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점 이상 아니면 비행 불가” 승무원의 연간 시험
올해도 그날이 왔다.
트레이닝 컬리지 7층 테라스에 서면
부르즈 칼리파가 한눈에 들어오고,
푸른 골프장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마치 이곳이 휴양지인 듯 착각하게 만드는 풍경.
분명 이 풍경으로 많은 크루들이 홀려 지금까지
비행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1년의 한번, 그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천루 같은 풍경은 사라지고 나는 시험을 앞둔 학생이 된다.
두근거림과 긴장, 그리고 어쩐지 설레는 마음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이곳은 매년 내 ‘생명 연장권’을 발급해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뮬레이터 속 기내가 구름을 헤집듯 흔들린다.
창밖에는 불길이 번지고, 객실에는 희뿌연 연기가 퍼진다.
비상장비를 꺼내 들고,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듣는다.
매년 한 번, 우리는 이렇게 ‘가상의 위기’ 속으로 들어간다.
비행에 필요한 라이선스를 갱신하는 정기 훈련/시험, 리커런트(Recurrent)*다.
한 달 전, 스케줄표에 ‘SEP* training’이라는 단어가
찍히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매년 읽는 매뉴얼이지만 볼 때마다 낯설고,
세션 전에 들어야 하는 온라인 코스만 10여 개.
그리고 이틀간의 훈련 동안 가장 압박스러운 건
'객관식 시험'이다.
기종, 의료, 보안 세 부문에서 80점 이상을 받아야 통과한다.
떨어지면 재시험은 물론, 그 재시험까지 통과하지
못한다면 라이선스가 갱신되지 않는다.
그 말은 비행을 못 한다는 뜻이다.
그런 압박감을 갖고 시험이 시작되면
교실 안은 고요해진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지만, 긴장감이 가시처럼 공기를 찌른다.
손끝에는 땀이 맺히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만
일정한 간격으로 울린다.
모두가 모니터 속 세 개의 선택지를 바라보지만,
그 위에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비행 자격’이라는
무게가 얹혀 있다.
답을 고르는 순간, 숨을 한번 고르고 클릭한다.
그 소리는 누군가에겐 안도의, 누군가에겐 불안의 신호다.
시험이 끝나고 통과라는 메시지가 모니터에 뜨게 되면,
마치 깊은 물속에서 올라온 듯 숨이 가빠지고,
교실 안에는 조용한 한숨이 번져간다.
이 순간이 지나야 비로소 다음 1년을 비행할 자격이
주어진다.
올해는 은퇴를 앞둔 선배님과 같은 반이 되었다.
“22번째 리커런트면, 이제 좀 무뎌지셨죠?”
내 질문에 선배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떨려요. 라이선스가 걸린 일인데 무심할 수 있나요.”
그 짧은 대답 속에 스물두 해의 무게가 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떨림은 아마도 내가 날개를 내려놓는 날까지 계속될 거라는 걸.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책임이 만든 긴장감이라는 걸.
이번 훈련에는 새 제세동기가 도입됐다.
기존보다 훨씬 간단하고 빠르게 작동해,
실제 상황에서도 주저 없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PARSYS* 파시스 텔레메디슨’이라는 장비가 추가됐다.
태블릿에 환자 정보를 입력하면 기내 와이파이를 통해
곧바로 지상 의료센터로 전송된다.
체온·산소포화도·혈압 같은 수치도 자동으로 기록된다.
기술의 발전은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회사가 이런 장비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이유는,
그 생명이 곧 우리의 비행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CRM 세션은 기장, 부기장, 그리고 승무원이 함께 듣는 시간이다.
올해는 네 개의 테이블을 그레이드별로 나누어 앉혔다.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사무장급
플라이트덱 (기장/부기장)
20여 개의 실제 상황 카드가 주어지고,
각 테이블은 가장 기피하는 시나리오를 2~3개 골라 이유를 나눴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카드가 뒤집힐수록 표정이 변했다.
“나 벌써 스트레스받아.”라는 농담에 웃음과 고개 끄덕임이 이어졌다.
이코노미 팀은 ‘만석 + 휠체어 승객 10명 + 조기 착륙’을,
비즈니스 팀은 ‘만석 + 신입 크루 2명 + 풀코스 런치 서비스’를,
퍼스트 팀은 ‘만석 + 신입 사무장 + 압박하는 매니저 탑승’을 꼽았다.
사무장급은 ‘만석 + 만취 승객 경험 직후 + 장거리 해상 구간’을 피하고 싶다고 했다.
‘만석’이라는 공통 조건을 빼면, 스트레스 요인은 전부 달랐다.
그 차이를 플라이트덱도 우리의 시점에서 듣게 되고,
우리는 그들만의 ‘안전 절차’가 주는 압박을 들으며 알게 됐다.
그날 우리는 배웠다.
서로의 하늘을 이해할 때, 비로소 한 팀이 된다는 걸.
그리고 그런 팀이 만드는 비행은 언제나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렇게 올해도 ‘연간 회원권’을 갱신했다.
10번째 리커런트를 마쳤지만, 첫해처럼 긴장과 설렘이 공존한다.
아직 몇 번을 더 하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늘 위의 수많은 여정이 안전하게 완성되는 하루하루를 위해,
나는 매년 이 이틀을 통과하며 나 자신과의 약속을 갱신할 것이다.
참고:SEP*는 Safety and Emergency Procedure의 약자로 에미레이트에서 사용되고 있다.
에미레이트는 승무원들이 다양한 안전 상황에 대비하고 승객을 보호할 수 있도록 이 교육을 실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