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같은 곳 요양원?
현재는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고 있지만 나의 본캐는 대학생, 홍익대학교에서 건축학과를 다니고 있다. 본교의 유현준 교수님께서 미디어에 자주 나오시는 영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건축과 관련된 질문을 간간히 받는다. 인간은 공간을 벗어날 수 없기에, 더 많은 이가 건축에 관심을 갖고 좋은 공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활을 영유하는 이들의 공간에 대부분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직 아쉬운 부분이다. 좋은 공간에 목마른 이들은 따로 있다. 요양원에 일하다 보니 이 공간은 어떤 공간인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조사에 따르면 노인 1명이 사망 전 10년 동안 요양원에 입원한 일수는 평균 904일로 나타났다. 2년 반의 기간은 생각보다 짧아보일 수 있지만 아니다.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공간을 생각해보자. 집, 일터, 카페, 음식점과 같은 작은 공간들과 영화관, 역, 공원, 쇼핑몰, 마트 등의 넓은 공간들 그리고 길처럼 머무르지는 않지만 지나가는 공간도 있다. 밥을 먹고 카페를 갔다가 공원을 거닐고 영화를 한편 본 뒤 간단히 장을 봐서 집에 돌아온다. 우리에게는 위에 나열한 공간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직장을 다녀오는 단조로운 평일을 생각해봐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와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계속해서 바뀐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코로나로 자가격리를 진행해본 이들이라면 그 답답함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주의 기간이 더욱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나를 둘러싼 공간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늑함과 편안함을 제공해주던 방 안의 가구들과 물건들은 어느새 따분하게, 지루하게 또는 얄밉게 계속 그 자리이다. 또한 내 자의로 자유롭게 집 밖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이 괴롭다. 마스크를 쓰고 몰래 산책이라도 다녀오고 싶지만 꾹 누르고 창을 열어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으로 그친다. 2년 반이라는 기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린 어르신은 자주 이렇게 표현하신다.
여기는 완전히 창살 없는 감옥이여.
얼마나 거동이 가능한 지의 정도는 어르신마다 다르다. 그에 따라 그들이 가진 공간의 크기에도 차이가 있다. 목욕을 위해 휠체어에 태워져 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침상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들이 있다. 어르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1.52m^2. 평 수 하나를 늘리고 싶어 아득바득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역설적으로 네가 결국 누릴 수 있는 공간은 반 평 도 안된다고 하면 어떤가. 워커나 휠체어를 이용하실 수 있는 어르신의 경우 공간의 크기가 조금 더 커진다. 그들의 방, 화장실, 복도, 거실의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 실. 가끔씩 병원을 가실 일이 있어 외출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정도의 공간이 허용된다. 요양원에서는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어르신들께 다리 힘을 잃어버리시지 않도록 산책을 가자고 강권한다. 어르신을 일으켜 나아가는 곳은 아까 걸었던 길이며 아까 있었던 그곳. 흥미를 이끌만한 미지의 공간은 출입 제한. 그들의 팔을 잡고 모시는 내가 다 죄송해진다. 어제도, 오늘도 없는 커피 자판기를 찾아 돌아다니시는 어르신을 자리에 앉히고 커피를 타 드렸다. 매일 거니시는 공간이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생긴 지를 잊어버리신 게 오히려 심심하시지는 않으시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한 번 들었다.
