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알려주는 것들
이틀 연속으로 코피를 쏟았다. 전례 없던 일이다. 대충 휴지로 코를 틀어막으며 이게 환절기의 영향인가 생각했다. 아침의 공기가 서늘했다. 이젠 방의 창문을 닫아야 할 때라고 느꼈다. 며칠 전 새로 산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꽤나 고대하던 순간이다. 평소 가디건과 니트류를 좋아한다. 가디건과 니트를 입을 수 있는 계절도 좋아한다. 예컨대 가을과 겨울을. 뭐든 낙하하는 계절을. 잎사귀가 낙엽이 되는 바로 그 순간들을.
오늘은 산을 오르기 좋은 날이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언제나 삶과도 같다고 느낀다. 올라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옆으로 펼쳐진 서울의 전경도,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도. 그저 다리가 아프고 올라가야 할 길이 아득할 뿐. 내게 산을 오르는 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오르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나는 너무나 고된데 왜 마주 내려오는 이들의 표정은 그렇게도 가벼운지 알 수 없었다.
그 표정의 의미는 내가 하산에 접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올라가는 일이 치열했다면 내려가는 일을 목전에 두고는 편안함과 가벼움을 느낀다. 같은 길일지라도 걸음에 임하는 마음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덕분에 내려가는 길에는 비로소 옆을 보게 된다. 오르는 길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서울의 모습을, 나뭇잎 사이로 아득하게 보이는 말간 하늘을. 그리고 바닥에 쓰여있는 ‘천천히’ 따위의 문구를.
맞다. 내려가는 일은 오르는 일만큼 어렵지 않은 대신에 늘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정상에 오르는 일보다 무사히 내려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 끝에는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무사히 잘 내려오는 일이 더 중요해도 대게 하산이 등산보다 더 금방 끝난다. 대부분이 그런 것 같다. 어릴 적 도미노를 줄 세우는 데에는 한나절이 걸렸지만 그걸 상자에 정리하는 데에는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빛과 그림자의 속성처럼 오르는 일엔 내려오는 일이 수반된다. 산은 삶과도 같아서 그 당연한 이치를 내포한다. 산을 오르고 나면 알게 된다. 고되게 오르는 일은 반드시 선물 같은 내리막을 선사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뿌듯하게 내려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심히 올라야 함을. 오늘 나는 산을 오르고 알았다. 오늘의 산을 나는 꼭 겪었어야 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