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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Aug 05. 2022

자녀들의 집안일 훈련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축복


 "엄마 나 음식물쓰레기 하고 있는 거 사진 찍어줘."

 "엄마 이거까지 찍어서 아빠한테 보내줘."

 점심 설거지를 다 마친 둘째는 기분이 내킬 때면 시키지 않아도 음식물쓰레기까지 처리해주곤 한다. 아빠가 그런 모습을 얼마나 놀라워하는지 아는 둘째가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아빠에게 보내달라 한다. 올해 여섯 살인 둘째는 벌써 손끝이 야무지다. 둘째가 설거지를 하는 점심에는 설거지가 끝난 그릇을 다시 살펴봐야 할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엄마 콩간장이야?"

 "응. 엄마 지금 볶고 있으니까 진간장 갖다 줘."

 요리에 관심이 많은 둘째에 비해 첫째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런 첫째에게 나는 요리할 때마다 이것저것 부탁을 하곤 한다. 국을 끓일 때는 국간장, 볶고 있을 때는 진간장을 구별하는 재미로 요리하는 엄마를 돕게 하기 위해서다.


 아직 두 돌이 안된 막내는 수시로 휴지통에 뭔가 버리고 온다.


 우리 집 세 아이가 받고 있는 집안일 훈련의 일부분을 소개한 이유는 오늘 드디어 자녀의 집안일 훈련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우리 엄마는 저 집안일시키려고 홈스쿨 하는 것 같아요."

 "내가 학교 가면 엄마가 안 좋아질 것 같아. 내가 학교 가서 집안일을 안 하면 엄마 집안일이 많아지잖아."

 이렇게 말하는 홈스쿨러가 있을 정도니 집안일은 어떤 면에서 홈스쿨링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집안일 훈련이 훌륭히 진행되고 있는 가정도, 이제 시작하려는 가정도 오늘의 글을 통해 집안일 훈련에 대해 풍성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글을 보면 사람을 구제하는 원칙이 인상적이다. 정상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운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조차도 무작정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 생활비를 평생 지급할 재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러한 원칙을 고수한다("게으름", 김남준 저 참조).


 결국 노동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마지못해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인간답게 하는 조건이 노동이라니. 노동이 나를 사람답게 살게 하는 축복이라고 생각하니 '집안일'이 새롭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상태 때문에 노동이 고통스러워진 것이지 아담은 타락 전에도 에덴동산을 경작했다. 노동의 기쁨을 누렸다. 노동이 주님께서 태초부터 설계하신 축복이라면 아이들에게도 그러한 노동의 기쁨을 가르쳐야 한다.


집안일 훈련의 유익


 첫째가 다섯 살부터 빨래 개기를 했으니 집안일 훈련을 시작한 지 3년이 넘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제수건을 조물조물 접던 것(빨래를 갰다기보다 접는 것에 가까웠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불까지 개고 있다. 둘째는 설거지를 한번 하면 거실 온 바닥이 물바다가 되곤 했다. 설거지를 한 건지 물장난을 친건지. 그런 둘째가 이제는 음식물쓰레기까지 처리하고 있다(물바다는 싱크대 물막이로 방어하고 있으니 가끔 아이템의 도움도 필요한 듯).


 집안일을 시키다 보니 아이들이 자란 것을 확실하게 느낀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엄마는 육아의 보람을 느낀다. 엄마뿐 아니라 아이들 자신도 자기가 얼만큼 성장했는지 스스로 느끼곤 한다. 이런 것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자아성취감, 자존감 같은 것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용돈을 쥐어주면서까지 집안일 훈련을 시키는 것에는 반대다. 용돈이라는 보상이 들어가면 집안일 훈련을 하는 목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왜 하지요?"

 "엄마 아빠랑 동생 섬기려고요."

 교과서 같은 대화지만 첫째가 집안일을 하기 귀찮아할 때 자주 나누는 대화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가족을 섬기고 돕기 위해 집안일을 한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집안일 훈련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집안일 훈련이 분명한 목적의식 위에 있을 때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 가족에게 스스로 도움이 되고 있다는 자존감이 아이 내면에 자란다.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는 사춘기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가족의 생계에 중요한 일을 맡으며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린 동생 돌보기, 물 길어 오기, 동물들로부터 농작물 지키기 등, 가족의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죠. 그런 사회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누가 얘기해 주지 않아도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공동체를 위해 충분히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사회에서는 아이들은 18세 정도만 되어도 매우 성숙해 있었으며, 이미 결혼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춘기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의 구별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인류에게 사춘기라는 개념이 시작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입니다. - 웨스 스태포드(Wess Stafford),  컴패션 전 총재

 

 집안일 훈련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글귀이다. 특정 사회의 청소년들이 우리가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로 아는 사춘기를 겪지 않는 것을 사회학자들이 발견하고 이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가정을 돌보는 책임을 자연스럽게 맡는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사춘기 없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갑자기 어른이 되는데서 발생하는 과도기적 징후 없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어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아이들도 집안일 훈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숙할 수 있고 그러한 성숙은 사춘기를 건강하게 지나는 힘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집안일 훈련의 유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엄마의 미니멀 라이프'에서도 이야기했다. 신랑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위임하자고 말이다. 일단 위임하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엄마의 체력을 아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시키느니 답답해서 내가 하고 말지 하면 안 된다. 아이들이 정리를 끝낸 식탁에 밥풀이 떡칠이 되어있어도 우리 아이들이 이 정도까지 집안일을 해낼 수 있구나 하고 인정해줄 일이다. 또한 떡칠이 되어있는 식탁이라 할지라도 엄마의 체력을 아끼는 데에 의외로 큰 도움이 된다.  


 집안일은 훈련이기 때문에 벽돌   위에   쌓듯 꾸준히 해나간 훈련은 언젠가 빛을 발한다. 빛을 발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지금  순간에도 엄마의 체력을 아끼는 유익이 있다. 엄마의 체력이 보전되면 그만큼 엄마의 포용력도 넓어진다.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유가 생기면 집안일 훈련을 하며 아이들이 사소하게  실수들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용납할  있다.   엎질러도, 아이들이 실수를 해도   나지 음을 깨닫는 은혜가 있다.



  집안일 훈련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유익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어린 시절에 집안일 훈련을 받지 않아도 언젠가는  훈련을 받게 되어 있다. 집에서 훈련받지 못하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직장에서 훈련을 받게 되고, 혹은 자취를 하면서 스스로 훈련하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결혼해서 아내에게 어쩌면 남편에게 집안일 훈련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받을 훈련이니 뒤로 미룰 수도 있다. 하지만 시기마다 훈련을 받는 유익은 분명히 다르다. 어린 시절의 훈련을 통해 얻는 유익이 있고, 장성해서 또는 결혼해서야 게 된 훈련을 통해 얻는 유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과 어린 시절부터 집안일 훈련을 하는 유익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홈스쿨링 하며 하루 종일 뭐하고 놀아주지 하지 말고 집안일을 가르치고, 함께 하며, 놀아주자. 다음 편에서는 집안일 훈련을 하는 구체적인 팁에 대해 나눠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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