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대를 사모으는 여자

생리대를 계속 삽니다.

by 이도연 꽃노을





생리대 살 돈없던 나는 생리할 때가 돌아오면 불안했다.
생리는 내 의지대로 조절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리대를 사모오는 여자




집 앞 현관에 쿠팡 로켓으로 아침에 배송된 물품이 여러 개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남편은 배송된 물품들을 주방에서 열어 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뛰어가 제일 부피가 큰 배송물품을 낚아채듯 화장실로 가지고 왔다. 화장실 정리 서랍에는 갖가지 사이즈와 두께의 생리대가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있는데 나는 오늘 산 생리대를 우격다짐으로 정리한다. 이미 정리 서랍에는 생리대가 꽉 차서 더 이상 들어갈 곳이 마땅치 않은데 말이다. 그리고 2주 후 나는 또 생리대를 주문했다. 그러자 남편이 한소리 한다. 생리대 많던데 다 쓰고 사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컴퓨터 방으로 도망치는 발걸음을 옮겼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으니 ' 홀로 힘들어하는 소녀들이 내일을 꿈꿀 수 있도록 여러분이 함께해 주세요.'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굿네이버스 동영상이 반쯤 보다가 정지되어 있는 상태였다. 부모님이 이혼해서 아빠랑 살지만 엄마가 버리고 간 생리대를 쓰는 지수 이야기 그리고 동생한테 생리대를 양보해야 할지 고민하는 채은이 이야기까지 여성 청소년들에게 생리대를 후원하라는 한 단체의 후원 독려 영상이 자꾸 나를 지난 기억 속에서 데리고 갔다.


동영상에 나오는 친구들보다 더 큰 대학생이었을 때 일이다. 아빠는 해외로 일을 하러 나가시고 난 혼자 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살림이 빠듯했던 엄마는 나의 학비를 벌려고 지방에서 일을 하셨다. 한 달에 한 번씩 자취방세와 용돈을 주는 것으로 엄마의 생사를 확인하며 살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는 방세를 내거나 공과금을 내야 하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생리가 터져 버렸다. 신경을 쓴 탓인지 생리할 때가 아닌데 생리가 시작되었고 난 동기들에게 생리대를 안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생리대를 빌려 쓰기 시작했다. 아직 학생이기에 모아둔 돈은 없고 무조건 장학금 받는 게 엄마를 도와주는 것이라면서 돈 걱정 말고 공부만 하라고 하는 엄마 말이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어디 장학금 받기가 그리 쉬운가? 아르바이트를 하라는 말보다 장학금을 받으라는 말이 난 더 힘이 들었다.


다음 달에도 방세만 겨우 전달이 되었고 나는 불안했다. 심지어 강의를 듣고 있는데 검은 정장들은 입은 떡대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고 난 그들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들었다. OO 캐피털인데 엄마랑 연락이 되느냐고 묵직한 소리로 물어보다가 내가 나도 연락이 안 된다고 하니 또 찾아올 거니까 엄마랑 연락되면 우리들이 왔다 갔노라고 말하라는 말을 끝으로 그들은 학교를 떠났다. 강의가 끝나 나오는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나도 캐피털이 뭐 하는 곳인지 알지 못했기에 설명할 수 없었다.





생리대 살 돈이 없었던 여대생



여자로 태어난 것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점점 연락이 뜸하셨고 심지어 한 달에 한번 주시던 방값도 밀리게 되면서 나는 영어 유치원생을 가르치는 영어 선생님 알바를 시작했다. 엄마의 동의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방세와 다음 달 생리를 하면 사용할 생리대 걱정이 제일 컸다. 다른 것은 안 입고 안 먹고 할 수 있지만 매달 꼬박꼬박 돌아오는 생리는 정말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게 만들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필요하지 않았을 물건이었다. 알바를 했지만 아르바이트비를 정산받기 전이었기에 같은 학번이지만 한 살 많은 언니는 돈을 빌리게 되었다. 언제 갚을 것인지 묻지도 않고 그 언니는 나에게 10만 원을 빌려주었다.


