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고집불통이었다. 말을 안듣거나 떼를 쓰지는 않았지만 쓸데없는 똥고집을 자주 부렸다. 예를들어 보통 애기들이 혼나서 나가! 라는 말을 들으면 '잘못했어요' 가 먼저 나와야 하는데 나는 고개를 빳빳히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이웃들이 다 보는 곳에 서 있었다. 억울한듯이.
같은 일이 반복되고 나니 엄마도 나를 앉혀 가르치셨다고 한다. 잘못했어요 한마디면 끝날 일인데 왜 그렇게 말을 안듣냐고. 그때는 자존심이라는 개념을 몰랐을 때이니 엄마에게 지기 싫었던 것 같다.
점점 커가면서 자존심이라는 말을 이해했지만 어릴 때의 똥고집을 잊지 못해 똥자존심을 피우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가 배운 말들은 고마울 때 고맙다고 인사하고 미안하면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자존심이 강하다는 말이었다. 잘못을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자존심이라고.
항상 그렇게 배우며 자랐다.
기분 좋은 식사 시간.
오랜만에 소고기 파티를 열었다. 어김없이 아빠는 초록색 병 하나를 냉장고에서 꺼내 오시고 엄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기를 구우신다. 누가 봐도 단란한 우리 가족. 하지만 이윽고 들리는 아빠에게 향하는 엄마의 잔소리.
표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집은 아빠는 늘 약자이고 엄마는 늘 강자이다. 당연히 아빠가 화가 나셨을 때는 엄마가 한발 물러서지만 대부분 아빠가 "져주신다"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이렇게 되기까지는 아빠도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엄마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결심한 아빠.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아빠를 만나 결혼한 엄마.
단칸방에 살아도 행복했던 부모님들도 신혼 초에는 자주 싸우셨다고 했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다 갑자기 한집에 살게 된 부부들의 당연한 순서처럼 좋았다 싸웠다를 반복하며 애정과 애증을 오가셨다고.
그러다 내가 커갔고 어린 시절 아빠가 겪었던 가난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아빠가 회사에서 자리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능력을 키우는 일뿐.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엄마랑 많이 싸웠지. 진짜 너무 많이 싸웠는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이럴 시간이 없더라고. 나는 회사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남들 천천히 걸을 때 전력 질주를 해야 되는데 집에서 싸우느라 힘을 다 쓰니 밖에서 힘이 들더라. 그때부터 들어도 모르는 척, 화나도 한 번 접자고 생각했지. 그렇다고 엄마를 무시하거나 한 건 아니고. 무슨 말을 하면 오야오야 그래그래 해주면 된다. 밖에서 힘들었다고 약한 엄마랑 싸우면 뭐 하겠노.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이지. 집에서는 마음 편하게 쉬었다 밖에 나가면 치열하게 싸워야지."
아빠가 이때 알려준 것은 엄마와의 싸움이 단순히 쓸데없는 싸움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에게 괜한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부부 사이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큰소리치며 싸우는 부모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나중에 들었지만 가끔 다툼이 있는 날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싸우셨다고. 이것도 어쩌면 자식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의 "자존심"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