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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송이 Oct 15. 2024

제주에서 집 지은 아기

기다리던 임신 소식을 맞이하다.


14명의 남편 외가 가족들과 제주 여행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때. 지속되는 미열과 심각한 갈증에 생리통인가 몸살인가 의심하고 있었다. 손발도 퉁퉁 붓고, 화도 쉽게 났다. 일주일이 다 돼 가는데 호전은커녕 몸 상태가 영 이상해서 임신 테스트기를 해 봤다. “세상에 두 줄 이잖아!”


잠들기 전 신랑에게 티타임을 갖자고 해두고선 두줄이 된 테스트기를 깜짝 공개했다. “나 이제 파더야?” “아빠지 파더가 뭐야!” 그는 한밤중이라 소리 지르지 못하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대로 눈을 키워 놀라움과 기쁨을 표현했다. 둘이서 한참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병원 가서 확인해 봐야 확실하지 않겠냐고 겨우 진정하며 잠이 들었다.


바로 다음 날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향했다. 일단 도착은 했는데 뱃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고, 혹시 정말 아가가 생긴 거라면 대가족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비해야 했다. 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가기로 결정했다. 타지에서 산부인과라니. 공항 근처 병원을 검색해서 진료를 보러 갔다. 안 그래도 낯선 곳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임신인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는 걸까?’ 내 눈은 까맣기만 한 초음파 사진에 한동안 고정되어 있었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의사는 몸이 임신을 너무 일찍 알아차린 상황이거나 자궁 외 임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순간 무서웠다. 친절하지 않은 진료에 집중도 잘 안 됐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너무 불친절해. 뭐? 자궁 외 임신?.’ 하며 딴생각만 잔뜩 들었다. 마지막 말은 어쨌든 여행 왔으니 무리하지 말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여행을 하라는 것.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남편은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받아들인 나와 다르게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라는 결과를 듣고 나온 사람처럼 기뻐했다. 평소 몸과 감각이 예민하기 때문에 먼저 알아차린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송이. 너무 일찍 병원에 와서 아직 안 보이는 거지. 여행을 마친 후에 짠 하고 나타날 거야.”라고 확신했다. 참 믿음 좋은 형제님. 남편이 이래서 좋다. 싱숭생숭했지만 이런 기분으로 여행을 망칠 수는 없는 법. 에라 모르겠다. 느긋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와 제주산 녹차 라테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남편과 외가 식구들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입을 맞췄는데 나한테만 비밀로 하고 가족들에게 다 말해버렸다. 그 덕에 일정 내내 배려받고, 피곤함과 스트레스 하나 없는 여행을 했다. 지용의 자상하고 따뜻하고 긍정적인 성격이 외가 식구들에게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늦잠도 자고, 낮잠도 자고, 맛있는 음식과 간식들도 먹고, 매일매일 바다에 나가 유유자적 둥실둥실 튜브를 타며 자연의 기운을 충만히 받았다.


남편과 남편의 조카들은 먼바다에 나가 액티비티를 즐기고, 나는 얕은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탔다. 파도 위에 누워 배에 손을 둥글게 둥글게 굴리며 ‘아가야 예쁘고 튼튼한 집을 지으렴.’ 하고 기도했다. 뱃속이 간질 간질한 것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 듯한 기분 좋은 설렘이 느껴졌다.


여행을 마친 후 3일 정도 더 지나고 나서 다시 산부인과를 찾았다. 혹시 또 일찍 가서 마음이 불안할까 봐 충분한 시간을 두었다. 배에 차가운 액체를 바르고 카메라가 미끄러졌다. 두 번째 확인하는 순간이니 차분하고 싶었다. '헉! 나타났다!‘ 의사가 말하기도 전에 임신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아기집을 아주 예쁘게도 지어 놨어요. 여기 아기집, 난황 보이시죠? “


그제야 기쁨과 안도감이 느껴졌다. 궁금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밀려오는 파도에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눈물은 안 나고 싱글벙글했다. 스물아홉 살에 결혼하고, 서른네 살에 임신. 결혼 직전 시작한 남편 사업장이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으며 조금 더 기다렸다가 아기를 가지자고 했었다. 한해 두 해가 지날수록 자주 들었던 아기는 언제 가질 거냐는 말에 시원하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아기는 정말 제주에서 지내는 5일 동안 자기 집을 지었다. 여행 시작할 땐 없었는데 끝나고 나니 생겼다. 제주에서 집 지은 아기. 이렇게 낭만적인 아기라니. 그렇게 무한한 환영과 축복을 전해 줄 수 있는 행복한 임신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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