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스무살

스무 살의 사춘기, 방황 그리고 취업

by 오뚝이


대학생활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수업을 빠지고 광장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고 맥주캔을 깠다. 랩(rap) 동아리에 들어간 친구는 머리를 삭발했고 밴드에 들어간 친구는 선배들이 술을 너무 많이 먹여서 한 달 만에 동아리를 탈퇴했다.

그 모든 게 그저 재밌었다.



해방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자유였다.



당연히 성적은 엉망이었고 항상 모범생이던 딸이 매일 술을 먹고 외박하는 날이 많아지자 부모님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요즘 취업이 잘 안 된다던데. 그렇게 막 놀기만 해도 되는 거니?”



뭐 어때. 나는 명문대생인데.

어디든 들어갈 자리는 있겠지.

하며 부모님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쌓아온 엄마에 대한 섭섭함과 상처가 터져서 엄마에게 심한 적대감을 갖게 됐다.



따뜻한 말 한마디.

그게 내가 바란 전부였는데…






혼돈의 1학년과 2학년을 보내고 3학년이 되었다.

학기로는 5학기였다.

학교 매점 앞에서 다른 과 친구를 만났다.


“야 어디가?”


“나 취업 스터디 가지.”


“취업 스터디? 취업 스터디를 벌써 해? 아직 5학기잖아.”


“우리 과 선배들은 지금부터 해도 늦는다고 난리야.

요즘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데.”


“아… 그래…?”


“그래! 너도 지금부터라도 해. 취업 잘되는 경영학과, 경제학과 학회들 들어가서 스펙 쌓고 토익도 미리 따놓고 쫌!”



“알겠어…“



갑자기 정신이 차려졌다.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친구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당장 급한 건 엉망인 성적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1학년, 2학년 때 C나 D를 받은 과목들 중심으로 재수강을 해서 성적을 올렸다. 3학년이 되어서야 학교 도서관에 처음 가봤다. 아직 학기 초임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 자리가 없었다.



‘와… 나 빼고 다들 열심히 살고 있었네.’



3학년 여름방학에 나는 캄보디아로 해외봉사활동을 갔다. 그곳에서 이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한지 두 눈으로 목격했다.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맨발의 아이들, 도로 위에서 구걸을 하던 사람들 곁으로 벤틀리가 지나갔다. 그때 이후로 내 삶이 조금은 달라진 거 같다.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꿈은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것이 되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대외 활동을 하고 이런저런 강연들을 찾아다니며 소위 스펙을 쌓았다. 졸업학기가 되어 비영리단체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취업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하고자 했던 ‘국제개발협력’의 세계는 고스펙, 현장 경험이 풍부한 지원자들로 넘쳐났던 것이다.



영국에서 ‘국제개발협력학’이나 ‘인류학’, ‘경제학’ 등의 석, 박사 학위를 따고 들어온 사람들, 난민 캠프에서 장기간 봉사활동을 한 사람들 등등…

나는 그들에 비해서는 그저 뜨거운 열정만을 가진 풋내기일 뿐이었다. 이 일은 돈 있는 자들이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스펙이 짱짱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위축되었다. 그저 어디든 취업하고 싶었다. 대기업, 은행, 스타트업 등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었기에 더 조바심이 났다.



겨우겨우 한 단체의 최종면접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감사하게도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입사한 곳은 아프리카 지역에 경제적 도움을 주는 단체였다. 직원은 나를 포함해서 달랑 4명이었다.



굴지의 대기업을 다니다 온 중년의 과장 한 명과 영국에서 석사를 하고 해외 이곳저곳에서 일하다 온 팀장 한 명, 인권분야에서 꽤나 굵직한 일들을 한 후 단체를 설립한 센터장 한 명, 그리고 나…



센터장은 사무실에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사무실에 왔고 그날은 어김없이 회의를 했다. 과장은 딱히 일에 열정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나이가 있어서 편한 일을 찾아서 들어온 거 같았다. 팀장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단체의 창립멤버였기 때문에 일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단체의 일은 모조리 팀장의 손을 거쳐야 했다. ‘이러려면 나를 왜 뽑은 거지?’ 싶을 정도였다.



일도 일이지만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통장에 찍힌 월급이었다. 최저시급. ‘이래서 이 시대 청년들을 4포 세대라고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짜디짠 월급.

비영리단체의 특성상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후원금의 대부분은 사업을 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직원들의 몫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번만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해외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비영리단체직원들의 희생과 봉사정신만을 강요했다. 처음의 열정은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나는 그 안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한 무료 강연 광고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공익변호사 활동 경험 나눔’



내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공익변호사’.


(출처: pinterest)



+ 이 글 속의 단체와 인물은 허구입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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