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저브(Reserve), 혹은 스탠바이(Standby).
승무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배정받는 ‘대기 스케줄’이다.
결항이나 병가, 지각처럼 갑작스럽게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항공사 오퍼레이팅에 보험 같은 제도다.
내가 속한 에미레이트 항공에서는 보통 1년에서 6개월에 한 번, (혹은 스케줄마다 다르다)
한 달 전체를 리저브 먼쓰(Reserve Month)로 배정한다.
이 기간 동안 내 스케줄은 호출과 대기의 연속이다.
공항 대기(Airport standby): 회사 스탠바이라운지에서 유니폼을 입고 대기하다가
호출이 오면 즉시 비행기/브리핑룸으로 이동한다.
자택 대기(Home standby): 정해진 시간 동안 집에서 대기하다가,
연락이 오면 제한 시간 안에 회사에 도착해야 한다.
문제는, 이 호출이 대개 모두가 꺼리는 비행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리저브 먼쓰는 언제나 불확실하고, 때로는 버겁다.
룰렛을 돌리듯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한 달이다.
리저브 먼쓰가 다가올 때마다, 나는 내 첫 에미레이트 면접날을 떠올린다.
컴퓨터로 치른 심리테스트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그 정도는 어느 수준인가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답을 체크했다.
“네, 그런 상황은 늘 큰 스트레스가 됩니다.”
파이널 면접에서 면접관은 내 답을 집어 들며 말했다.
“승무원의 삶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의 연속이에요.
예를 들면, 한 달 내내 스탠바이로 살아야 하는 리저브 먼쓰 같은.
당신은 정말 괜찮을까요?”
나는 걱정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스트레스는 분명히 받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직업을 선택했다면,
그 순간들을 견디고 이겨낼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대답은 바꾸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리저브 먼쓰가 배정되면 한숨이 먼저 나온다.
하지만 나는 리저브를 현명하게 버티는 방법은
결국 ‘내려놓기’라는 걸 배웠다.
알 수 없는 미래라면, 애초에 기대치를 낮추는 것.
그러면 오히려 작은 우연이 선물처럼 다가온다.
스탠바이가 뜻밖의 휴일(오프)로 바뀌기도 하고,
힘들 줄 알았던 노선에서 놀라운 팀워크가 펼쳐지기도 한다.
한 번은 긴 밤 비행에서 모두가 지쳐 있을 때,
갤리 안에서 서로 눈빛만 봐도 척척 호흡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했다.
급작스레 호출받은 예상치 못한 비행에서 팀워크는 환상적이었고,
나는 그 비행이 전혀 힘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작년 리저브에서는 그렇게 받기 어렵다는 일본 노선이 내 차지가 되었다.
또 다른 날에는, 스탠바이 중 갑작스럽게
‘데드헤딩(승무원이 승객처럼 탑승만 하는 이동)’으로 한국을 다녀올 기회도 있었다.
리저브 먼쓰는 결국 초콜릿 상자와 같다.
포장을 열기 전까지는 어떤 맛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때로는 쓰디쓴 다크 초콜릿, 때로는 달콤한 헤이즐넛.
그리고 나는, 그 불확실한 맛 속에서도 달콤함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