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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Jun 23. 2024

텃밭에서 봄을 걷어냈다.

 텃밭 주변에 꽃이 많이 폈다. 여러 꽃을 살펴봤지만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나는 예술을 하기 그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른 사람이라서 예술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원형 고무통 뚜껑을 옆으로 밀친다. 벌레들이 떠있다. 항상 올 때마다 뚜껑이 잘 덮여 있었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들어가 죽어 있는 걸까. 고무통에 물뿌리개를 집어넣어 물을 담는다. 벌레가 물뿌리개에 담기지 않도록 조심히 담는다. 어김없이 벌레 사체도 담겼다. 모기였다. 죽어서도 내 주변을 서성이는 것이 불쾌하다. 그렇다고 물을 버리면서까지 사체를 덜어낼 수는 없는 일. 그냥 그대로 들고 텃밭으로 향한다. 모기가 죽어서도 내 주변을 서성인 것처럼 나도 텃밭에 물을 주는 일에 충실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물을 줬다. 상추도 쑥갓도 꽃대가 많이 올라왔다. 몇 번이나 꽃대를 뜯어냈는데도 소용이 없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꽃대가 올라오겠지. 나는 그걸 또 모두 뜯어내려고 노력하겠지. 꽃은 결국 필 것이다. 꽃 피우기 전에 여름 농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애인이 심을 것들을 들고 왔다. 감자를 심었던 곳을 괭이질과 갈퀴질을 했다. 잡초를 들어 올리니 뿌리에 개미 몇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감자 자리에 개미집이 있었다. 잡초를 뽑으며 발견했었지. 뿌리에 기대 낮잠을 자고 있던 녀석들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살겠다고 자꾸 파괴하는구나. 죄책감이 들었지만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감자를 심었던 자리에 들깨와 서리태를 심었다. 애인은 나중에 순 지르기를 꼭 해줘야 한다고 했다. 언제 해야 하는지도 말해주었지만 잊어먹을 것 같았다. 애인에 텃밭이 순 지르기 하는 날 내 텃밭도 순 지르기를 하기로 했다.

 똥풀(쑥갓, 치커리, 상추)도 정리했다. 처음 한 번 솎아주고 한 번도 솎아주지 않은 통에 엉망이었다. 아직 덜 자란 것들은 옮겨 심었다. 큰 것들은 뿌리째 뽑은 다음 먹을 부위를 수확하고 나머진 버렸다. 버릴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 쪽파 종구를 심으니 조금 쓸쓸해졌다. 

 이번엔 고랑을 깊게 파려고 노력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공간이 확실하게 구별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깊게 판 고랑 중 하나에 공심채를 심었다. 물시금치라고도 불리는 만큼 물을 좋아하니 고랑에 심는 것이 좋다는 애인의 말을 따른 것이다. 고랑에 무언가를 심은 것은 처음이라 잡초를 정리하다 몇 번 밟았다. 잘 자랄 수 있을까.

 바질에도 꽃대가 올라왔다. 수확을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꽃대가 보여 당황했다. 결국 바질도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 바질을 뽑는데 바질향이 진하게 났다. 튼튼한 아이들이었다. 손에 묻은 바질 향이 비누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바질은 꽃을 볼 걸 그랬나 후회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바질이 있던 자리에는 여름 상추를 심었다.

 당근은 다음 달 초에 수확하기로 했다. 애인이 당근 몇 개를 솎아 주었는데 제멋대로 생긴 것이 귀여웠다. 비좁은 이랑 속에서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었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당근을 수확하면 그 자리에 무엇을 심어야 할까. 팔월에 배추를 심기로 했으니 그냥 두어야 할까. 고민해 봐야겠다.

 그간 조금은 능숙해졌다 생각했었다. 정리하고 새로 씨앗을 뿌리니 다시 미숙해졌다. 잘 자라주었던 아이들은 내가 잘나서 잘 자란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잘나서 잘 자란 것이었다. 씁쓸하다. 잘 자란 만큼 내가 잘 수확하지 못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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