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암행어사 제도
항아리 속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 위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이 흐를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 또한 높더라.”
고전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 전에 읊은 시구이다. 이몽룡은 이 시구를 남기고 사라졌다가 마패를 앞세우고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억울하게 옥살이 하던 연인 춘향이를 구한다.
문학작품 속에 암행어사는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암행어사 박문수와 관련된 설화에서도 주인공은 억울하게 누명 쓴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묘사돼 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암행어사의 모습은 악정을 일삼는 관리로부터 백성을 구하는 정의의 사도인 셈이다.
현실에서의 암행어사는 어땠을까?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임무를 수행했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조선을 비롯한 왕조시대에는 백성을 다스리고 보살피는 일은 임금의 당연한 책무였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임금이라도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는 없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은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어떤 수단이 필요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각 고을에 수령을 두어 왕의 통치를 대신하게 했다.
왕조의 안위는 민심에 달렸고 민심은 백성이 얼마나 편한가에 달렸으므로 수령의 임무는 막중했다. 그래서 수령의 임기를 보장하는 ‘육기법’이나 하급관리나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부민고소금지법’ 등을 통해 수령의 권위를 높이고, 지위도 확고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토록 막강한 권한과 엄청난 특권이 부여됐음에도 모든 수령이 자신의 책무를 다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관찰사라고 하여 수령의 통치를 평가하고 이를 왕에게 보고하는 감시자가 존재하긴 했다. 또한 한양에 사헌부라는 기관을 두어 수령을 규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해진 날에 공개적으로 수령을 감독하고, 중앙에 앉아 전국의 수령이 하는 일을 감찰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그 효과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위민정치는 저버리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령들이 늘어나게 됐다.
그럼 조정에서는 이런 문제를 예측하지 않고 방관만 했을까? 나름 수령의 도덕적 해이와 탐욕을 막기 위한 상벌이 존재했다. 수령이 왕의 바람대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상대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다. 당시 이 방법은 이미 제도적으로 마련돼 운영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수령들의 실적을 매년 6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4등급으로 구분해 평가하고 이를 중앙에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렇게 보고된 수령들의 고과는 추후 승진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됐다.
하지만 좀 더 확실히 수령의 비행을 감시하는 길은 그들의 감춰진 행동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선별장치’ 또는 ‘골라내기’라 하는데, 정보가 부족한 자가 많은 이의 정보를 취득하기 위해서 펼치는 행위를 말한다.
조선의 ‘암행어사’제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암행어사는 왕명을 받아 비밀리에 지방에 파견된 특사나 임시관리를 말한다. 이들이 맡은 임무는 수령의 치적과 비리를 살피고 백성의 고통과 어려움을 탐문해 왕에게 아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명백한 비리나 부패가 발견되면 암행어사는 해당 수령을 파직하고 증거보존을 위해 관아의 창고를 봉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강력한 권한이 부여된 탓에 수령의 부도덕과 부조리를 타파하는데 암행어사제도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암행어사의 신분과 선택과정은 철저히 비밀로 유지된다. 왕이 직접 어사를 선정·임명하고 그들이 파견 갈 지역은 추첨으로 결정된다. 암행어사로 간택된 사람은 사대문을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임무와 파견지역을 알 수 있었고, 이를 확인한 후에는 지체 없이 목적지로 떠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치밀한 규칙과 절차에도 불구하고 암행어사제도가 반드시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암행어사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령 개인의 비리를 밝혀내는데 집중했을 뿐, 비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구조적 개혁에는 실패했다는 점이다. 또 신분이 도중에 노출돼 암행의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뿐만 아니라 암행어사 노릇을 하는 가짜어사도 등장했고, 심지어는 수령과 결탁해 스스로 도덕적 해이에 빠지는 비리어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암행어사 제도는 당시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하고, 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한경 생글생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