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사랑할 때
여자로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의 내면의 작은 소녀는 여자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있다
내 안의 작은 소녀
내 안의 내면 아이와 만나고 나서부터 마음과 정신이 한 결 가벼워졌다. 내면 아이에게 가는 법을 드디어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우리 둘만의 사랑의 신호도 생겼다. 나의 10살 아들과도 종종 하는 사랑의 표현을 해주었고 내면 아이도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셀러는 마음으로 심리 상담 수업에 갈 준비를 했다.
" 선생님, 드디어 저 저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만난 것 같아요.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고통스러워서 중간에 그만 두곤 했는데 드디어 성공했어요."
" 내면 아이를 만났다고요? 내면 아이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유뷰브를 보고 내면 아이 만나는 방법을 반신반의하면서 따라 해 봤어요. 잘 되지 않았지만 드디어 어제 전 제 내면 아이를 만났답니다."
"놀이터 모레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어요. 다 먹은 아이스크림 바로 땅에 화풀이하듯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한 손에는 제가 잊고 있었던 제 애착인형 곰돌이도 있었어요. 영화처럼 선명했어요."
" 내면 아이와 인사나 대화를 나누었나요? "
" 네. 조용히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하자 놀랐는지 일어나서 미끄럼틀 뒤로 몸을 숨기면서 저를 보더라고요."
" 사랑의 암호도 서로 만들었어요! "
" 축하합니다. 도연씨. 내가 다 기쁘네요."
" 빨간 멜빵바지에 흰색 티셔츠 그리고 머리는 디스코 머리로 쫑쫑 땋았더라고요. 아직도 기억나요. 엄마는 출근하시면서 제 머리가 헝클어질까 봐 제 양눈이 쓸려 올라가도록 세 개 머리를 땋아주곤 했어요. 머리가 흘러내리거나 풀러 지지 않도록. 그래서 제가 머리 땋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
내 안의 작은 소녀의 정체성을 찾아라
부모님이 일부러 그러신 것은 아니었지만 가정 형편상 두 분 다 나가서 일을 하고 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집에 계시지 않았고 난 늘 혼자였다. 외롭고 무섭고 슬펐다.
보호나 건강한 보살핌이나 애착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를 자신의 정체성의 잃어버리기도 하며 내면아이는 건강하지 못한 중독적인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그 중독적인 죄책감은 유일한 ' 참다운 나'가 될 권리를 부인하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당신의 정신적인 상처를 심화시킨다. 죄책감의 형태는 두 가지 모습을 띠는데 하나는 역기능적인 가족체계에서 온다. 가족체계의 구성원들은 체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두 엄격한 역할을 떠맡고 그중 한 사람이라도 그 역할을 포기하려고 한다면, 구성원 모두는 그 사람에 세 분노하여 죄책감을 강요할 것이다. 또 다른 형태의 죄책암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에서 온다. 이것은 반전된 분노로서 상처받은 내면 아이는 종종 부모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분노를 표현할 수 없었을 때 나타난다.
- 존브레드 쇼의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중 <Pg.338> -
그렇다 나의 나를 비난하고 나 자신을 향해 분노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잘 못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을 눈치를 보면서 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모든 화살과 책임을 나에게 돌렸다. 이제 다시 나의 내면 아이를 치유하고 나를 다시 되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상처는 부분적으로는 학습결핍의 결과라 할 수 있다고 존브레드쇼는 책에 썼다. 이는 새로운 학습을 통해 교정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많은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간직한 채 자란 성인들은 대부분 발달단계상 습득해야 했던 기술의 결핍으로 생긴 엄청난 고통과 불안이 자리 잡은 커다란 내면 속의 공간을 가지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목표를 이루고 소위 말하는 성공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허전하고 허무했던 것이다. 나의 미성국한 행동들이 바로 학습결핍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내 실패나 나의 성격적인 결점에 대해 수치스러워했고 스스로를 가혹하고 비난하곤 했던 것 같다. 나의 그림자와 싸우는 쉐도우 복식처럼, 내게 최대의 적은 나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나' 스스로가 독이었다. 마치 건강한 면역체계가 암세포만 공격하는 것이 아닌 정상 세포까지 공격해서 나를 무너뜨리는 기분이 든다.
다 표현되지 못했던 슬픔들은 불안으로 인한 셀프 공격, 셀프 과잉통제, 기억력 쇠퇴, 우울, 과다경계로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실제로 나의 내면에서 내가 말하는 내면의 신호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부모님이 원하거나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실행하거나 사회에서 충족될 일 들만 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40살이 넘은 후에야 그걸 깨달았다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깨달은 것이 어디냐고 나는 나를 위로한다.
나는 이제 아들에게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
이제 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유년기 시절 마땅히 받아야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란 내가 내 아이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엄마의 말 습관, 엄마의 자존감, 엄마의 왜곡된 인지도가 고스란히 나의 아들에게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제 와서 다시 어떻게 돌이키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겠냐고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나의 내면 아이와 나의 아들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요즘 나에게 떨어져서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나의 아들을 관찰한다. 놀랍게도 내가 아들에게 잘 되라고 했던 교육이나 훈육들이 꼭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내면 아이가 처해있는 상황에서만 통용되는 규칙과 철칙들을 나는 나의 아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요즘 그래서 나는 가끔 아들에게 말하기 두려워진다. 훈육과 교육의 명목으로 내가 아이의 가치관이나 자존감에 상처를 줄까 봐 두렵다. 지금 내가 일 년 넘게 상담 센터를 다니고 또 나의 내면 아이 만나는 연습을 하고 다양한 훈련을 하는 것도 나의 5살 내면 아이가 나의 10살 아들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동안은 나와 나의 내면 아이를 함께 양육해야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늦지 않고 지금이라도 상처받은 나의 내면 아이와 재회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도 아들을 또 다른 타인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려 한다.
당신의 내면 아이는 몇 살인가요?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있다면 오늘 그 아이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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