한국의 건축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아파트이다. 뒤를 이어 층층이 간판들이 붙어있는 상가 건물이 떠오른다. 아파트와 상가를 관통하는 것은 효율과 이익의 극대화. 본격적으로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이후 그들은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왔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지어지는 과정 속에 없다. 아파트와 상가는 불특정 다수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고 답이 정해져 있는 공간에 우리의 삶과 상황을 끼워 맞춰 살아간다. 적당히 편리하지만 완벽히 맞춰져있지 않다. 이제는 한 공간을 3대가 공유하는 사회도 아니고, 한국에서 부동산 시장은 경제의 거대한 하나의 축이니 오직 나만을 위한 집을 짓는 것은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것 아닌가 할 수 있다. 복잡한 현대 사회 구조를 고려하면 아파트를 마냥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그러나 요양원과 같은 공간만큼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용하시는 어르신이 공간의 주인이 되어 설계되어야 한다.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곳은 10층 높이의 상가 한 층을 사용하고 있다. 역도 가깝고 상가가 모여있는 곳에 위치하여 여러 식당과 편의시설들이 가까이 있으니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요양원의 입지가 좋다. 어르신들을 뵈러 오는 보호자들도 비교적 편리할 것이다. 이전에 잠깐 근무했던 요양원은 3층 높이의 작은 건물 전체를 사용했다. 역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고, 주변 시설도 편의점을 하나 가려면 10분은 걸어가야 있는 곳이었다. 한 곳은 상가 내에, 한 곳은 건물 전체를 사용하고 그를 둘러싼 환경도 많이 다르지만 내부는 두 곳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 복도가 지나가고, 방이 복도를 따라 배치된다. 이름만 요양원이지 상가의 실들을 방으로 바꾸고 복도에 긴 의자를 두고 홀을 프로그램실로 바꾼 것이 다였다. 요양원이라는 프로그램에 건물을 맞춘 것이 아닌 건물에 요양원을 끼워 넣었다.
실장님께서 퇴사하시면서 그가 원래 관리하시던 나무와 식물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넘어왔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키우려다 보니 식물을 다 죽여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한 번 물을 줘보니 언제 그랬었냐는 듯 삶에 초록빛을 추가하는 일은 즐거웠다. 화분 속 흙으로 물이 쭉 들어가는 것은 마치 아기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듯, 뿌듯한 기분이 되는 경험이었다. 한 번이라도 더 주고 싶어 왜 식물들은 우리처럼 매일 물을 먹지 않는 건지 동료 요원과 한탄하기도 했다. 물방울이 맺힌 잎사귀에 햇빛이 쨍하게 뜨면 이게 힐링이구나 하고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물의 맛에 푹 빠져있던 그즈음, 동료 요원과 테라스에서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날따라 햇빛이 좋거나 식물들이 더욱 푸르지 않았다. 물을 다 주고 호스를 잠그고 다시 요양원으로 들어가던 우리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아니 형, 형도 느꼈어요?"
두 남자의 발목을 잡은 것은 요양원의 칙칙한 분위기였다. 환하던 밖과 대비되는 어두운 건물 안은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시원하고 서늘한 그늘이 아닌 어두컴컴한 창고에 들어선 우울한 느낌이었다. 분명 공기는 알맞게 건조했지만 습하게 느껴졌다. 억지로 그 우울을 치우려는 듯 켜져 있는 인공조명들은 더 공간을 처량하게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그 조명들은 테라스를 나서기 전의 우리에게 그저 밝은 불빛이었다. 어쩌면 요양원의 어르신들이 그런 공간 속에 있다는 생각에 더욱 감정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경험으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변하지 않는 공간은 감옥이다. 아린 어르신이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느끼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요양원과 같은 공간만큼은 짓는 자의 편의가 아닌 사용할 자의 편의를 생각하여 건물을 설계하고 시공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경계를 자유롭게 설정하지만, 그리고 경계를 다시 없애고 그 밖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짐멜은 이렇게 말했다. 죄수의 경우 본질을 박탈당한 인간들이다. 경계를 설정할 자유를 빼앗기는 것. 그들이 지불해야 할 죄의 삯 중 하나이다. 하지만 죄가 없이도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요양원의 역할을 고려해볼 때 어르신들에게 무조건적인 자유를 쥐어드릴 수는 없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그 자체로 자유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최소한 보장해야 할 것은 변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과 어제가 다를 수 있는 곳, 새로움을 언제나 끌어들이는 공간이 요양원이 되도록 고민하고 애써야 한다. 그 시작은 요양원을 사용하는 어르신들이 공간의 주인이 되는 것부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