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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y 09. 2018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

 책을 읽어준다.  나긋나긋 부드러운 음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낯 익은 음성을 따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어릴 적 엄마는 내 침대맡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 주셨다. 낮고 깊으며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 인도하는 세계는 동화와 꿈이 뒤섞인 야릇한 세계였다. 실제와 허구가 혼합된 또 다른 세상을 경험했던 어린시절, 한참을 귀로 듣는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 스스로 독서할 나이에도 툭하면 엄마를 졸라 책을 읽어달라던 기억이 난다. 그런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제목만으로도 나에겐 매력적이었다.

 까만 바탕에 옆모습이 이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인,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지 여인이 무척 낯익다. 그녀는 헐리웃 스타인 케이트 윈슬렛,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서 그녀는 영화 속 한나가 되었다. 


독일 태생인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법대 교수이자 판사이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더 리더)는 총 3부로 나눠진다.


1부는 화자인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십대를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15세 가을에 간염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 구토를 하게 되는데, 그 때 한 여자의 도움을 받는다. 그를 씻겨주고 집까지 바래다  준 그녀를 고맙게 여긴 주인공의 어머니는 그의 몸이 호전되자 그녀를 찾아가 감사의 말을 전하게 하고, 이를 계기로 주인공 소년과 여인은 운영적 만남을 갖게 된다.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육체적 관계는  마치 어떤 의식처럼 진행된다. 소년이 책을 읽어주면서 시작된 사랑의 유희는 샤워하고, 사랑하면서 절정에 이르고 잠시 함께 누워있기로 마무리 된다.

소년은 욕망을 지니고 여인의 집을 지만 그녀의 요구에 따라 책을 읽어주면서 욕망은 사라진다.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책을 읽는 순간 만큼은 몰입해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년을 통해 자신이 모르던 지식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고, 소년은 그녀를 통해  황홀한 사랑의 기쁨과 쓰라린 실연의 아픔을 경험한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한나 슈미츠이며 전차의 차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다. 나'가 그녀의 과거를 물어볼 때마다. 그녀는  마치 먼지가 뽀얗게 앉은 궤짝에서 답을 꺼내주는 것 같이 아주 조금씩 자신을 보여준다. 그녀는 지멘스에서 일하다 스믈한 살에 군대에 들어갔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았단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나(미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꼬마야, 넌 정말 별걸 다 알려고 드는구나?''


어느 날 한나는 홀연히 사라진다. 미하엘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날, 수영장으로 자신을 찾아왔던 그녀를 모른 척 하고 부정한 것이 그녀에 대한 배신이며 그로 인해 그녀를 잃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그리고.한동안 사라진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1부가 주인공인 소년 미하엘이 한나로 인해 성에 눈 뜨고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기 고백과 성찰을 통해  성장해 가는 내용이라면, 2, 3부에선 시간이 흘러  법대생이 된 미하엘이 우연히 나치 전범 재판에  참석하면서 피의자가 돼 법정에 선 한나를 보게 되고, 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면서 겪는  내면의 갈등과 고뇌가  섬세하고 심도 있게 그려진다.

미하엘은 재판이 진행되면서 한나의 실체를  알게 다. 그녀는 2차 대전 중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한 나치의 부역자였다. 지멘스에서 승진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자리를 거부하고 친위대에 들어갔고, 서부로 행군할 때 폭격이 있었는데, 수감자들이 머무르던  교회에 불이 났음에도 잠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는 각한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받는다. 


미하엘은 과거를 돌이켜 기억의 퍼즐을 맞춰보고 그녀가  왜 그토록 책에 집착으며, 또 자신을 감추고 살았는지 이해 한다. 그녀는 문맹자였으며, 과거의 잘못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은둔자였다. 


재판과정에서 그녀와  같은 죄로 기소된 여자들은 그녀가 보고서를 작성했다며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그녀는 처음엔 자신의 입장을 나름 적극적으로 방어해보려 했지만 갈수록 체념하고 오히려 담담해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고서와  피의자필체를 대조해보겠단 말에 스스로 모든 죄를 인정하고 만.


이부분에서 그녀가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마하일도  똑같은 심경을 토로한다. 아무리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해도 역사에서 결코 씻을 수 없는 범죄자로 남는 것이 더 나을 수는 없다. 물론 그녀는 역사의 죄인이다. 당시 자신이 하는 일에 충실했고 개인으로서 당시 사태를 수습하기에 무력했다 해도 그 자리에 있었단 사실만으로도 죄인이다. 하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에 비해 더 무거운 형량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가 지키려는 것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삶에서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자신의 치명적 결함인 무지였다. 그래서 승진의 기회가 올 때마다 그것을 마다하고 읽고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을 찾아 황급히 떠났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문맹과 무지를 가장 수치스럽게 여긴 것은 역설적으로  앎에 대한 그녀의 지적 욕구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소설은 표면적으로 십대 소년과 성숙한 여인의 파격적인 육체관계와 사랑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작품을 관통하는 역사의식과 책임이라는 깊은 철학적 담론이 내재돼 있다.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은 물론  삶의 여정에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간과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준다. 또한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라 해도 여전히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결코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수감 중에 그녀는 오랫 동안 미하엘이 의 음성을 담아 책을 읽어 보내준 테이프를 들으며 글을 익혔다. 그들의 사랑은  책을 매개로 지속다. 처음 사랑이 관능적이고 육체적이었다면  이후 사랑은 정신과 마음으로 교감하는 플라토닉 사랑처럼 느껴졌다.


한나가 출감 직전 자살한 것은 그녀가 글을 알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중대성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꼬마(미하엘)를 진정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결합될 수 없다는 비극적 인식에 도달했을 것이다. 


책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비록  무지해서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저지른 행동이라도 누구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설사  타인이 이해하고 용서해 준다 해도 스스로는  죄책감이란 짐의 무게를 평생 견디며 살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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