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두둑 투두둑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잠을 깨운다. 눈꺼풀 가득 쌓이는 잠을 털어내며 전기 포트에 물을 붓고 전원을 켰다. 원두 10g을 계량해서 그라인더에 넣고 갈았다. 윙 소리를 내며 그라인더가 작동되었다. 알맞게 로스팅된 원두가 하나둘 그라인더 속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왱하고 빈 그라인더의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자 얼른 스위치를 껐다. 커피 서버에 드리퍼를 놓고 여과지를 접어서 올린 뒤 96도로 펄펄 끓는 물을 드립 주전자에 담아 여과지를 적시고 분쇄된 원두 가루를 드리퍼에 툭툭 털어 넣었다. 드립 주전자로 최대한 가느다란 물줄기를 유지하면서 드리퍼 가운데부터 나선형을 그리며 붓는다. 물을 내릴 때면 집중해서 따르게 되고 마치 바리스타라도 된 기분이 든다. 서버 가운데에 물이 점점 차오르고 묵직한 거품이 빵처럼 올라온다. 물줄기가 높고 가늘면 산소가 많이 섞여 들어가 더 맛있어진다고 한다. 커피에 뜨거운 물을 섞어 블렌딩을 한 뒤 컵에 따랐다.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따스한 커피를 마신다. 비 오는 날이면 커피의 향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든다. 커튼을 활짝 열었다. 빗방울이 부서지며 안개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이 추운 듯 나뭇가지를 바르르 떨고 있었다. 창밖의 냉기가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 옷깃을 여미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온몸으로 온기가 가득 차 올랐다.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무렵 커피를 처음 만났다. 종로에 있는 서점에 가려던 참이었다. 오빠가 종로에 있는 다방으로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라며 같이 가자고 했다. 처음 가는 다방에서 어색함을 숨기며 소파에 앉았다. “여기 비엔나커피 세 잔 주세요.” 오빠의 주문에 비엔나커피가 어떤 건지 궁금했다.
잠시 후 쟁반에 꽃 그림이 있는 고급스러운 잔을 갖다주었다. 부드러운 크림 위에 계핏가루가 살짝 뿌려져 있는 비엔나커피는 이름처럼 근사해 보였다. 두 손으로 커피잔을 들자 따스함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계피와 크림의 달콤한 향이 바람처럼 코끝으로 밀려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한입 마셔 보았다. 부드러운 달콤함과 계피 향이 향기로웠다. 다음 순간 갑자기 쌉싸름한 커피 맛이 불쑥 들어왔다. 놀랄 새도 없이 입안 가득 쓴맛만 남겨놓고 목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꽃향기에 취해 걷다가 나무에 머리를 쾅 부딪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달콤함 뒤에 오는 쓴맛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일식집을 하다가 팔을 다쳐 장사를 접었다. 부러진 팔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어떤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대형카페에서 마케팅과 커피라는 주제로 수강생 모집이 있어 신청했고, 수강생으로 선정되었다. 교육장에서 기본 마케팅교육과 핸드드립커피 추출하는 법, 라테 만드는 법을 배웠다. 커피는 원두를 어떤 방법으로 로스팅했는지, 혹은 로스팅한 기간에 따라 맛이 또 달라진다고 했다. 추출하는 방법에 따라 수십 가지의 맛과 향이 난다고 하니 신비한 음료였다. 원두를 직접 갈아 만든 갓 내린 커피는 맛이 깔끔하고 목 넘김이 좋았다. 그동안 마셨던 커피와 아주 달랐다. 커피음료의 종류도 무궁무진했다.
그 후 교육과정을 통해 알게 된 커피를 연애하듯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아메리카노를 비롯하여 헤즐럿아메리카노, 콜드브루라테, 캐러멜 마끼아또. 커피는 만날 때마다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새로운 연인을 만나고 그 사람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처럼 설레었다.
그러다가 내가 직접 커피를 내려서 마셔보고 싶어졌다. 커피그라인더와 드리퍼, 드립 서버, 여과지, 드립 주전자 등 핸드드립 기구들을 샀다. 직접 핸드드립을 해서 커피를 내리고 마셔보았다. 처음 커피를 내려 마실 땐 생각했던 커피 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커피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고 물을 끓여서 커피를 드리퍼에 내리는 과정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었다.
이젠 몸이 지치거나 힘들 때도 기분이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시며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따스함과 구수한 커피의 향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게 소확행일까?
오늘도 커피를 내려 마시며 행복함에 젖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