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영화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 특히 한국 드라마는 호흡이 너무 길고 일부로 늘어뜨린 느낌이 들어 보기가 어렵다. 그나마 옴니버스의 형식을 취한 드라마, 예를 들어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나 최근에 큰 화제가 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드라마는 한 회마다 정리되어 볼 만하다. 이런 내게 인생 드라마를 뽑으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드라마는 <나의 아저씨>다. 지안과 동훈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이 평안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이 내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몇몇 대사들은 인상이 깊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드라마의 1화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부분이 있었다. 여 주인공 지안은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있었는데 요양원에 내야 할 비용을 몇 달간이나 지불하지 못해 결국 할머니를 본인의 집으로 모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 속 요양원의 모습들을 조금씩 비치게 되는데, 이를 보는 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첫 번째, 요양보호사의 불친절한 태도
청각장애를 가진 이봉애 씨에게 말로 설명하는 요양보호사님?
첫 장면은 요양보호사로 보이는 선생님이 지안의 할머니 이봉애 씨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비용을 몇 달간 연체되어 어르신이 곧 쫓겨날 상황이라고, 손주분 어디 갔느냐고 묻는 선생님의 모습에는 다소 짜증이 섞여있다. 나는 안 들린다고 귀를 손으로 가리키며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대화를 끊으려는 봉애 씨의 태도 때문일까. 결국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말한다.
"하.. 버린 거야 이거"
요양보호사님의 태도는 보호사님 바이 보호사님이다. 주변 선생님들도 어르신을 대하는 방법과 마인드에는 개인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저분이 일에 지쳐 짜증이 평소에도 많으시고 부정적인 캐릭터라고 이해하더라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다.
선생님들은 요양원에 처음 오시면 어르신들이 어디가 불편하신 지를 숙지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 일이다. 청각장애를 가지고 계신 줄 알고 있는데도 저렇게 귀에 대고 소통하기보다 수화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글씨라도 쓰며 소통하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몇 달간 요양원에 함께 지냈는데 저렇게 남 대하듯 하는 것도 현실과의 거리가 있다고 본다. 요양원마다 선생님들의 일하시는 방식이나 분위기가 다르니 일반화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부딪혀야 하는 곳이 요양원이다. 나만해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어르신들이 먼저 꺼내시기도 하고 내가 여쭙기도 하는데 하물며 선생님들은 어떨까. 손주를 생각해 봉애 씨가 이야기하길 꺼려하셨을 수 있다. 다만 요양보호사라는 존재는 당신의 몸을 씻기고 불편한 점을 해결해주며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다. 현실에서는 드라마의 모습보다는 유대감이 더 쌓였을 게 분명하다.
두 번째, 요양보호사의 부재
침상 채로 탈출을 감행하는 지안
요양원은 등급과 방마다 다르지만 매달 150~2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구체적인 연체 일수는 나오지 않지만 3개월만 해도 500만 원, 반년이면 천만 원에 가까운 돈이다. 보통은 장애나 질병을 가진 분들은 등급 심사에 따라 국가에서 80% 이상의 지원금이 나와 보호자의 부담이 이렇게 크지는 않다. 하지만 지안은 이를 몰랐기에 큰 액수가 오롯이 다가왔을 것이다. 나 하나 지탱하기도 어려운 삶인데 병든 할머니라는 책임이 짐으로 얹어졌다. 지안은 결국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비용을 두고 탈출을 결심한다.
지안이 선택한 시간은 늦은 밤. 밤은 어르신들이 주무시는 시간이다 보니 선생님들도 낮보다는 덜 분주하고, 덜 긴장된 시간대이다. 그러나 요양원은 폐쇄적인 공간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어르신들이 예상치 못하게 밖으로 나가시는 경우를 대비해 밖으로 통하는 문이 열릴 때는 벨이 울린다. 이것은 새로운 사람이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입구 근처에는 일하는 인원이 상시 배치되어 있기에 입장부터가 아무도 모르게 봉애 씨를 데려가려는 지안에게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르신들이 주무시는 밤에도 선생님들이 방마다 배치되시지는 않지만 정해진 곳에서 언제나 응급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위치하고 있다. 지안이 큰 소리가 나는 침상을 끌고 넓은 요양원을 활보하는 동안 선생님을 한 번만, 그것도 마주칠 뻔한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침상에 달린 바퀴 덕에 생각보다 끄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물론 경사진 곳에서도 한 명의 힘만으로 잘 제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는 특히 경계되는 대상 중 하나이다
세 번째, 사회복지사의 부재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은 지안의 고생이 사실 없었을 수 있었다. 드라마 초반에 나온 한 문제가 중반부를 달려가며 해소된다. 봉애 씨 같은 경우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 무료로 요양원을 이용할 수 있다고 동훈이 조언을 건넸고, 심사에 통과한 할머니는 결국 요양원에서 지낼 수 있게 된다. 당연한 정보 하나 알려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어른이 없어서, 지안은 모든 것을 홀로 껴안았다. 할머니라는 큰 짐이 실은 지안에게 짐이 아닐 수 있었다는 점은 지안과 우리를 허탈하게 한다. 드라마의 주제이기도 한 부분을 더 극대화시킨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이미 요양원에 입소해있던 순간부터 이 설정은 무너져있어야 마땅하다. 입소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많은 서류가 필요하고, 검토가 이어진다.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지안에게 마땅히 나타났어야 할 어른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드라마인데 뭐 그리 깐깐하게 보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 예민했다. 드라마의 호흡이나 분량을 신경 쓰다 보면 이런 세세한 디테일들까지 챙기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불행을 더 해줄 용도로 대충 소비되고 넘어가면 안 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없으면 요양원은 돌아가지 못한다. 선생님들은 주간과 야간을 교대로 돌아가며 항시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친구들 사이에서 폐를 끼치는 순간을 "똥 싼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리고 그를 수습하는 사람은 "똥 치웠다." 하고 말한다. 성인의 변을 치워본 이들에게 우리의 대화가 참 귀엽다고 느껴지지 않을까. 남의 분변을 치우는 별 일이 하루의 당연한 일과가 될 때까지 수많은 참을 인을 새기는 이들이 있다.
식사 시간은 자주 어르신들의 인질이 된다. 단순히 반찬 투정이 아니다. 당신은 당장이라도 죽고픈데 이 연놈들이 밥을 먹여 억지로 살아가게 하는 게 아닌가. 삼시세끼 치열한 공방이 이어진다.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는 어르신은 음식을 선생님께 뱉는 것으로 그 의지를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는 이들이 있다.
입을 열지 않아 말을 잃어버리기 직전인 어르신께 조금의 소리라도 따라 하시라고 동요를 부르는 이들이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이 있다. 옆에 붙어 낙상과 긴급 상황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다.
드라마에는 없는 현실의 모습이다.보이지 않는 곳과 애써 보려고도 하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는 타인의 생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불친절하고 무관심하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이들을 드러내기보다 좀 더 소중하고 고결한 삶으로 그려내도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