음부터 영특하게 태어난 것인지 언제나 그녀의 반에 있었다. 항상 반에서 1등을 하거나 현명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늘 상위권이고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반장을 아주 유심히 살펴보았고, 남들보다 특목고에 올 확률이 높은 아이이며, 이 고등학교 주변에서 나고 자란 환경 덕분에 보다 자주 그녀의 삶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을 수 있었다. 결국 이 세계는 그녀가 돌아올 때마다 매번 새로운 세계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매번 새롭게 시작되는 것일 뿐이었던 셈이다. 그녀라는 뿌리가 변하지 않고 16살인 채로 돌아왔기 때문에 세상도 되돌아간다고 하여 완전하게 변하지는 못했지만, 그 뿌리로부터 시작되는 시간들이 모두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는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녀는 반장이 여러 가지 모습이 되는 광경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의사가 되거나 변호사가 될 때도 있었지만, 잔혹한 살인마나 왕따 사건의 가해자가 되는 것도 빈번했다.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친해졌다가 반장과 연인관계로 발전했을 때였다. 그때 그녀는 연인 사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지 생생히 실감할 수 있었다. 지성과 인성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녀는 반장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비난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며 지켜보았다.     

그 뒤로 그녀는 수많은 확률들을 점쳐보려고 애쓰며 수백 회의 삶을 보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되돌아올 때 16살의 몸과 감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물아홉 살의 지쳐버린 마음으로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도 파고들기도 어려울 테지만 (심지어 마냥 유쾌하기조차 어려운 법이다.) 그녀는 열여섯 살로 돌아왔을 때에는 열여섯 살 만큼 호기심 많고 발랄할 수 있었다. 물론 열여섯 살의 그녀마저도 서서히 지쳐갈 만큼 어마어마한 기억들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러 가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관찰자가 될 수 있었다. 어쨌든 꽤 긴 시간 동안 그녀가 노력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바꾸어 보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은 500회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 당시에 그녀는 단 한 가지 사실을 바꾸기 위해서 미친 듯이 노력했었다. 그녀의 반에는 한 불쌍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거듭하는 수백 회의 삶 속에서 매번 따돌림을 당하거나 운이 좋아도 남들에게 기억조차 되지 못할 만큼 무시당하는 아이였다. 498회째의 삶에 그 여자아이는 왕따를 당하다가 자살을 했고, 499회 째에는 학교폭력 서클에 끌려다니다가 칼에 찔리는 불상사를 겪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반에 존재하는 것을 보아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 아이인 것은 분명했지만, 무언가가 그 아이를 비참한 삶으로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소리꿈의 기회로 그 아이의 삶을 어떻게든 바꾸어주고 싶었고,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온통 쏟아부었다. 그리곤 아주 많은 일들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건 마치 빗장이 걸린 대문을 손가락만으로 열려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노력해도 그 아이의 운명을 벗겨낼 수 없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을 때에 그 아이는 그녀에게 의존했고, 그녀가 문제를 해결해주자 더 큰 문제에 휘말렸다. 가해자를 없애는 순간 그 아이는 더 짙은 우울에 휩쓸렸고, 그렇다고 우울하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면 나쁜 아이들을 친구로 삼았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구제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녀는 끝없는 오소리의 시간을 그 한 아이를 위해서 불태웠다.     

그녀를 결국 무너트린 것은 그녀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녀를 답 없는 절망으로 빠트린 것은 포기해야만 한다는 절망감이나 운명의 가혹함이 아닌, 그녀의 성공이었다.     

오백 스물아홉 번째의 삶에서 그녀는 마침내 그 아이를 온전히 도울 수 있었다. 너무 의지하게 만드는 것도, 악순환에 빠트리는 것도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그녀는 그 아이의 아픔을 위로했고, 깊고도 거대했던 마음의 구멍을 조금이나마 닫아줄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분명 특별하고도 예민한 아이였을 것이다. 아주 다채로운 예술가적인 기질이 그 아이 안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하며 미소 짓던 그녀에게 삶은 썩은 죽창을 날렸다.     

다음 해에 그녀는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어있는 그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보통의 가해자가 아닌, 수백 회의 삶 속에서도 그녀가 보지 못했을 만큼 끔찍하고 잔인하며 창의적이기까지 한 가해자였다. 온 마음을 다해 구원하려고 했던 누군가가 온 국민에게 멸시당하는 살인마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열하고 비참해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나락이 열려버렸다.    
 

