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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May 14. 2024

예술은 자본에게 1초만에 무릎 꿇는다


작가는 무엇인가?


컬렉터 입장에서도 돈에 대한 욕망과 작품성에 대한 탐닉을 구분하기가 힘들어지듯이, 작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욕망의 기반 위에서 살면서, 인정하기 싫으니 부정하고 그 욕망을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자존심 강한 예술가인 척하고 있지만, 나는 결국 부자들에게 선택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미술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들에 의해 선택되어 성공하는 예술가들은 결국 체스 판의 말일 뿐이다.

 

그것의 이면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충분히 회의적인 부분을 발설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일의 핵심적인 제조부문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모순적인 상황은 무엇일까?

어떻게 자기 합리화를 해야 할까? 예술적으로다가 한 번 해봐야 할 텐데…


예술이라는 것이 실체 안으로 파고들면 아름답지 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고, 과도한 연기로 가리고 있는 알고 보면 별 거 없는 인간의 욕망만 남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아름답지 못하고 매우 추한 부분과 모순이 많고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술만 먹고 폐인이 되거나 자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 속물적인 존재이고 삶이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소중히 여기고 생이 다 하는 데까지 치열하게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다 갈 때 되면 가는 것이 인간의 삶 아닌가?


나 역시 그 욕망의 일부일 뿐이며 꿈틀거리고 발버둥 치다 가는 일원일 뿐이다.

우리 모두 대부분 다 그런 존재들 아닌가?


예술의 최종 목적과 기준


그는 무엇에 끌리고,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 것일까? 작품의 금전적 가치를 선망하고 좋아하는 것일까? 작품의 유명세와 권위에 압도당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안에 내재돼 있는 예술혼과 미학적 가치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사람에게 질문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답변도 아니고, 답변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사실 그대로라고 볼 수도 없다. 마치 “당신은 이성을 볼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보나요?” 하고 질문했을 때, “저는 마음과 눈을 봅니다.”라고 하는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한 것과도 비슷하다.


그 안에 있는 예술성에 끌리는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해도, 과연 진짜 그런 걸까?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에 그 작품이 그렇게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비싼 작품이 아니었어도, 그 작품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있을까?


결국 인간은 돈이라는 권위에 굴복하는 존재이다.

드라마 <돈의 화신>대사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 만약에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액수가 부족한 것일 뿐이다.”

명대사이다. 마찬가지로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권위가 부족할 뿐인 것이다. 권위는 곧 돈이고 돈은 곧 권위이다.


예술은 자본에게 1초 만에 무릎 꿇는다


대한민국 최고의 노장 예술가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회장을 찬양하고 문학적 감성 가득한 최고의 표현으로 칭송하는 모습에서는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해서 숨고 싶었다. 그래도 한국 최고의 예술가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나에게 최고의 자본과 맞장 뜨겠냐고 하면 당연히 나는 그럴 용기가 없음을 자백한다. 나는 더 빨리, 양말도 안 신고 뛰쳐나가서 슬라이딩으로 0.5초 만에 꿇을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도 그럴 수밖에 없고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최고의 예술가라면 그럴 수 없다. 내가 그의 위치라면 나는 자본 앞에 그렇게 대놓고 엎드리지는 못하겠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만이 아니라 전체 예술가들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안 보는 데라면 넘어지는 척하면서 어쩔 수 없이 숙일지언정, 최고의 예술가라는 타이틀과 체면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보라고 대놓고 그리할 수는 없다.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당당하다. 가식적인 아부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정이자 충심이기에 그런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긴 그가 그런 큰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본의 도움이 필수였을 테고, 큰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인간일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체면보다 자신을 키워준 이에 대한 은혜와 의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참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


이해를 하려 하면 이해가 된다. 여기에 예술가의 딜레마가 있다. 자본의 성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자존심을 세우려하면 배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것이지 뭐. 뭘 그렇게 예술이, 예술가가 대단한 것이라고. 예술은, 예술가는 자본에게 종속되고 자본에 의해 선택되고 세워지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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