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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Apr 23. 2018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책이다. 블랙코미디 한 편을 보고 난 느낌이랄까?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 있는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인물들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말과 행동의 이면에 숨겨진 고독과 절망이 겨울처럼 마음을 시리게 했다. 전후 시대 사회상을 뛰어난 감수성으로 예리하게 파헤쳐 60년대 문단의 총아라 불렸던 작가는 섬세하고 세밀한 사물 묘사, 인물들의 냉소적인 대화와 무기력한 행동을 통해 암울한 시대의식을 잘 표출하고 있다.

     

「서울, 1964 겨울」,  시대와 장소, 겨울이 풍기는 이미지는 책을 읽기 전부터 역사적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1964년, 특정 시대의 표면은 한 나라 국민이 공유한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분위기, 그 저변에 흐르는 정서와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소설 시작 첫 문장에서 작가는 도장 찍듯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1964년 겨울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고된 일상을 마치고 뭔가 허전하고 외로워 들리는 선술집, 청승맞게 혼자 마시다 술기운이 돌면 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서술자 ‘나’는 저녁이 돼 선술집에 들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대학원생 ‘안’과 행색이 초라한 정모를 남자를 만난다. 먼저 25살의 동갑내기 ‘나’와 ‘안’이 대화를 하는데 생뚱맞고 황당한 질문과 답이 오간다.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흘리는 잡담과 우스갯 소리에 삶의 비애와 허무가 느껴진다.


‘안’이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과거 경험담을 랩처럼 쏟아낸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떨어졌고, 미아리에서 하숙하던 시절 만원 버스를 타는 것을 즐겼는데, 그때 여자 아랫배의 꿈틀거림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안’은 자신이 말하는 꿈틀거림은 ‘데모.’같은 것이라 했다. 또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면서 ‘나’에게 알고 있냐고 따지듯 묻는다.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서로 엉뚱한 질문을 하고 다른 답을 하는 그들은 동갑으로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별로 공통점도 없고 공감도 없이 대화는  단절되기 일쑤이다.

     

역사의 질곡 앞에 개인의 삶은 참담하고 무력했다. 4.19혁명 실패로 깊은 죄절과 혼란에 빠진 사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보다 전체를 강조하고 경제개발을 최우선으로 추진한다. 모든 개발의 중심지가 된 서울은 욕망의 도시로 전락하고, 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사천리로 질주한다. 자유를 억하고 개인의 의사가 무시됐던 독재정권에  저항하지만 너무 미약하고 무기력한 지식인의 독백처럼 , ‘그냥 꿈틀거리는 거죠. 예를 들면 데모…’  라 읊조리 '안'의 꿈틀거리기만 하고 어쩌지 못하는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와 ‘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합석하고 셋은 자리를 옮긴다. 그런데 사내는 돈을 쓰지 못해 안달이다. 그는 월부서적 외판원으로 부인이 급성 뇌막염으로 죽자 4천 원을 받고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괴로워하며 함께 돈을 다 쓰자고 제안한다. 셋은 중국집에 들러 요리를 시켜 먹고 나온다. 그때 불자동차가 그들 옆을 지나자 택시를 타고  따라간다. 그들은 불난 건물 앞에 내려 구경을 한다. 그때 서적 외판원 사내는 남은 돈을 불 속으로 던져버린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가오자 셋은 여관에 들게 되고 외판원 사내는 두 사람에게 같이 있어달라고 애원한다. ‘나’는 그가 불쌍한 생각에 그러자 했지만 무언가를 눈치챈 ‘안’은 자신은 혼자 방을 쓰겠다고 한다. 결국 각자 홀로 방으로 들어가고 다음 날 ‘나’와 ‘안’은 서적 외판원 사내가 자살한 것을 발견하고 급히 그곳을 나온다.

언제부터 이처럼 비정한 사회가 돼버렸나. 작가는 세 인물을 통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음에도 물질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물질만능 풍조가 인간소외를 불러왔다고 비판한다. 서적 외판원이 아내의 시체를 병원 해부용으로 판 것도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를 지키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와 같이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다면  서적 외판원처럼 고독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할 지 모른다.


대학원생인 ‘안’이라는 인물은 지식인으로서 매우 냉소적이고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부조리하고 모순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문제의도 갖고 있지만, 실천할 용기가 없는 지식인이다. 그렇기에 서적 외판원이 자살할 것을 짐작했지만 모른 척 방관한다. 그리고 그를 홀로 두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합리화한다. ‘나’ 역시 짐작을 못해 어쩔 수 없었다고 문제를 회피한다.

    

겨울의 어느 저녁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루 동안 벌어진 을 다룬 소설은 암울했던 60년대 사회의 모습을 춥고 황량한 겨울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공장의 부품처럼 취급돼 밤낮 없이 일을 하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궁핍한 삶을 살았다.


서술자 ‘나’는 대학에 떨어진 후 현재 구청에서 근무하고, ‘안’은 부잣집 아들이지만 무엇 때문인지 방황한다. 당시 동갑의 두 인물은 개인적 삶의 모습과 생각은 달랐지만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의 한  배를 탔기에 그들의 초상은 고독과 소외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조로해버린 사회처럼 자신들도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고 느낀다.

     

다음은 매우 인상적이고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구절이다.

     

여관에 비한다면 거리가 우리에게는 더 좁았던 셈이었다. 벽으로 나눠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었다.’


어느 시대건 존재하는 들이다. 날로 많아지고 높아지는 고층 아파트를 보면서 성냥갑처럼 나눠진 방들을 생각한다. 앞집, 아랫집, 윗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굳게 닫힌 문은 단단한 벽처럼 견고해 보인다. 닫힌 문 속에서 고독사한 사람을 한참이 지난 후에 발견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고 보면 비정하고 삭막한 삶의 모습은 1964년이나 현재나 별로 다를 바 없다. 책을 덮으면서, 점점 각박해지는 시대에 서적 외판원처럼 홀로 고립돼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것은 역시  따뜻한 마음일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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