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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ug 08. 2017

여름 가고 가을이 와도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

잘 나가던 남자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파리 사교계 귀부인들의 초상화를 기막히게 그려내 엄청난 인기와 부를 누렸던 남자는 자신의 실패가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를 떠나 추방당하다시피 향한 영국. 그렇게 도착한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파리의 찬란했던 과거가 그를 괴롭게 했다. 그래서 그는 우울해했고, 그림은 신통찮았고, 돈에 쪼들리면서 불행한 삶을 살았을까? 남자는 최악의 상황을 겪었지만 붓을 꺾지 않았다. 절망한 화가의 손 끝에서는 전에 그린 적 없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그림. 아련하고 따뜻한 정경이 마음을 흔드는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1887)>. 그렇다면 우리는 이 화가의 이름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6)다. 



사전트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미국 국적이지만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감각과 취향은 아마 이러한 가정환경 덕이 클 것이다. 열여덟이 되던 해 사전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인생에는 몇 번의 큰 변화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 시간이 지나 그때를 되돌아보면, 어떤 변화는 '예정되어 있었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었음을 알게 된다. 파리로의 이주는 사전트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사전트는 파리에서 오귀스트 뒤랑(Emile Auguste Carolus Duran, 1838-1917)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뒤랑은 새로운 미감으로 매력적인 초상화를 그렸던 프랑스의 화가였다. 훗날 사전트가 기품 있는 초상화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승승장구하던 사전트에게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어떻게든 화폭에 옮기고 싶은 여인을 만난 것이다. 사전트는 주문받은 초상화만을 그려왔다. 하지만 그녀를 본 이후,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피력하게 된다. 사전트를 사로잡은 여인은 매혹적인 외모와 우아한 자태로 당대 파리 상류층의 여왕이자 사교계의 뮤즈로 군림했던 마담 피에르 고트로(Madame Pierre Gautreau)였다. 사전트는 고트로 부인의 아름다움이 초상화 속에 고스란히 담기길 바랐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강조하기 위해 어둡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쨍한 블랙 드레스를 입게 하고, 어두컴컴한 배경 앞에 홀로 서도록 했다. 어깨끈이 살짝 흘러내린 고트로 부인의 모습은 묘한 에로틱함을 자아냈다(현재 남아 있는 그림은 흘러내린 어깨끈을 수정한 것이다). 이 그림은 1884년, 파리 전시회에 <마담 X>라는 제목으로 출품됐다. 


John Singer Sargent, Madame X, 1883 ~ 1884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사전트의 예상과 달랐다. 사람들은  <마담 X>가 천박하고 외설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담 고트로의 어머니는 날마다 사전트를 따라다니며 그림 전시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전시가 끝난 뒤 고트로 집안에서는 이 작품의 구매를 거부한다. 마담 고트로는 외설 시비에 시달리다 한동안 사교계를 떠나 잠적하게 된다. 사전트는 이 작품에 대해 자신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의 마담 고 트로를 그렸기에 어떤 것도 논란이 될 것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센세이션을 몰고 올 것이라 믿은 이 작품이 자신의 화가 인생 중 유일하게 혹평과 조롱을 받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사전트는 화려했던 파리에서의 생활을 모두 접은 채 영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John Singer Sargent, <Carnation, Lily, Lily, Rose>, 1885-6, 1740 x 1537 mm, Tate Gallery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힘든 그림. 제목마저도 달큼한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가 사전트 인생의 가장 큰 실패 이후에 완성된 그림이라는 사실이 나의 맘 속 깊은 곳을 슬며시 건드린다. 흰 옷을 입은 두 소녀가 해 질 녘 노을이 잔잔하게 비쳐오는 정원에서 등불을 밝히고 있다. 정원에는 흰 백합과 붉은 카네이션, 핑크빛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사전트가 이 그림을 완성한 것은 1886년 10월경이지만 작업 구상을 시작한 시기는 그보다 빠른 1885년 9월경이다. <마담 X>의 실패로 영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전트는 새로운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나무와 백합이 우거진 숲 속, 대롱대롱 매달린 중국식 등불의 고요한 불빛. 우울하면 우울한 것만 보인다.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사전트는 1886년 여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영국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프레데릭 바나드(Frederick Barnard)의 두 딸, 돌리(Dolly)와 폴리(Polly)였다. 하얀 뒷 목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짧은 머리의 왼쪽 소녀가 당시 열한 살이었던 돌리, 골똘한 표정의 오른쪽 소녀가 일곱 살이었던 폴리다. 사전트는 여름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한낮이 지나고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때의 그 찰나를 포착하고 싶었다. 보랏빛, 핑크빛, 주황빛이 한 데 섞여 하늘을 물들이는 딱 그 몇 분. 하늘의 색깔, 차오르는 공기, 스며드는 빛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는 그 몇 분 동안만 사전트는 붓을 들었다. 그는 마치 무언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비장한 무사처럼 작업에 몰두했다. 이 작품은 완성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뜨거운 여름은 금세 흘러가버리고 가을이 성큼 다가 온다. 생생했던 꽃들이 시들기 시작하고 푸른 빛깔 잎사귀들은 윤기를 잃은 채 바삭바삭 말라간다. 사전트는 덧없이 지나가버리는 여름이 아쉬웠다. 그림 속에는 반드시 그 해 여름의, 타는듯한 열기가 식어가는 오후의 고즈넉한 풍경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사전트는 죽어버린 여름 꽃들을 꺾어내고 그 자리에 조화를 심어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렇게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는 같은 해 10월 완성된다. 사전트는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화폭에 담으면서 자신의 지나가버린 아름다운 시절들을 찬찬히 회상했으리라.   


그림 속 어느 꽃이 조화인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런던 테이트 브리튼 전경


사전트의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는

템즈강 북쪽의 밀뱅크(Millbank)에 위치한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테이트 브리튼은 영국 미술품만을 전시해요.

사전트는 파리를 떠나 영국에 정착한 뒤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해가 저물어가는 어느 여름, 혹시 이 곳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꼭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를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림 앞에서 저마다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를 떠올려 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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