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직도 테이프를 챙길까

백 퍼센트 맥시멀리스트 승무원!

by 구름 위 기록자

나는 백 퍼센트 맥시멀리스트다.

물건이 많다.

그런데 나름 이유가 있는 맥시멀리스트다.


해가 바뀔 때마다 다짐한다.

‘이번 해는 심플하게 살아보자.’


하지만 오늘,

다음 비행을 위해 가방을 싸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할 맥시멀리스트라는 사실을.


큰 수트케이스 안은 짐으로 테트리스처럼 빼곡했다.
이번 비행은 <두바이–시드니–크라이스트처치–시드니–두바이>를 도는 일주일짜리 여정.
‘여정이 기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또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파우치 하나하나엔 다 이유가 있다.
한여름인 호주를 위한 반팔, 시차 적응에 실패할 밤을 대비한 운동복,
활동별로 나뉜 신발, 혹시 몰라 챙기는 우산, 당연한 상비약까지.
결국 이 짐엔 ‘불필요’라는 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기내 가방에도 늘 필통을 챙긴다.
혹시 승객이 펜을 찾을까 봐 여분의 펜을 여러 자루 넣고,
작은 스카치테이프도 빠뜨리지 않는다.


스카치테이프는 한 번의 사건 이후 내 필수품이 되었다.
기내식 테이블 접합 문제로 테이블이 흔들리던 날,
고도 40,000피트 상공에서 붙일 만한 무언가를 찾느라
A380의 위아래 캐빈을 뛰어다녔던 기억 때문이다.
그날 이후 테이프는 늘 내 가방 속에 있다.


필통 안에는 작은 비눗방울 장난감도 하나 들어 있다.
어느 날 동료가 내 필통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언니, 비눗방울도 들고 다녀?”


이 작은 장난감은 아기 승객이 울 때,
혹은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아이의 시선을 붙잡아 주었다.
문구점에서 네 개에 1,200원이었던 이 물건은
생각보다 여러 번 나를 도와줬다.


가방 속 물건들엔 저마다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왜 필요해졌는지, 언제부터 챙기게 되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거의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물건에 둘러싸여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내가 가진 물건들이

내 시간을,

내 선택을,

내 경험을 품고 있다는 점이 좋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물건을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물건들로 이야기를 쌓아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짐이 너무 많아 크루용 버스 기사님이
“혹시 돌아온 크루 짐을 잘못 가져온 거 아니냐”고 묻던 날도 있었고,
비행마다 “집에 돌아 가는 거야?”라는 말을 듣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 번은 그 많은 짐이 공항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터져버린 적도 있다.
힘없이 터져버린 캐리어를 바라보며
동료들의 탄식도 함께 맥시멀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방에 ‘카고용 테이프’를 하나 더 챙기기 시작했다.
‘혹시 또 터지면 붙이면 되지.’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나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할 맥시멀리스트다.


올해도 여전히 심플하게 살고 싶다고 다짐하지만
가방을 싸는 내 손끝은 여전히 익숙하게 맥시멀하다.


내가 챙기는 이 많은 것들엔

하나하나 이유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마음이 있다.


나는 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가 많은 사람일지도.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아는 방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나답게 잘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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