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좋아서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인가? 위대한 작가가 되었기 때문에 작품에 힘이 실리는 것인가?
앤디 워홀의 작품을 처음 보면, “이게 뭐야?” 하는 생각과 함께, 위대한 작가가 되었기 때문에 작품에 힘이 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미술사를 공부하고 그에 대해서 파 보면, 그것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를 왜 위대한 작가로 기록하는지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일단 유명세를 만들어내는 그의 연예인적인 신비성과 사업가적 재능은 차치하고, 그의 압도적 에너지와 쿨한 이미지를 들 수가 있다.
에너지라는 것이 전투력이 뿜어져 나오는 역동적이고 이글거리는 그런 게 아니다. 굉장히 차갑고 시크하면서 기존의 권위에 쫄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앤디 워홀은 그동안의 미술의 모든 규칙을 다 깨버린 장본인이다. 피카소가 그랬던 것처럼.
“야 미술 뭐 있어? 진지 빨지 말어. 뭘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의 구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거야? 그거 우습지 않아? 그냥 나는 이렇게 대충 할란다. 이것도 미술이라면 미술인 거지.”
이런 식으로 말하며, 고급 미술의 위상을 일거에 무너뜨려버렸다. 그렇다고 미술의 위상이 진짜로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존의 방식과 권위에 항거하며 기존에 대단한 예술 축에 끼지도 못하던 싸구려 방식을 기존의 콧대 높은 작품들의 방식들과 맞먹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의 진지함과 심각함을 조롱하고 위상을 끌어내리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의도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될 수가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기존 미술의 권위가 내려오기보다는 워홀의 싸구려 방식이 위대한 미술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기존 미술의 권위 위로 동등하게 또는 더 높이 올라가 버렸다. 미술이 뭘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고 저항하며 권좌에 등극해 결국 자신이 더 대단한 것이 되어버리는 이 아이러니.
예를 들면 싸움장과 아주 허술한 방식으로 맞짱 떠서 그의 별 볼일 없는 실체를 폭로하고 조롱하려 했으나, 싸움장과 맞짱 뜬 사람만 더 신화화되고 더 높은 계열로 올라가 버린 셈이다. 누가 그렇게 헐렁하고 당시로서는 천박하게 여겨졌던 판화 방식으로, 그냥 손쉽게 사진을 이용해서 대충 제작하고 천연덕스럽게 작품이라고 제시할 수가 있었겠는가? 분명 천박하고 재기 발랄하며 쿨하게 일을 처리해 버리는 카리스마가 있다.
그 당시 보통의 관념은, “에이 어떻게 초상화를 사진을 이용해서 그렇게 조잡하게 처리해? 그건 예술이라 할 수 없어. 기술적으로도 하이 테크닉도 아니고, 조잡한 싸구려 기술일 뿐이야. 무릇 예술이란 작가의 혼과 손맛, 그리고 정성이 담겨야 해…”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누가 작품의 소재로 <달러 사인_1982>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지만 천박하게 취급되기 쉬운 것들을 그려낼 수가 있었는가?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위선적인 권위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야 이것도 작품이야. 사실 인간들 본질적인 욕망 이거잖아?” 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주 조잡하고 조악해 보이는 방식으로 뻔뻔하게 툭 던져 제시하는 그 위대함.
다들 예술의 고귀함과 신성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필사적으로 감추는 돈에 대한 욕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까놓는 그 대범함. 작업실의 신비감을 유지하려 하고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 마냥 작업 공정과 조수들의 존재 공개를 꺼리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라 이름 짓고, 자신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일을 시키는 사업가일 뿐이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쿨함. 근엄하고 엄숙한 진지충들(헉. 나? …)에게 날리는 일침 같은 작업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그런 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타고나는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려는 처절한 용기와는 차원이 다른, 그냥 두려움 자체를 모르는 용기.
과거 대학 시절에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아유 이 짜식들아. 두려움을 못 느끼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둔한 거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정말로 강한 거란다.” 하고 겉 담배 은은하게 피우며 인생을 좀 아는 선배인 척 폼을 잡은 적이 있다. “형 멋있어요!”, “와 오빠, 감동이에요!” 존경의 눈빛을 보내준 몇몇 순수했던 고맙고, 붙잡고 꼰대 짓해서 미안한 동료들이 생각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강함 정도는 게임이 안 되는 타고난 강함이 있다. 앤디 워홀이 그런 경우이고, 우리는 가끔씩 그런 강자들을 만나고 기에 눌린다.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 마우리치오 카텔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등이 그런 경우이다. 그들의 뻔뻔스러움과 대담함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투비인 것이다. 영화 <타짜>에서 압도적 카리스마를 가진 도박 제왕들 - 아귀, 마귀 같은 캐릭터들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제프 쿤스 (작가 본인!, 이 작품(?)은 굉장히 약한 편)
실제 시체와 함께 데미안 허스트 (이런 미친놈...)
