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마실 것을 사고 있던 나는 갑작스런 부름 소리에 놀라 받은 커피를 아무렇게나 놓고 어른들을 따라 조그만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이모, 엄마의 한숨 섞인 울음소리가 나지막이 방을 채웠다. 하얀 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눈부시게 새하얗고 딱딱한 뼛조각들을 가리키며 조심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화장이 잘 끝났습니다.” 할아버지의 뼈는 컨베이어 벨트 같은 차가운 쇳덩이 위에 동그랗게 모아져 있었다. 아저씨는 눈물을 쏟는 우리 가족들로부터 천천히 등을 돌려 작은 손빗자루 같은 것으로 뼛조각들을 살살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울부짖듯 말씀하셨다. “사람을 어찌 저래 맨들아뿟노.......” 이모와 엄마는 서로 어깨를 감싸 안고 말없이 울기만 했다. 이윽고 하얀 셔츠의 아저씨가 하얀 천보자기에 싼 유골함을 엄마 품에 안겨주었다. 엄마는 유골함이 너무 따뜻하다며 더 많이 울었다. 나도 장지로 가는 차 안에서 유골함을 안아보았다. 갓 받아든 커피 잔보다 훨씬 뜨거웠다. 작년 3월 초의 일이다.
쇳덩이 위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던 뼛조각들의 이미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들은 타고 남은 할아버지라고 하지만 실은 할아버지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이질적인 물질, 우주를 떠돌다 어느 날 지구로 뚝 떨어진 유성의 잔해와도 같았다. 그날 그 방에서 내가 할아버지라고 불러왔던 존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처음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새하얀’ 거짓말 같았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온 장면이지만, 막상 눈앞에서 일어나는 화장의 과정과 그 결과는 기이할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불에 태우는 건 범죄행위지만, 죽었다고 선고받은 사람을 불에 태우는 건 합법이다. 그렇게 해서 관에 든 채로 활활 태우고 나면........ 나는 휴대폰 사진함에 저장되어 있는, 0과 1로 된 할아버지의 ‘생전’ 이미지를 열어본다. 고운 보라색 니트 위에 남색 목도리를 가지런히 맨, 반들반들한 대머리 아래 순박한 눈매를 하고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은 다 타고 남은 차가운 뼛조각 이미지와 좀처럼 호환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할머니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사람을 어찌 저래 맨들아뿟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수치심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든 문예 동아리에서 각자 창작품 한 편씩을 가져오기로 했다. 선배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단 하루 만에 원고지 50매 분량의 단편 소설을 썼고, 일단 쓰기만 하면 완성한 것이라는 이상한 자신감으로 총평모임에 나갔다. 한 고등학생의 자살과 그 이후를 다룬 나름의 야심작이었다. 야심작이 졸지에 ‘망신’작이 된 것은 한 선배의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 덕이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장례를 왜 한 달 뒤에 해?” 다소 진지했던 선배의 지적은 ‘아직 어리니 장례식에 대해 잘 모를 것’, ‘아무리 그래도 소위 “대학생”이 장례에 대해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등등 다른 선배들의 유쾌한 수다거리로 전락해버렸다. 나는 내가 그런 ‘기본적인 상식’도 몰랐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날 총평에서는 다른 1학년생의 시가 주목을 받았고(그 애는 결국 몇 년 뒤 유명 신문사 신춘문예에 등단하는 쾌거를 이룬다), 그 때문인지 수치심만 무한히 증폭되어 다시는 문예 총평에 나가지 않았다. 건전한 성장은 없고 미련스러운 흑역사만 남은 셈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처럼 순수하게 무지해도 될 만큼 죽음, 그리고 장례와 거리가 먼 곳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례식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 오랜 수치심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친구가 새벽같이 운전해 태워다 준 울산의 한 장례식장에서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퉁퉁 부어버린 엄마의 얼굴이었다. 엄마와 동생은 할아버지가 응급실에 계시다는 연락을 받고 먼저 내려간 상황이었다. 열차 안의 적막 속에서 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할아버지의 사망선고를 들었다. 당시에 대해 엄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동생은 씁쓸하게 그날을 곱씹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전화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느낌이었어.” 의사의 음성은 놀라우리만치 냉랭했다고 한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했을까.” 담당의는 할아버지가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연세를 고려할 때 별다른 가망이 없다, 따라서 할아버지보다 차라리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게 더 낫다는 투로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던 나는 과거 아픈 엄마를 모시고 응급실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링거를 꽂은 채 누워있는 엄마에게 의사는 중년여성의 흔하디흔한 ‘꾀병’이라며, 빨리 돌아가라고 보챘다. 병과 죽음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는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달을 때, 의사라면 누구나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걸까. 죽음과 장례식은 문예 습작으로나 끼적일 한낱 장난 같은 일이 아니라는 걸, 엄마의 빨갛게 부어오른 눈이 말해주었다. 수치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두려움과 아득한 공허감이 남았다.
영정사진은 과일과 떡들 위에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꼭 텅 빈 무대 위에 오도카니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돌아가셨다는데, 모두들 진짜 할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이미지와 함께 있었다. 퍽 이상한 기분이었다. 시신은 감염 위험이 있어 염과 소독을 거친 후 아주 잠시만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마저도 코로나19의 ‘선화장 후장례’ 정책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난,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라고도 했다. 사랑했던 이의,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할 예정이었던 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차가운 뼛조각으로 마주한 사람들의 심정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엄마와 이모는 울지 않았다. 온갖 절차에 치여 반쯤 혼이 나가있는 것 같았다. 외려 두 사람은 나와 동생, 곧이어 도착한 친지들을 걱정했다. 슬픔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챙겨야만 하는 어른의 초인적인 고독감이 두 사람 얼굴에 짙게 드리워 있었다. 사진 속 밝고 담대한 할아버지의 미소와 대조적이었다.
