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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ug 01. 2017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대학시절,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된 날이었다. 

학기 중에 빌려둔 책들을 반납하기 위해 낑낑대며 도서관으로 걸었다. 반납기한이 다 되도록 읽지도 못하고 쌓아뒀던 책들. 기다리던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는 설렘으로 다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한 아쉬움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그저 빨리 이것들을 도서관에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뿐. 등줄기로 흐르는 땀, 후끈한 열기에 익을 대로 익은 볼.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그제야 숨을 돌렸다. 삑, 삑, 내 손에 있던 책들이 바코드에 찍히며 제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 책장 쪽을 바라봤다.



한 여학생이 책을 읽고 있었다.

버건디 색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목이 살짝 늘어난 연회색 티셔츠, 청 반바지, 질끈 묶은 머리. 잔뜩 집중한 옆얼굴이 발그랗게 달아올랐다. 무슨 책이었을까. 두껍지 않지만 얇지도 않은 책. 얼마 남지 않은 책장을 보아, 스토리는 절정에 다다른 듯했다. 무방비 상태로 소파에 기대 있었지만, 누구도 함부로 그녀를 침범할 수 없었다.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한 그녀는 견고한 성 안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작열하는 여름 속으로 나서기 전, 다시 한번 그 여학생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떤 세상과 만나고 있을까. 도서관 문을 여니 쏴아-, 매미가 세차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Jean-Honoré Fragonard, <Young Girl Reading>, 1776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 또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걸까. 샛노란 드레스를 입고 라일락 색깔의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댄 소녀가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살구빛 볼, 도톰한 이마, 내리깐 속눈썹. 아름다운  이 소녀는 한 손에 들어오는 조그만 책 속의 세상을 항해하고 있다. 아름답다. 감히 누가 그녀의 세계를 깨뜨릴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소녀가 책에서 눈을 떼고 현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이 소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프라고나르는 바다가 보이는 프랑스 남부의 도시 그라스(Grasse)에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즈음 대도시 파리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예술적 재능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라스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물론 타고난 재능이 있었으니 화가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파리가 아닌 그라스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면 프라고나르는 '해안 도시의 풍광을 아름답게 그리는 풍경화가'로 우리에게 알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는 파리에서 살게 되었고, 그 덕분에 장 시메옹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 1699-1779)의 공방을 거쳐 14살이 되던 해,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1703-1770)의 공방에 도제로 들어가게 된다. 샤르댕과 부셰는 프랑스 미술계에서 로코코(Rococo) 미술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이다.



프라고나르는 왜 샤르댕의 공방에 오래 머물지 않았을까? 대다수 화가들이 화려하지만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미술에 빠져 있을 때, 샤르댕은 소박하고 절제된 정물화에 마음을 쏟고 있었다. 한마디로 당대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행보를 택한 화가가 바로 샤르댕이었던 셈이다. 어린 시절의 프라고나르는 풍부하게 반짝이는 유행의 물결에 매혹당했던 것일까. 그가 샤르댕을 떠나 새로이 정착하게 된 공방의 주인 부셰는 로코코 미술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화가였다.  특히 부셰는 루이 15세 궁정의 실세였던 왕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Madame de Pompadour)이 가장 아꼈던 화가이기도 했다.  그러한 부셰를 스승으로 모신 프라고나르가 부셰의 뒤를 이어 프랑스 미술계를 이끌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셰가 퐁파두르 부인의 총애를 받았듯, 프라고나르 역시 왕의 마지막 정부였던 뒤바리 부인(Madame du Barry)의 지지를 받으며 활약했다. 하지만 모든 유행은 시간이 지나며 빛을 잃고 새로운 유행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프라고나르가 왕성히 활동하던 시기는 로코코 미술의 유행이 저물어가던 때였다. 그가 '로코코 미술의 마지막 대가'라 불리는 이유다. 프라고나르는 1773년 이후 그동안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화풍을 보여준다. 궁정의 쾌락, 사랑놀음 등의 주제에서 벗어나 소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초상화들 중 하나가 바로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소녀>이다.



이 작품은 단 하루 만에 완성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그림이 완성되기 전, 소녀의 머리 부분이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엑스레이 사진으로 그림을 분석한 결과, 소녀는 원래 관람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프라고나르는 무엇 때문인지, 관객을 바라보는 소녀가 아닌 책에 몰두한 소녀의 옆모습을 그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소녀가 책을 쥔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 그림은 그저 한 인물의 초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은 노란 드레스를 입은 청순한 소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했을 테고. 하지만 소녀가 책으로 온전히 몸과 마음을 돌린 순간, 이 그림은 우리에게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누군가를 오래도록,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는 즐거움. 그를 둘러싼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조그만 성을 어렴풋이 느낄 때의 떨림. 그리고 그 성을 결코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져오는 기쁨.


프라고나르의 변심 덕분에 우리는 더욱 아름다운 그림과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언젠가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당신을 바라볼 때까지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길.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전경


이 그림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수도에서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프라고나르의 그림을 볼 수 있군요.

샛노란 드레스를 입은 책 읽는 소녀,

그 그림 앞에서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초하루를 제외한 모든 날에 문을 연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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