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혈증 약 타러 갔다가 현실을 마주하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느 때처럼 2달에 한 번, 고지혈증 약을 타러 갔다가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발견하고 온 것이다. 평소 보던 남자 의사가 휴가를 간 사이 대신 앉아 있던 여의사는, 마치 인생의 안내자처럼 우리 부부에게 중년의 현실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40대 후반이니 이제 바꿀 부분이 많습니다."
의사의 말은 진단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온 시간들이 실은 몸 안에서 조용히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이전처럼 먹고 마시고 운동하지 않으면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다는 경고는, 사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진실이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다소 안도감을 느꼈다. 그동안 내가 의지박약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자책했던 것들이 사실은 호르몬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내 탓이 아니라 테스토스테론 탓이었다니! 물론 이것을 핑계로 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는 받은 셈이다.
20대에는 몸이 무엇을 해도 괜찮았고, 30대에는 아직 젊다고 우겼는데, 40대 후반에 이르니 몸이 직접 나서서 말을 걸기 시작한다. "야, 이제 좀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겠니?" 하면서 말이다.
의사가 말한 '바꿀 부분이 많다'는 것은 사실 협박이 아니라 제안이었다. 그동안 무심코 흘려보낸 습관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는 것. 젊을 때처럼 밤을 새워도 괜찮고, 술을 마셔도 괜찮고, 운동을 안 해도 괜찮다고 우기던 시절은 이제 끝이다. 몸이 직접 나서서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간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중년의 변화는 혼자 겪기에는 너무 큰 일이다. 서로의 변화를 이해하고 함께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년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