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포기의 천재라고 합니다.

나주 여행기 ( 4 )

by 조매영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이동하고 나서야 ADHD 약을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시간을 보니 집에 다녀와도 늦지 않을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약은 먹었던가. 아침밥을 먹긴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머릿속 구석에 있던 엉킨 실타래가 굴러온다. 엉킨 실타래를 풀다 보니 용산역이다. 일단 내린다. 사방에서 오색찬란한 실타래들이 굴러다닌다. 잠시 벤치에 앉아 눈을 감는다. 일단 오늘은 약을 먹었다 치자. 그리고 돌아가는 것은 포기하자. 귀찮다. 뭔가 나 자신에게 너무 성의 없는 것 같다.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자. 여행 중에 집중할 일이 있던가. 없다. 그럼 됐다. 엉킨 실타래를 다시 구석에 밀어 두고 눈을 뜬다. 사방에서 오색찬란한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역시 나는 포기의 천재다.


역사에 사람이 많은데도 멀리 흰 점퍼를 입고 있는 아빠가 보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마냥 새하얀 색에 헛웃음이 나온다. 군대도 안 간 사람이 동묘 시장에서 산 디지털 군복을 한참 입고 다니더니만 고향을 그 꼴로 가기엔 부끄러웠나 보지. 부끄러움을 알긴 하구나. 동네 사람들이 나보고 주워 온 자식이냐고 물었던 것은 안 부끄러웠나. 아직 여행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 벌써 이러면 안 되지. 천장을 본다. 높다. 더운 공기는 위로 향한다고 했던가. 내 안에 화를 넘치지 않게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열기가 천장을 가득 채울 때까지 천장을 봤다.


가까이 가니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갔냐고 물어보니 화장실에 갔다고 한다.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니, 커피를 사 오겠다고 하고 자리를 피하기로 한다. 잠깐 마주친 설레는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 인파를 헤치며 가던 길. 불현듯 고등학생 때 아빠가 가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따라갔던 것이 떠올랐다. 잠시 멈춰서 돌아본다. 기차 타는 곳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빠가 보인다. 주민센터에 낼 서류를 발급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 옆에 앉아 진료받는 것을 들었다. 아빠는 사람이 많은 곳이 두렵다고 했었다. 누가 자신을 찌를 것 같다고 했었다. 여러 말을 들었지만, 다른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이 약발이 잘 들었나 보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약을 먹었겠지. 자기 몸은 더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편의점에서 산 아메리카노가 유난히 쓰다. ADHD약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릴 때 치료받을수록 경과가 좋다던데 아빠도 좀 더 일찍 치료받았으면 나를 때리지 않았을까. 웃기는 생각이다. 의원에서 아빠가 진료받았을 때 다른 말들이 기억나지 않지만, 폭력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히 없었다. 있었다면 내가 기억 못 할 리 없다. 언젠가 가족 이야기가 나오던 중 친척 형이 내게 그랬다. 큰아빠는 너를 그냥 싫어하는 것 같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일찍 치료받았다면 일찍 멀쩡한 정신으로 나를 때리는 사람이 되었겠지. 헛된 망상은 그만하기로 한다. 나는 포기의 천재니까.


엄마와 아빠가 보인다. 많이 늙었네. 아무 기대도 되지 않는 여행. 그래도 어쩌겠나. 가야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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