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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솔윤베씨 Apr 09. 2024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모두 제자리




자신의 결점과 무지, 실수와 비겁함이

아이들의 영혼에 새겨질 것이라는 생각은 

또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가!


책 _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 ) 중에서








솔이방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 들이며 

머리핀이며 

침대 위에 쌓인 옷가지들이며 

바닥에는 어제 입은 옷들이 허물처럼 나뒹굴고

 뒤집어진 양말은 숨은그림찾기 하듯

한 귀퉁이에서 꼼짝을 않는다. 



남편과 나의 무의식과 나태의 한 조각이 

딸아이의 방 안에 고스란히 모여

' 이것 봐라, 나라는 훔쳐도 씨도둑 질은 못한다고' 

그 엄빠의 그 딸이다. 

그렇게 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당장에 내 옷 방엔 운동복과 잠옷들이 

한 번 입은 옷과 한 번만 더 입고 빨 옷들이

켜켜이 쌓여있고 

겨울 장갑과 여름 모자가 

새로 산 스카프와 속옷들이 

빈틈없이 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당장 남편 책상엔 며칠분의 종이신문들이 

선거공약 안내장들이 

양말과 넥워머가

구두 주먹과 리모컨이

두루마리 휴지와 이면지들이 

빈틈없이 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러면서 내가 잔소리를 해댔었구나. 

정리의 첫 번째는 '제자리'라며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해댔었구나. 

제자리의 '제' 자도 모르면서. 



그런 마음이 들자 

솔이방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열심히 푼 문제집들도 꺼내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한 데 모아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내 눈엔 다 푼 문제집들이지만 

솔이에겐 한 달 내내 애쓴 흔적이자 보람이라 

'버리기'가 눈치가 보였는데 

마침 학교 간 이때 몰래 갖다 버리자 싶어

부지런을 떨며 분리수거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분주한 주말을 보낸 일요일 오후 

다음 주 학교 갈 준비를 하며 

한자 문제집과 수학 문제집을 찾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단다. 

솔이 방에 수납공간이라는 게 

책상과 책장, 그리고 각각의 가방들뿐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혹시나 싶어 남편방에도 가보고 

안방에도 가보고 

윤성이 장난감 방, 베란다까지 뒤져도 

나올 생각이 없다. 



마지막 숙제 검사를 내가 해줬으니

학교에서 안 가져온 건 아닐 테고 

집 어디에도 없다는 건

설마, 설마 ... 



무거운 책 더미를 안고 

분리수거장을 향했다가 

홀가분하게 돌아온 내 발걸음이 

스친다. 

아마, 아니 분명 그 책 더미 사이에 

솔이의 8급 한자 문제집이 있고 

4월 팩토 문제집이 있다. 

나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으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목소리도 가다듬고 

솔이에게 말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엄마가 솔 이방 청소를 하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렸는데 

실수로 그 사이에 한자와 수학 문제집이

같이 들어간 것 같다고. 



정말 다행인 건 

우리 아파트는 고맙게도 한 주의 재활용 쓰레기는 

다음 주 월요일에 수거해가니

지금 가서 찾으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외출하고 돌아와 차에서 짐을 나르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해 지금 당장 분리수거장으로 

가라고 말했다. 

가서 좀 찾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당장 뛰어가라고 소리친 듯 

다급했다. 




그렇게 남편과 솔이가 

한참 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솔이는 아주 단호한 표정과 몸짓으로 

한자책과 수학 책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엄마, 내 한자 노트까지 버렸더라?'



뭐 쓰레기가 많아서 찾기가 어려웠다든지 

이걸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든지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라든지 

뭐 이런 엄마의 얼어붙은 마음을 풀어줄 

말 한마디 없이 ㅋㅋㅋ



한자 노트라는 여죄를 붙여

엄마를 책망하는 눈빛과 단호함으로 

나를 케이오 시켰다. 

유구무언이라.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고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로 떨구게 된다. 





미안하다 딸아. 








어질러진 솔이방을 보며 

날 닮은 솔이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잔소리를 해댔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다 쓸어버리고 

다시 잘 정리된 방으로

다시 잘 정돈된 삶으로 

다시 '제자리'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혼자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도 여전히 완벽하지 못하다. 

어쩌면 그런 인생은 내게 없을 수도 있겠다. 

딸아이에게 전할 빈틈없는 잔소리가 

더 이상 안 먹힐 수도 있겠다. 

난 이미 딸아이에게 언행불일치다. 




힝 




그런데도 요상하게 기분이 좋고 

히죽히죽 웃음이 나는 건 

나를 쏘아보며 한자책을 끌어안은

딸아이의 단호함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아본다. 



딸아, 너는 할 수 있어. 

모두 제자리, 모두 제자리

모두 모두 제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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