그녀는 그 뒤로 수백 회 동안 진절머리를 치며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스물아홉 살의 밤이 지나서 열여섯 살이 되면 곧바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먼 곳으로 떠나기를 수백 번 반복했던 셈이다. 그녀는 외딴섬에 홀로 정착해서 살아보기도 했고, 아무도 모르는 이국적인 도시로 떠나 인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비구니가 되거나 명상원에 들어가서 마음을 닦기도 했고,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해녀가 되거나 농부가 되어보기까지 했었다. 여러 가지의 다채로운 삶은 그녀에게 다양한 업보를 쌓아주었고, 조금 더 자기 자신을 관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변화가 주는 두려움과 되돌아가는 시간에 대한 허무함을 조금 내려놓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과 오소리 꿈의 관계도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그녀는 오소리와 마주 보는 시간 속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딱 천 번, 천 번만큼 되돌아가는 시간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800회 차가 조금 넘어서 그녀는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든 일의 뿌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확연이 깨달은 만큼 모든 것을 관조할 용기가 생긴 셈이다. 그녀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말 걸지 않는 채로 조용히 삶을 살았다. 사람들이 변하고, 사랑하고, 태어나고, 죽는 것에 그녀는 더 이상 의미를 두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일어난다 하여 중요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어느덧 꿈속의 오소리처럼 모든 것을 관찰하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이 눈에 띈 것은 그녀의 성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건 참 이상하고도 독특한 일이라 그녀는 왜 이제야 그것이 눈에 띄었는지 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990회가 넘는 삶 속에서 이 부분을 놓쳤다는 것은 참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던 셈이다. 그녀가 삶을 반복하면서 마주치는 아이들 중에는 변하지 않는 아주 이상한 아이가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독특하고도 이상했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말이 없었고, 또 특별하지는 않을 정도로 사람들하고 어울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지만 또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인색하기 까지는 않았고, 아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색채로 자기 자신만의 삶을 빚어나갔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리움 당하지 않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으며, 너무 사랑받아 일찍 사라지지도 않는 그 아이는 확실히 이상하고도 독특한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아이는 그녀의 새로운 삶이 열여섯 살에서 시작되어도 모든 것을 한결같이 그대로 되풀이했다.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 변하는 이 이상한 오소리의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었다. 그 아이는 언제나 말없이 조용했지만, 또 언제나 말없고 조용한 모습 그대로 삶을 이어나갔다. 같은 사람을 짝사랑하고, 같은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언제나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몇 번 심술이 나서 그를 바꿔보려고 시도도 했었다. 친해져 보려고 애를 써보기도 했고, 마음을 빼앗으려고도 시도했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의 남자아이가 알기에는 너무도 깊고 다채로운 삶들을 이미 살아보았었고, 그 누구보다도 괴이하고 특별한 것들을 모두 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몰아치면 몰아칠수록 그는 부드러이 모든 것을 흘려보냈다. 마치 억새가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는 않듯이 그는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삶을 꺾지는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던 셈이다.      

수십 번, 수백 번, 어쩌면 그녀가 인지하지도 못했을 영겁의 세월 동안마저도 그는 그저 살았다. 조용히 듣고 부드럽게 웃으며 항상 살았다. 똑같은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그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그녀가 경험했듯이 되돌아오는 삶들은 무엇도 예전과 같지 않았고, 그 안에서 똑같다는 것은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야겠다고 거듭 말하는 이들 중에서 자기 자신에 충실할 수 있는 이 없고, 후회 없이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 중에선 후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대답했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아가겠다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에게 충실할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이제 와서야 그에게 물어봐야 했었다. 너도 오소리꿈을 꾼 것이냐고, 그래서 변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냐고 말이다.


 

    





별이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제야 그 눈빛이 무엇을 닮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천년을 살아온 오소리 같은 눈빛이었다. 궁금증과 의아함을 가득 담아 별이는 나를 꿰뚫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미 천 번의 삶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서슴지 않고 물어보았다.     

“이번이 천 번이라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대로 사라져?”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아마 사라지지 않을까? 드디어 말이야.”

“그럼 그건 그다지 이상하거나 슬픈 이야기는 아닌 거네.”

“왜?”

“원래 사람은 이야기가 끝나면 사라지잖아. 너도, 나도. 우리는 다 같이 사라지는 거지.”

“좀 무섭게 들리기는 하는데 어쨌든 좋은 일이라는 거지?”

“그럼. 잘 살았잖아. 나는 한 번, 너는 천 번.”

“그렇지.”

“그럼 됐어.”     

별이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너는 정말 이번이 처음인 거지? 오소리도, 오소리 꿈이지도 않은 거고?”

“글쎄? 나는 이번이 1000번 중에 첫 번째 일지도 모르겠는데?”     

별이는 활짝 웃으며 얘기했다.     

“넌 참 이상한 아이야.”     

나는 참 이상한 아이에게 그 말을 들으며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그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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