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전쟁을 기억하게 하다.
끝나지 않은 전쟁
전쟁의 비극, 아픔이다.
그림에는 강철 로봇 같은 형태의 병사들이 줄지어 세워놓은 사람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이미 죽은 자의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들은 영혼마저 잃었다. 사람들은 벌거벗었고 여자와 어린아이도 있다. 뒤쪽에는 전쟁으로 불탄 흔적 같은 것이 보인다. 그림은 여자와 아이를 통해 나약한 존재를 억압하는 힘 있는 자의 폭력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전쟁을 표현한 피카소 작품이다. 1951년도 유화로 그려진 대형작품(110 ×210)으로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다른 작품인 '게르니카, 시체 구덩이'와 함께 3대 반전 그림으로 불린다.
이와 비슷한 작품이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의 학살(1814)'과 마네의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7~1868)'이다. 구도나 학살자와 희생자의 배치도 비슷하다. 오른쪽에 비인간적인 학살자를 왼쪽에 희생자를 배치하는 형태를 띠며 회색빛 창백함을 통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무겁게 다루고 있다. 세작품 모두 연관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상처를 기억하고 치유하는 노력을 한다. 전쟁은 모두에게 아픔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뿐 상처 없는 이는 없다. 지도자의 잘못된 오판이 돌아 킬 수 없는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전쟁이다. 피로 얼룩진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해 민족 간 깊은 상처를 입혔고 그 전쟁은 아직도 끝을 내지 못했다. 분단이라는 아픔은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다. 그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상처를 입게 만들었는가. 전쟁은 멈추었으나 이념으로 갈라져 아직도 서로에게 상처를 내고 있었다.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우리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도자의 광기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말이다. 무엇을 위한 전쟁, 누구 위한 전쟁을 하는가 광기 어린 집착이 가져오는 비극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 아픔은 언제 끝날 것인가. 누가 함께 아파할 것인가.
예술가들은 이런 상처를 치유하고 기록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화를 그렸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일 뿐 아니라 미로에 대한 경고이자 스스로 상처를 치유케 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어느 작가는 직접적인 전쟁의 상처를 드러내며 전쟁의 피해를 말하고 누구는 전쟁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간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전쟁의 실상을 알게 해 주는 시대의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어느 것이 마음을 울리는 가는 각자의 시각이만 그림에서 얻는 것은 아름다움보다 비극의 현장 같은 아픔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의 한 사람으로 예술가로서 자신을 드러냈던 작가를 통해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아픔의 실상을 함께 아파할 이유가 있다.
고야, 마네, 피카소의 전쟁 기록화뿐 아니라 김환기 피난열차, 박수근, 장욱진 등 많은 화가들도 한국 전쟁을 겪으며 그 슬픔을 은유적 표현으로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 그림에서 어떤 것을 찾았는가. 색감과 구도를 보았는가.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을 보았는가. 왜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의문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는가. 당시를 살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인가.
상처는 보는 것만으로 아프다. 아파하는 것이 정상이다. 전쟁을 기록하고 그것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무 같은 것이 아닐까.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고통받는 것이 누구의 아픔이 아닌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그림을 통해 돌아보는 고통의 순간들, 그 진실보다 잊힘이 두렵다.
* 대문사진; 2022년 홍보전시물(춘천시청) 부분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