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었다. 그다지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장선생님’이라는 단순명료한 틀 속에 가두어두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조차 그 분이 교장인지 모르고 지나칠 때가 있었다고 한다. 손에는 전지가위를 들고 말없이 교정을 거닐던 할아버지는 흡사 나무그늘 같았다. 크고, 넓고, 고요한 사람. 집안에서는 구심점이 되고, 집밖에서는 두루 존경받는 어른이었지만, 누구도 그 분의 그런 위치를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고요한 나무그늘. 이모는 할아버지가 하시는 수업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 “교실이 떠나가라고 학생들이 왁자하게 웃었다니까. 그 정도로 재치가 있으셨어.” 그리 놀랍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역시 유머와 위트가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무그늘처럼 고요하지만, 이따금 사람들 사이에 기분 좋은 웃음을 퍼트릴 수 있는 사람.
할아버지는 종종 엉뚱했다. 방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손녀 머리칼이 고양이털보다 많다느니 하는 종류의 실없는 말을 하셨다. 얼핏 듣기엔 싱거워도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만의 가벼운 유머가 섞여 있었다. 듣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말미에는 짧고 귀여운 너털웃음을 추가하는 것도 할아버지만의 독특함이었다. “허헛.” 그는 누구에게도 부러 짐이 되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평생 국어만 가르친 덕분에,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일까. “엄마 혈압에 좋다카는 비방이 많이 적힜드라, 잘 여둬라.” 고혈압을 앓는 첫째 딸의 건강이 유독 걱정됐는지, 철마다 스크랩해 모아둔 신문기사들을 내 손에 꼭 쥐어주곤 하셨다. 네모 반듯, 정갈한 종잇조각들은 그 자체로 할아버지와 많이 닮아보였다. 그럴 때면 나는 1930년에 태어나 일제 치하, 광복, 6.25, 군부독재, 학생운동, 산업 성장기, IMF를 모두 겪어낸 이 슈퍼맨 같은 남자가 험난한 삶 속에서도 어떻게 늘 이토록 변함없이 다정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사진 속 할아버지도 실물 그대로 다정해 보였다. 하지만 시신이 된 할아버지는 조금 달랐다. 사람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 할아버지는 차가운 철제 침대 위에서 불투명한 비닐에 싸여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당황스러운 듯 두 눈은 꼭 감고, 입술은 풀로 붙인 듯 굳게 다물고 계셨다. 불편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어른들은 할아버지께서 자못 편안해 보인다고 하시기에 나 또한 결국 그렇게 믿게 되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할아버지의 살색이었다. 따뜻한 혈색이 곧바로 시퍼런 회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계’의 빛깔이었다. 이곳과 저곳, 이승과 저승에 걸쳐진 복잡한 중간색이었다. 해가 질 무렵 하늘이 불그스름한 보라색으로 다채로워지듯, 할아버지의 피부 위에서 삶과 죽음이 함께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독특한 살색을 보며 새삼 로봇과 인형이 제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사람을 그대로 본뜰 수는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것들은 태어난 적이 없기에,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한 달 뒤에 장례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철모르던 내가 머리에 하얀 리본을 꽂고 할아버지가 더 이상 계시지 않는 할아버지 댁을 향해 터덜터덜 캐리어를 끌며 걸어갈 때쯤, 마음속에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아득한 기억 속의 한 장면이었다. 대문 앞에 서서 배웅하는 할아버지. 구부정한 등으로, 주춤하게 서서는 점점 멀어지는 우리들 뒷모습만 보고 있던 할아버지. 소리쳐 불러 세우지도 않고, 그저 우리가 골목 어귀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만 있던 할아버지. 연이어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 저희 왔어요!”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오는 골목 한참 전부터 동네가 떠나가라 목청 높여 아버지를 찾던 내 어머니의 설렘 가득한 목소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새벽, 불 꺼진 동네 골목을 고개를 푹 숙인 채 말 없이 걸어가던 엄마의 발자국 소리가 마치 서러운 아이 울음소리처럼 느껴졌던 건 왜일까. 나는 엄마께 효도하라는 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리면서 사진 앞에 절하고 또 절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효도해도 엄마에게는 언제까지나 할아버지가, ‘아버지~’하고 정겹게 부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하면서.
장지로 가는 길에 받아든 유골함은 따뜻하기도 했지만 제법 묵직했다. 함의 무게를 빼면 실제 할아버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생전의 할아버지는 내게 안길(?) 일이 크게 없었다. 소위 ‘옛날’ 분이지만 키가 175센티미터가 넘고, 근육도 제법 단단해 연세가 들어서도 무게가 꽤 나가는 편이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말 그대로 ‘한줌’이 되어 내 무릎 위에 놓여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전해져오는 따스함과 그 무게에 말문을 잃고 한동안 차창만 바라보았다. 카페에서 받아두었던 커피 네 잔은 그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커피 한 잔보다는 훨씬 무겁고 생전의 할아버지보다는 훨씬 가벼운 이 유골함을 조심스럽게 들어 도로 엄마 품에 안겨드렸다. 할아버지는 한없이 가벼워져 버렸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옛 기억들과 그로 인한 슬픔 때문에 모두의 가슴은 더없이 무거워져 있었다. 이 무거움이, 할아버지만의 무게가, 온기가,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우리들로부터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