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 그리고 트로트의 시대가 도래했다. 미스 트롯의 우승자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트로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TV는 물론이고 카페에서마저 트로트가 나온다. 평소 과묵하시던 외할아버지의 방에서는 트로트 노래가 끊이지 않곤 했다. 언제나 자그마한 카세트를 들고 다니시며 트로트를 즐겨 들으시던 할아버지셨다. 그 당시만 해도 트로트는 내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명곡 100선 등의 카세트를 모아놓고 파는 코너가 떠오르며 엄지를 들고 열심히 좌로 우로 흔들어 재껴야 할, 관광버스 안에서 아주머니들의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느낌이었다.
미스터 트롯이 끝나고 주변 친구들에게서 트로트 때문에 힘들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면 일어나서부터 잘 때까지 거실에서 트로트가 나온다는 것이다. 채널을 돌려도 트로트를 주제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나오고 또 나온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집에 TV가 없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하던 카페의 매니저님이 트로트를 좋아하시는지 임영웅을 좋아하시는지 관련 노래들이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가 버렸다. 심지어 플레이리스트는 저장되어 순차적으로 매일 똑같은 노래가 같은 시간에 플레이되었다. 내 취향의 곡을 추가해보기도 했지만 그 곡들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카페를 그만두게 될 즈음 트로트를 흥얼거리기도 했던 나였다. 매니저님의 특훈 덕에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할머니와 주야장천 사랑의 콜센터라는 프로그램을 보곤 했다. "저건 누구야?" 하고 물으면 할머니가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게 좋아서 더 보았다.
앞의 경험들은 예행연습이었다는 듯 더 큰 게 와 버렸다.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꺼지지 않는 TV와재방송의 콜라보레이션이 이뤄낸 트로트의 파라다이스, 요양원. 선생님들이 기본적으로 틀어놓는 채널은 무슨 영문인지 매주 콘텐츠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아침에는 트로트를 비롯한 과거 가요들이 나오다가 그게 끝나면 몸에 그렇게 좋다는 녹용과 홍삼을 파는 광고가 나오고 그마저도 질릴 때쯤 잠이 솔솔 오는 꿀잠 쿨링매트를 파는 광고가 나온다. 어떤 파트가 나오고 있는 지로 대강 시간을 예측하기도 한다. 방마다 설치된 TV는 가끔 뉴스를 보시거나 아침마당과 같은 프로를 보실 때를 제외하곤 항상 트로트 프로그램이 나온다.
당연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어르신들에게는 스마트폰이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다. 자식 된 마음으로는 심심하실 텐데 스마트폰이라도 쓰시면 좋겠지만 우리 부모님도 어려워하시는 요망한 기계를 어르신들이 다루기는 더 힘들다. 요양원에도 딱 한 분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분이 계신데, 언제나 배우려고 하시는 멋진 분이시다. 그분의 방에 들어가면 스마트폰에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지신다. 우리가 당연시 하는 유튜브 하나를 그저 시청하기 위해서도, 자식들이 보내준 링크를 열기 위해서도 꽤 많은 노력을 들이시는 것이다. 이마저도 어느 정도 건강하신 분들에 한정된 이야기고, 핸드폰 자체가 없으신 어르신이 더 많다.
코로나 예방접종을 맞고, 열이 조금 오르고 어지러워 이불속에서 하루 가까이 나오지 않았었다. 중간중간 잠도 자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잡고 있던 것은 휴대폰이다. 유튜브가 질릴 때 넷플릭스를 돌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가 아이쇼핑도 한다. 이마저도 금방 질려버려 잠에 든다. 일 분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이 분 같다. 문득 어르신들이 생각났다.
이런 생활을 어떻게 기약 없이 하시는 걸까.
싫기만 했던 트로트가 좋아진 건 그 질문부터였다.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이 누군가에게 삶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산다. 유튜브로 올라오는 수많은 이슈들과 세상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듣는다. OTT 서비스의 시작으로 몇 년을 종일 영상만 봐도 다 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작품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개인 중심으로 선택권을 넘겨주었지만 아직 TV프로는 방송사가 일방향적으로 소통한다. 대화할 사람도 없이, 변하는 것은 TV 채널뿐인 그들에게 트로트 프로그램이란 바꿀 수 없이 귀중한 선물이다. 트로트라는 장르를 내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진 않지만 이제는 흘러나오는 트로트에 귀를 막지 않게 되었다. 생각보다 인생을 관통하는, 삶의 진한 여운을 담은 가사들이 많다. 요양원에서 우연히 듣게 된 김민정의 [꿈]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3포 세대를 넘어 다포 세대라 불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청춘들에게 오히려 필요한 노래가 아닐까? 이 풍진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한 방울의 트로트 정도 떨어뜨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코로나로 면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르신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고 위로가 되어준 트로트 프로그램에 이제는 감사하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