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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29. 2023

세 문장으로 쓰는 시 한 편

 내가 가장 좋아하고 유일하게 외우는 시는 안도현의 퇴근길이다. 수업에서 선생님이 지향하는 바가 쉽고, 짧고, 재미있는 시라는 것을 고려할 때 내 취향과 꼭 맞는 수업이 예상됐다.      


 여기서 잠깐, ‘퇴근길’부터 살펴보자.      


퇴근길     


                          안도현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단 두 문장이다. 그러나 직장인의 헛헛함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몇 년간 나의 퇴근길을 달래준 이 시는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아진다.     

 

 짓눌린 어깨. 무거운 발걸음. 그러나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을 바라보며 소주 한잔 털어 넣는다. 식도를 타고 위벽을 훑고 지나가는 쓴맛은 전두엽을 마비시키고 목구멍까지 차 있던 욕지거리가 캬하, 감탄사로 바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위력인가. 노릇하게 구운 고기 한 점까지 씹으면 녹색병은 금세 바닥난다. 머리가 얼얼하고 허기가 채워진다. 오늘의 고단함은 망각되고 내일을 살아낼 준비도 마친다. 이 오묘한 감정을 단 두 문장으로 구사하다니. 안도현님께 박수! 박수!     


 선생님도 수업 취지에 맞게 세 문장으로 시 한 편 써보길 제안했다. 상상만으로 기뻤다. ‘내가 혹시 퇴근길 같은 시를?’하는 기대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 그럼 이 분위기를 이어 세 문장으로 시 한 편 쓰는 비법을 알아보자.  

   

 일단 주위에 보이는 아무거나 세 가지 소재를 찾는다. 그리고 에 대해 한 문장씩 쓴다. 문장을 쓸 때 주의할 것은 전체를 뭉뚱그려 표현하지 말세밀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여기서 두 문장은 묘사, 마지막은 화자의 생각이나 감정이 들어가면 좋다.      


 수업 내용을 적용해 즉석에서 시 한 편을 써봤다.     



출근길     


하늘이 먹물처럼 어둡다

빗물이 허공을 적시며 떨어진다

내 마음도 비를 따라 검게 변했다     


  

  출근 준비 중인 남편에게 자작시를 읽어주고 물었다.

  “어때?”     


  남편이 대답했다.

  “좋아.”      


  나는 샐쭉하게 눈을 흘기며 추궁했다.

  “영혼이 없는데…”      


  머쓱한 표정으로 남편이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야 당연히, 내가 봐도 별로니까.”


  말로는 저평가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침에 현관문을 연다. 하늘이 우중충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전기장판에 배 지지며 하루종일 뒹구는 게 제격이다. 만화책과 컵라면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그런데 보기 싫은 인간들이 우굴거리는 직장을 향하는 발걸음이라니. 하늘에서 땅까지 흙빛일 수밖에.


 이 시는 궂은 날씨에 꼭 들어맞는 느낌을 표현했다. 먼 곳, 위라는 기준점을 두고 아래, 가까운 곳으로의 시선이동이 우울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아무도 못 알아볼 것 같아 열심히 설명 중……).    

 

 쓸데없는 자찬은 차치하고, 중요한 소식이 있다. 첫 시를 쓰고 연달아 두 번째 시를 썼다는 것. 나의 글 쓰기 루틴에 따르면 엄청난 이변이다. 이건 분명 좋은 징조?           


*두 번째 시는 다음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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