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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유 Jan 24. 2023

내 삶의 본래적 의미

삶의 본래적 의미가 뭘까?


​"본래적 자기"란 우리가 찾아야 할 우리 자신의 궁극적인 본래적 모습이다.

진정한 자신의 소망과 삶의 의미를 찾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하게 될 때 사는 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이며 의미 있는 일이 된다.


​실존적 자아를 자각하고 각성하여 존재로서의 나를 믿고 기획하고 실천함으로써 '본래의 자기'로 사는 것이 바로 '실존'이고 그 실존만이 오로지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하이데거




​실존주의 상담 수업을 처음 들으면서 내 가슴을 관통했던 단어가 바로 "본래적 자기"라는 단어였다.

자신의 본래적 의미를 깨달아 본래적 자기로 살아갈 때 비로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성공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명예, 혹자에겐 경제적인 부일 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사랑'이었다.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해 애정결핍이 있던 난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 아니, 결혼하면 다 사랑하며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결혼생활은 다른 것들은 다 있었으나 사랑만 쏙 빠져있었다. 난 사랑을 갈구했으나 돌아오는 건 무시와 지적과 비난이었다.

사이좋은 부부를 보면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사랑받는 아내는 얼굴에서 빛이 났다.


하지만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랑받기를 포기하고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행복한 가족으로 보였을 거다.

그야말로 쇼윈도 부부로 오랜 시간 살아갔다.

'이 정도면 행복한 가정이지..'라며 내 실존적 자기를 직면하지 못한 채 회피하거나 스스로를 속이고 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엄청난 혼란과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과연 사랑만 빠져있는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의논할 수 도 없는 문제였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야 죽을 때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욕구는 내겐 생명만큼 강한 것이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능력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한다. 오롯이 나 혼자 피 터지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대학진학이나 결혼등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난 온전히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아빠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컸었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이 행복했을 리가 없다.

나에게 심리적으로 남편은 부재 상태였다. 오로지 난 집안살림과 자녀양육의 역할을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수많은 눈물로 얼룩진 가슴...

증오와 고통의 시간들...


아내로서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다.

상담공부를 하며 자아정체성을 찾아갔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항상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이만큼 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50세에 이혼을 결심하고 51세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아빠의 의견과 상관없이 내 의지로 이혼이 이루어졌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삶을 난 5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난 내 삶의 본래적 의미 즉. 진정한 사랑을 찾는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간절히 원하고 포기하지 않았더니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고 하루하루 소소한 기쁨을 느끼며 사랑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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