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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May 13. 2020

매끈한 다리를 원하십니까

일회용 면도기

처음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의 것으로였는지는 기억이 난다. 욕실 선반 위에 올려진 아빠의 면도기로 슬금슬금 다리털을 밀고 팔에 난 털도 밀어봤다. 어린 마음에 식구들과 같이 쓰는 욕실에 내 면도기를 따로 두기는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몰래 그렇게 쓰고 물기를 탁탁 털어 감쪽같이 내려놓았지만 아빠는 딸이 쓴 줄은 차마 모르셨을 거고  아들 녀석이 썼겠지 하셨을 거다.


그러다 아가씨가 되어서는 미니스커트도 입어야 되고 짧은 바지도 입어야 했더랬다. 남성용 면도기가 웬 말이냐 해서 드럭스토어에서 여성용 면도기를 샀다. 광고 속에 나오는 여성처럼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로 우아하게 다리털을 밀었다. 발톱에는 예쁘게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고 그렇게 샤워를 마친 다음엔 몸이 건조하지 않게 바디로션을 철퍽철퍽 바르고 향을 폴폴 풍기며 욕실 문을 나섰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았다. 몸을 씻는 행위는 그저 말 그대로 씻는 것뿐이었다. 아기를 보다 보면 씻었어도 금방 땀이 났기에 쫓기듯 씻고 나왔어도 금세 찝찝해졌다. 다리털을 밀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다리털을 미는 행위는 욕실에서 내가 할 것 리스트에서 가장 하위로 밀려버렸다. 긴 연애기간 동안 나의 매끈한 다리가 익숙했을 남편은 그 시점에 적잖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면도기는 녹이 슬어가다가 욕실 청소를 하는 어느 날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몇 년이 훌쩍 지났다. 아이를 몇 더 낳고 나서 욕실에서 면도기를 쓸 일은 전혀 없었고 남편은 전동 면도기를 방 안 화장대에 놓고 썼기에 새 면도기를 둘 일도, 다른 면도기가 있을 리도 없었다.

나는 다리털이라는 게 일정한 길이를 유지하고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보잘것없는 다리에는 어느샌가 스스로의 허용 범위를 초과하는 길이의 다리털이 자랐고 매끈함과는 거리가 먼 비주얼을 갖게 되었다.

남편이 짐짓 사랑의 손길로 내 다리를 만졌을 때 흠칫 놀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그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충격과 불만의 세기가 커져가는 것이 어느 날은 가슴에 훅 꽂혔더랬다.

무시하고 그러려니 넘기고 넘기고 있던 차였다.


어려운 일도, 엄청나게 큰돈이 드는 일도 아닌데 그냥 안 했던, 쉬운 말로 방치해뒀던 다리털이었다. 아가씨적처럼 여성용 면도기를 살 필요성은 일절 부여하지 않고 일회용 면도기를 몇 개 샀다. 그때처럼 매일 밀 자신은 없었다. 마치 매일 공부할 건 아니지만 하는 척은 하고 싶어서 산 책 같은 느낌이랄까.


여느 날처럼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 온갖 피로가 어깨와 등을 덮어 거북이목과 꼽추등을 한 채로 흘끔흘끔 보다가 집어 든 면도기를 선반에 올려놓고 안경을 벗고 씻는다. 온통 뿌연 시각으로 기계처럼 씻다가 면도기를 집어 비누칠한 다리를 밀었다. 다리털이 제대로 밀리는지 보일 리가 없다. 이가 나기 시작한 막내가 언제 울며 깰지 모르는 상황에 정성과 시간을 쏟는 것은 사치다. 그렇게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두 다리의 털을 밀고 물로 헹구는 데 종아리 뒤 쪽이 따끔하다. 그 역시 제대로 보일 리 없지만 작은 상처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는 것이 불현듯 기억이 났다. 에이, 재수 없구먼. 피까지 볼일인가 싶었다.


씻고 나와서 안경을 쓰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살점을 살짝 깎아먹었는지 피가 주룩 흘렀다. 시종일관 이럴 것까지 있었나, 괜히 했다 싶어 짜증이 슬몃 났지만 얼른 연고를 바르고 애들이 쓰는 뽀로로 밴드를 붙였다.


분명히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면도기로 열심히 밀었는데 어떤 부분은 털이 잘리다 말았다. 내가 또 하나 봐라 빈정이 확 상했다. 그래도 예전처럼 뭐가 이렇게 길게 나있냐 싶지는 않은 정도이다. 남편은 아직 내 다리를 보지 않았고 만지지도 않았다.


다만 이튿날 아이들이 내 다리에 붙은 밴드를 보고 거기에 밴드를 왜 붙였냐고 (그거 우리껀데) 물었을 때 아, 내가 어제 다리털을 밀었었지 라고 퍼뜩 기억이 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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