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품들에 대해서
이우환의 작업이 난해하고 지루하기는 해도, 이해가 안 갈 정도는 아니다. 그것을 철학의 깊이로 받아들일 것이냐 지적 허세로 받아들일 것이냐는 각자의 자유다. 정작 더욱 어렵고 결국 이해의 관문을 뚫지 못하는 작업은 나에게 이건용, 양혜규 등이다.
이건용의 작업은 메를로 퐁티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메를로 퐁티에 대해 공부해 봤는데, 알듯 말 듯 어려웠다. 내 지능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라 노력해도 별 소득이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건용의 작업은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작업 같다.
내가 보기엔 작가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고 작가 자신도 간결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이해의 대상이 아닌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에 이끌리며, 그림을 그린다는 개념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작업 같다. 어렵긴 하지만 막 꼬아놨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냥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크게 저항감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양혜규의 작업은 훨씬 더 방대하고 입체적인 난해함이 있다. 어떤 작품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일단 나의 수준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것은 맞는 것 같다.
나는 능력이 모자라서 닿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닿을 수 있고 작가가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더 어려운 작품도 많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욱 더 어렵고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작업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건용이나 양혜규처럼 유명하고 넘사벽의 입지를 획득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종종 눈에 띄는 A 작가가 있다.
A 작가의 작업을 봤다. 난해하고 알 수가 없는 내용이어서, 아주 어려운 물리 과목의 시험공부를 하는 것처럼 온 집중력을 동원해서 보고 또 보고, 작가의 변과 작품 설명을 읽고 또 읽어 봤다. 적어도 십수 번 이상은 같은 글을 읽고 또 읽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어 봤다. 열심히 파면 무언가 나올까 하는 기대에 계속 팠지만 그 무언가를 결국 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작품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을 할 수가 없는 작품인 것 같다. 그런데도 대단한 것은 엄청난 길이로 뭐라고 뭐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내가 바보인 건가 싶다. 더욱 더 몽롱하고 아스라하게 더욱 난해한 단어들을 사용해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거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 수준이 부족한 것인데, 그것이라면 충분히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에겐 말거품이지만, 그에게는 초현실적 이미지와 같은 모호하고 아름다운 버블인 것인가? 보는 사람이 얼마나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작가의 관심사가 아닌 것 같다. 무작위 랜덤 사물들이 조합된 초현실적 분위기에서 ‘꿈보다 해몽’처럼 보는 사람이 그냥 마음대로 무언가를 건져 올리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작가는 쾌감을 느낀다. 좀 더 넓게 퍼뜨려 많은 사람과 얕게 교감할지, 좁은 채널에서 천 명 중에 한 사람이라도 깊게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할지는 작가가 선택하는 것이다. 후자를 선택하는 작가도 많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헤매는 999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 중 900명은 별 관심이 없을 것이고, 90명은 조금 관심을 두다 이내 포기할 것이고, 9명은 닿아 보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다가 좌절하고 때로는 앙심을 품기도 하고 돌아설 것이다. 990명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지만, 거기서 삽질을 하고 좌절을 하고 있는 9명은 뭔가?
작가가 그런 것까지 꼭 신경 써야 할 의무는 없고 그렇게 하자면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급속도로 좁아진다. 작가에게 표현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고 내 입맛에 맞춰 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법이다. 결국 그 9명은 혼자서 바보짓을 한 것이다. 그놈의 진지본능이 문제인데, 그 9명 중에 속하는 나는 내가 알아서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니, 스스로 삭이고 책임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