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며느리라고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명품백과 값비싼 시계와 보석, 화려하고 세련된 패션. 훌륭한 저택에 집안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우아하게 피부미용이나 몸매를 가꾸는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여자.
과연 난 그런 이미지에 걸맞은 사람이었을까?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모습 이면에 있는 진짜 내가 경험한 세계.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결혼생활.
24살의 순진무구한 아가씨가 아무 사전지식도 없이 결혼을 하고 새댁이 되고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시댁에 있을 때는 홈웨어를 입어야 한다고 TV 드라마에서 봤었나 보다. 핑크색 꽃무늬가 그려지고 어깨엔 프릴이 달린 홈웨어를 구입을 했다.
아침준비를 하려면 6시쯤 일어나야 했다. 아침부터 뭘 그렇게 많이 드시는지, 소고기 스테이크에 샐러드, 삶은 계란, 인절미 구운 것, 잡곡가루로 죽 쑤기, 과일까지 준비하려면 혼자서 동동거려야 했다. 시집살이를 하는 6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을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일이었는데 그 당시엔 당연히 내가 해야 되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미국에 있는 시누이가 남편과 1달 동안 친정에 와서 지낸 적이 있다. 식사준비와 간식까지 준비하는 건 당연히 내 몫이었다. 어떤 날은 식구들이 다 따로 저녁을 먹게 되어 저녁식사만 6번을 차린 적도 있다.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로 얼굴 표정이 안 좋았었나 보다. 시어머니가 날 부르더니 “내 딸 와 있는데 표정이 왜 그러냐? 나도 오랜만에 온 딸이라 손님 같아서 조심스러운데..” 그 말을 듣고 울음을 겨우 참고 베란다로 나오니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당신 딸만 귀한가? 내가 이러고 살고 있는 거 엄마, 아빠는 알까?’
시어머니는 내가 외출을 하는 걸 싫어하셨다. 외출이라고 해봤자 아이들 학부형 모임이나 장 보러 가는 정도였다. 장 보러 나가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집에 들어가면 “ 장 보는데 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냐?”하셨다. 하루는 친구가 시댁 근처에 왔다고 잠깐 나올 수 없냐고 전화가 왔다. 마침 어머니가 외출 중이셔서 몰래 나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혹시 어머니 들어오신 거 아닐까? 나 잠깐 들어가 보고 올게” 그렇게 친구를 혼자 놓고 시댁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어머니 신발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외출했다가 들어오셨다. 난 친구에게 연락도 하지 못하고(그땐 휴대폰이 없는 시절이었다) 친구는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만한 청담동 빌딩에 사는 외며느리였지만 내 마음은 항상 불안에 떨고 있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도 없던 시절이었다. 점심을 먹고 방에 들어와 잠시 누울 때도 침대에 눕지 못하고 침대와 벽 사이에 공간이 떨어져 있던 곳에 누웠다. 친정 부모님이 손녀 보고 싶어서 전화를 자주 하셨었는데 시집살이하는 딸한테 무슨 전화를 그리 자주 하냐고 역정을 내셨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기는커녕 밤에 바닥에 누워 울고 있는 날 투명인간 취급했다. 아빠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빨리 한 결혼이 더 크고 튼튼한 감옥일 줄이야... 이런 얘기를 친정 부모님께는 하지 못했다. 명절 때 친정에 가는 내게 시어머니는 “시댁에서 있었던 안 좋은 얘기는 친정 가서 하는 거 아니다”라고 하셨고 난 그 말을 잘 지켰다.
어쩌다 만난 남편 친구가 몇 년 만에 내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 민유씨 얼굴이 왜 그렇게 변했어요? 세상 다 산 사람 같네요”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찍었던 증명사진을 보면 어두운 피부톤에 생기를 잃은 눈빛, 쳐진 입, 어떤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의 20대 후반의 여자가 보였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었으나 나에게 관심이 없는 남편, 무서운 시어머니, 잠시 외출하는 것도 허락을 받으려면 노심초사 마음을 졸여야 했던 시간들이 내 얼굴을 그렇게 어둡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나의 유일한 낙은 딸들의 교육에 전념하는 거였다. 큰딸이 4살이 되었을 때 압구정동의 유명한 유치원에 입학을 했다. 책을 읽어주고 한글학습을 시켜서 남들보다 빨리 읽게 만들고 영어교육과 영재학습, 피아노, 미술교육등 모든 에너지를 아이들 교육에 쏟았다.
큰딸은 가르치는 만큼 잘 따라와 주었다. 한글을 떼고 나서는 책을 엄청나게 읽기 시작했다.
비디오테이프를 반복해서 틀어 주었더니 영어 발음도 원어민처럼 되었다. 새로운 학기가 되면 딸의 학원 시간표를 짜느라 분주했고 나름 재미있었다. 그래도 유일하게 나를 인정하는 부분은 아이들 교육을 잘 시킨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차갑고 무관심하고 사랑을 주지 않는 남편도 딸들에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을 잘 양육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내 이름은 서서히 없어지고 OO 엄마가 되어갔다. 내 이름을 말해야 되는데 너무 생소해서 한참을 애쓰다가 말한 기억도 있다. 외아들 집에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봤으나 둘째도, 늦둥이로 낳은 셋째도 딸이었다. 결국 집안의 대를 끊어놓았다는 죄책감을 알게 모르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엔 딸을 셋 낳았다고 하면 불쌍해하며 물건값을 깎아주는 정도였으니...
내가 아들을 낳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