마우리치오 카텔란 (얼마 전, 벽에 붙인 바나나 작품 주인공)
그건 마치 벌거벗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지나갈 수 있는 뻔뻔함보다 더한 뻔뻔함과 당당함이다. <캠벨 수프_1962>나 <브릴로 박스_1964>등의 작품도, 너무나 뻔뻔스럽고 황당한 작품 제시일 수 있는데, 바꾸어 말하면 누가 그만큼 뻔뻔하고 용감할 수 있겠는가? 그냥 뻔뻔하고 용감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논리와 설득력이 환상적이다.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이 고정관념을 파괴해 버리는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무언가가 있다.
캠벨 수프_1962
브릴로 박스_1964
아 말하다 보니 앤디 워홀의 위대함에 반기를 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이거...
그런데 그것이 필연적인 위대함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 정도의 뻔뻔함이 있으면 다 위대한 작가로 인정해 주는가?
그것은 아니다. 이미 앤디 워홀은 위대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우리가 그것을 합리화시킬 명분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답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유명세와 천문학적인 작품 가격에 의해서 그의 위대함이 더욱 튼튼해지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를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더 미화되고, 더 위대한 논리가 그럴듯하게 만들어지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시뮬라크르’의 의미까지 그가 정교하게 의도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가의 작품을 최대한 더 좋게 해석을 하고 평론을 하고 포장을 하다 보니 소름 끼치도록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해 본다.
그럴 때 작가는 노나는 것이다. 본인이 치밀하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더욱 환상적인 논리와 명분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무궁무진하게 더욱 과대평가되는 모든 위대한 작가들의 경우 어느 정도는 다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똑같은 작품을 앤디 워홀이 아니고 다른 작가가 했다면 지금의 결과와 같을까? 아닐 것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색다른 시도를 하고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찾아보면 많이 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놀라운 통찰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고, 별거처럼 보이지만 알고 나면 별거 아닌 경우도 많다. 관심을 갖고 감정 이입을 하느냐의 문제인데, 애정을 갖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 보석 같은 이야기와 가치를 품고 있는 작품들은 많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앤디 워홀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앤디 워홀은 연예인보다 더 유명 인사였고, 무슨 일을 하든지 관심과 해석의 대상이었다. 앤디 워홀이 아니었다면 그 작품들이 그렇게 미술사에 남는 작품이 안 되었을 수도 있고, 앤디 워홀이라면 그런 작업들 말고 다른 작업들을 했어도 그는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예술가와 정치인은 유명세가 깡패이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은 적어도 그래도 서사가 꽤 탄탄하다. 납득을 시켜주는 미덕이 있다. 훨씬 더 많은 다른 위대한 작가들은, 그들에 대해 파보고 작업에 대해 공부해 봐도 나에게는 도무지 그 이유가 와닿지 않는다. 그저 위대한 작가이기 때문에 작품에 힘이 실리는 작가들일뿐이다.
그래도 내가 앤디 워홀을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애써서 자신의 작품에 과도한 펌프질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건조하고 시크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우환은 점 하나 찍는 것이 절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봐도 엄청 쉬워 보이는데…) 엄청난 것들이 들어 있다고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는 반면에, 자신의 작품에 별 내용이 없다고 말하는 그 쿨함이 나는 좀 멋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만약 당신이 앤디 워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나의 그림의 표면과 영화, 그리고 나를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내가 있다.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는, 애써 꾸미지 않는 그의 단순함과 솔직함이 멋있다. 그렇게 본인은 별거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별거 있다고 생각하는 역설적인 상황도 부럽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안간힘을 다해, 우주의 논리와 예술가의 혼 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결과는 바뀐다
어떤 작가라도 성공할 이유 50개 이상과 실패할 이유 50개 이상은 가지고 있다. 앤디 워홀도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50개가 넘지만, 만약에 실패했다면 실패의 이유 또한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작가는 성공할 수밖에 없었고 어떤 작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성공한 작가는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이고 실패한 작가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일 뿐이다.
주사위를 다시 던진다면 전혀 다른 숫자가 나올 수 있듯이, 다트를 다시 던진다면 전혀 다른 데 꽂힐 수가 있듯이, 판을 다시 시작하고 원래의 구성원들의 위치를 랜덤으로 섞어서 다시 리셋 버튼을 누른다면 전혀 다른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아마 90% 이상의 명단이 바뀔 것이다. 피카소와 앤디 워홀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이름들이 등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그러한 가정은 미술의 특성과 본질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