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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그늘 May 05. 2023

음식여행

생멸치 굽는 행복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는 들었지만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일을 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또한 정신건강에 좋은 일이다. 그런데 여러 군데 이력서를 제출해 보았지만 연락이 없었다. 아마 수십 군데 지원을 한 것 같은데 면접 보자는 연락도 없다. 


얼마 전 구청에서 하는 요리반에서 같이 수학하던 아줌마들과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서 취직과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했다. 사십 대 중반 되어 보이는 분은 얼마 전 슈퍼마켓에 이력서를 냈다가 떨어졌다며 한숨을 쉰다. 다른 분은 나와 비슷한 연배였는데 웃으시며 요즘은 오십 대가 넘어가면 사람 취급도 안 한다고 한다. 그래서 취업이 쉽지 않다고 하면서 같이 웃었다. 


그래서 이력서를 많이 보냈는데 연락조차 없었구나 싶어 우울했었다. 그런데 오래전에 이력서를 내고 연락 없이 마감된 곳에서 문자가 왔다. 아직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면접 보러 오라고 한다. 반가운 마음에 다음날 시간 약속을 정하고 면접을 보았는데 밤늦게 전화가 왔다. 근무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나니 실감이 났지만 일의 강도가 어떤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조리 보조와 설거지하기가 해야 할 일이다. 


우선 첫날은 대방어, 연어, 광어, 도미 등 생선의 비늘 긁기. 새우나 한치 같은 냉동재료의 수분을 빼거나 소금물에 살짝 녹여서 수분을 제거한 뒤 작은 통에 소분하는 것, 메밀소바 만들어서 내어주기, 포장용 장국 통에 담아 보관하기, 재료 준비를 하면서 열한 시 반부터 오픈하면 계속 설거지를 해야 한다. 식기세척기가 있지만 커다란 찜솥이나 초밥 비비는 그릇은 크기가 커서 좁은 싱크대에서 설거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개수대엔 설거지가 수북하다. 할 일은 많고 마음은 바쁘고 당황하면서도 속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뇌며 눈에 보이는 대로 설거지를 했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설거지와 튀김과 메밀 소바 만들기를 하다 보니 조금씩 요령이 생겼다.


정어리 통조림을 손질했다. 메밀소바에 튀겨서 올려주는 것인데 미리 손질해서 쟁반에 펼쳐 놓았다가 필요할 때 한 개씩 꺼내어 사용한다. 정어리 통조림을 따서 체에 부어서 물을 빼고 반 갈라서 속에 있는 등뼈만을 살짝 꺼낸다. 모양이 부서지지 않게 랩을 깐 쟁반 위에 놓는다. 


정어리를 손질하다 보니 어릴 때 아버지가 구워주셨던 생멸치가 생각난다. 생멸치는 그때 이후로 못 먹어 봤지만 지금도 그 고소한 맛이 입안에 느껴진다. 아버지가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 달군 뒤 정어리와 비슷한 크기의 생멸치를 통째로 올려놓고 구웠다. 


봄철 강원도 묵호 부둣가에서는 생멸치를 구워 뼈째 으적으적 씹으며 소주를 들이켜는 어부들이 많았다. 금방 잡아 싱싱한 것이라 더 맛있던 것 같기도 하고 고등어나 꽁치와는 또 다른 맛의 생멸치구이는 자글자글 기름 맛이 좋았던 것 같다. 


석쇠 위에서 생멸치가 익어가면 지글지글 타면서 기름이 불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기름이 떨어져 내린 곳에서 붉은빛의 불꽃이 휙 올라왔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엔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남았다. 그 소리와 냄새만으로도 입에 군침이 돌았다, 젓가락을 입에 물고 생선이 익기를 기다리는 순간 따스한 불빛마저 맛있어 보였다. 아버지가 그릇에 한 마리씩 담아주면 생멸치의 껍질은 부글부글 거품이 나면서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로 나를 유혹했다. 한점 떼어서 호호 불면서도 그 잠시를 못 참고 입에 불쑥 넣었다가 “아 뜨거워!” 혀를 데어 가면 먹던 생멸치구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부잣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을 하실 만큼 남부럽지 않게 사셨던 아버지가 늘그막에 자식들 입에 밥을 넣어 주려고 생전 하신 적 없는 어부 일을 하셨다. 엄하고 고지식하고 엄마에겐 의심으로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셨던 아버지였지만 그 시절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원치 않는 삶을 사시면 그 고단함으로 인한 화풀이를 엄마에게 쏟으셨던 걸까? 아니면 스스로 낮아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허세였을까? 


부모 노릇을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책은 많지만 나에게 딱 맞는 맞춤형 부모 노릇 책은 없으니 그저 알아서 모든 것을 가족들과 같이 마음을 맞추고 다독이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귀한 음식 한 점 자식의 입에 넣어주고 흐뭇한 행복에 젖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같다. 폭력적이고 고지식한 아버지를 닮지 말고 자식을 위해 같은 음식을 먹으며 행복을 나누는 부모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생멸치가 아닌 꽁치라고 구워 식구끼리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저녁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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