99년도에 10만 원은 학생에게 매우 큰돈이었다. 난 그 돈의 절반으로 생리대를 샀고 아르바이트비를 받고도 제일 먼저 산 것은 생리대였다. 항상 가방에 그리고 사물함에 생리대를 구비해 놓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 생리대를 다 쓰지도 않고 모은다. 하지만 차마 남편에게 내가 왜 그런 강박적인 습관이 생겼는지 말할 수 없었다. 보통 중상층 집에서 자란 남편이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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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용종에 자궁 적출 술을 한 여자


자궁을 적출하겠습니다




40대가 되니 그동안 지겹게 괴롭히던 생리통도 더 심해지고 생리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크기별로 두께별로 생리대를 사모아야 안심이 됐다. 결국인 오버나이트가 2시간도 안되게 포화상태가 이르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되고 나는 동네 산부인과를 갔다. 산부인과에서는 근종이 6cm라고 몰랐냐고 아무 증상이 없냐고 물어봤다. 6개월에 한 번씩 지켜보자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리고서는 자궁근종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기에 네이버 카페에서 '자궁근종힐링' 카페를 발견하고 가입을 했다.


그 카페에서는 결혼도 하기 전에 자궁 적출 술을 고민하는 여성부터 이미 자궁 적출을 하고 우울감을 토로하는 여성들까지 다양한 사례들이 많았다. 그렇게 눈팅만 2년 정도 하다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서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에 예약을 했다. 초음파 촬영을 하고 의사 선생님을 뵈니 위치가 생리통을 심하게 느낄 만한 위치라고 크기가 점점 커질 텐데 시술이나 자근 근종 수술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다시 진료를 보러 오겠다고 하고 난 집에 왔다.


몇 달 동안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었다. 카페에서도 근종은 흔한 것이고 수술을 금방 한다고 말하는 유경험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 마음은 어째서 인지 자궁 적출을 하고 싶어 졌다. 더 이상 2세 계획도 없고 매일 겪는 매달 그날이 너무 불편했다. 생리 중에는 밖에 나가는 일도 줄게 되었고 점점 생리대 용량을 빨리 넘어버려서 옷이나 침대 시트를 빨 일이 많아졌다.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았고 자궁을 적출하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을 했다. 선생님은 그 정도 까진 아니다 미레나 시술이나 근종만 수술하고 관리를 잘해 보자고 했지만 난 이미 결정한 상태여서 들리지 않았다. 난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궁을 적출하려는 의도보다 다시는 생리를 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더 이상은 생리대를 사모으는 일이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세 달 뒤에 나는 미련 없이 난소만 남기고 자궁 적출 술을 했다. 수술하고 회복하기까지 약 세 달이 더 걸렸지만 난 지금 만족한다. 생리를 안 한 지 이제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생리를 안 하니 생리대를 더 이상 구매할 필요는 없지만 아직도 이미 사놓은 생리대 들은 화장실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난 자주 굿네이버스에서 만든 동영상을 본다. 그 동영상에 나온 여자 청소년들이 과거에 나를 마주하는 것 같아서 슬프고 힘들지만 왠지 자꾸 리플레이를 해서 동영상을 시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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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를 기부하는 여자



나는 그때 어린 나를 위로하듯 생리대를 기부한다




오늘도 난 그 영상을 보면서 생각한다. 여기에 후원하면 진짜 과거에 나 같은 여자 청소년들에게 여성 물품이 전해 질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와 같은 친구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었는데 마음이 참 아프고 무겁다. 자기 잘못도 아니고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매일 다가올 그날이 움츠려 들지 않도록 난 그녀들에게 조그만 도움이 되고 싶어 후원을 시작했다. 그때 어린 나를 위로하듯... 자궁과 이별한 나를 치유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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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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